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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화 Jan 10. 2022

어쩌지 마음에서 자꾸 슬픈 것만 나와

하영에게​


안녕 하영. 어른들은 이런 식으로 편지글을 시작하기도 하더라. ‘하영이에게’가 아닌 ‘하영에게’라는 호명 방식이 적당한 과거의 것처럼 특별하게 느껴져서 마음에 들어.


 저번에 말했던 그 사람 있잖아. 목소리가 아름답고 성격은 다정해 보인다는 그 사람.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면 그런 방식으로 편지를 시작하고 무슨 말을 써줄 수 있을지 자주 고민했었다? 내가 말에는 서툴어도 글은 예쁘게 써줄 수 있으니까. 어떤 글이 그를 기쁘게 할까 상상하며 즐거워했던 거야.


 그러니까 차이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어. 가끔. 아주 가끔이었어ㅋㅋㅋ. 혼자 좋아하는 시간을 더해가는 게 의미는 있을지라도 효율은 떨어지는 짓인 줄 알지만 어떻게 막을 수가 없더라. 너와 네가 모르는 친구들은 그 사람과 잘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손뼉을 짝짝 치며 기뻐했던 거 알아. 하지만 나에게는 속절없이 짝사랑하느라 너무나도 무력한 반년이었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들이댔다가 차이고 몸살에 걸려(상사병이라는 표현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지만 사실인 것 같아) 누워 있는 나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지. 아침에 눈 뜨기 직전이면 감당이 안 되는 마음이 마구마구 파도처럼 몰려왔어. 그것들 때문에 평소에는 하지 않던 짓도 많이 했지.


 친한 언니들에게 매일 저녁 전화를 돌리고 힘든 상황과 마음을 몇 번이고 설명하며 엉엉 울었어. 내가 하는 짓이 한심하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항변하고 싶은 건지 말이 막, 막, 길어지더라. 내 전화를 받아주는 사람들의 인내함에 조금은 놀랐던 것 같아. 그런 행동은 내가 거의 고등학생? 20대 초반 이후로는 하지 않았던 행동이니까, 언니들이 그렇게 내 감정을 잘 받아주는 위인인지 잊고 있었나 봐.


 네가 그 시절의 나를 얼마나 어떻게 기억할지는 잘 모르겠어.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그때의 나는 이런 사람이었어. 똑같은 상처를 반복하여 설명하며 주변인들을 지치게 만드는 사람. (초점 없이 단죄하던 눈빛들이 기억이 나네) 같은 일에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서 희석되어가는 상처가 아니라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몰랐던 고등학생. 네 눈물이 불편해, 네 슬픔이 너무 과해, 너는 뭐라고 하면 담아두는 표정 짓더라, 그 표정 짓지 마, 그런 말들을 도저히 잊지를 못한 아이. 그래서 내 일면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대가로 경직된 윗볼을 얻은 아이.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보다 눈물과 자기연민으로 가득하면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하던 게 내 고민이었어.


 한 번은 교회에서 동남아 선교를 하러 갔어. 모든 일을 마치고 현지 아이들과 헤어짐의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거든? 다들 눈물도 보이고 서로 포옹하기도 하고 그간의 기쁨과 주고받은 마음을 정돈하는 중이었어. 나는 그런 시간을 향유할 줄 몰라서 민망하지 않은 척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물품을 정리하고 차에 실었던 것 같아. 지치고 피곤하면서 감동에 고양되기까지 한 끔찍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버스에 앉자 나는 좀 가만히 있고 싶었어. 근데 딱 그 시점에 선교팀 막내가 감동적이었던 일들을 늘어놓으면서 눈물을 막 장착하는 거야… 어후 너무 피곤한데… 내가 걔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니? ‘울지마. 지금 울 타이밍 아니다. 달래줄 사람도 없어.’ 그때 이후로 그 친구는 청년부 예배를 잘 나오지 않게 되었던 것 같아. 다정하게 감정과 상황을 해결하는 능력을 잃은 완전히 쓸모없고 무책임한 선배가 된 느낌이었어. 뭐라구? 인성 파탄이라고? 조용히 해봐.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내가 말했지? 나 요즘은 글을 써. 요 근래 해봤던 것 중에 가장 내 재능을 느낄 수 있는 분야라 신이 나. 내 글을 읽고 합평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양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도 있어서 신기해. 이를테면 내가 가진 감정은 굉장히 강하고 굉장히 약하지만, 할 수 있는 한 아무것도 아닌 척 담담하고 건조한 단어로 표현한다는 거야. 나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 상황을 묘사하는 방법을 주로 써. 읽는 이들이 직접 그 상황에 들어와 보고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서 그래. 왜냐하면 그게 그냥 내가 몹시 슬펐어요, 엉엉 울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하는 것보다 덜 민망하잖아. 누군가 이 부분은 왜 이렇게 쓰셨나요, 묻는다면 나는 그냥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잖아요? 일반적으로 그런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이렇게 멋쩍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잖아. 굉장히 받아들여지고 싶은 부분을 내어 보일 때 읽는 사람이 재단하는 일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쓰고 있어.

그런데 하영아, 입을 열면, 펜을 들면 자꾸 슬픔이 삐져나와. 이게 아닌데, 싶어. 나는 내 슬픔에 대해 말할 때 분명히 인생 이야기하지 않기로 해놓고서 4잔 뒤에 플라톤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그런 민망함을 느껴. 가끔은 나도, 나도 바람에 스쳐서 난 생채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고, 집안 어른들과의 서사를 구구절절 나열하며 내가 얼마나 불쌍한 인간이었는지를 쓰고 싶어. 집안에 들인 화분들과 좋아하는 시집에서 발췌한 한 문장으로부터 백 문장을 쓰고 그 오글거림을 거침없이 누리고 싶어. 성화는 그만 좀 울어라, 도움 안 되는 감정 집어치워라 하는 처우가 옳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도록 어떻게든 처치하고 싶어.


 아직도 걱정이야. 한두 번은 괜찮지,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 쓸 글에도 온통 우울 범벅이라면 사람들이 싫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글은 웃기거나 그저 읽힐만한 글들이 잘 안되더라. 눈물을 꾹꾹 참고 쿨한척 하는 찐따의 글 같은 느낌도 들어. 슬픔을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서 그 마음을 접고 또 접어서 두껍고 투박한 모양으로 응축하게 되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아득하게 크고 다채로운 감정을 바늘구멍으로 짜내게 되고 사람들은 그 안에 찌부된 기승전결을 이해하고자 자세히 보게 되는 거지. 나는 읽는 이들이 나에게 질려하거나 글 읽기를 포기하지 않기만을 바라.


 나는 어떻게 하면 울음도 괜찮다는 사실을 나에게 믿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내 거울 속에 비친 형상은 의미 있는 변화를 겪게 될 텐데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상상이 안 돼. 바라는 게 있다면 편안해보이는 얼굴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래를 잘했던 그 사람을 남친으로 만들기에 실패했지만, 변화 후 성화는 남친 만들기 혹은 남친으로 만들기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나는 반강제적으로 내 글을 읽힐 수 있는 사람이 좀 필요한 것 같거든. 그게 가능한 사람으로 물색해보려고 해. 너도 주변에 그런 사람 있는지 좀 둘러봐 준다면 고맙겠어. 긴 글 읽어줘서, 긴 슬픔을 함께해줘서 고마워. 해도해도 끝이 없네.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 안녕!


‘사랑을 담아’라는 표현을 써보고 싶었던 성화가, 사랑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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