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그 시절
중앙도서관 입구 왼쪽 키 큰 나무가 풍기는 이국적인 정취는 눈길 한 번 잡아끄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주가지는 길이가 3미터가 족히 넘어 보이지만 큰 키에 비해 굵기는 여리여리하다.
나무 꼭대기에서 쭉쭉 뻗어 자란 이파리는 하나 크기가 우산으로 써도 될 정도로 넓고 두껍다.
땅에 떨어지면 주워보고 싶기도 하지만 나무와 연결되어 잎을 단단히 붙잡아주는 줄기는 부러뜨려도 꺾이지 않을 만큼 튼실해 보인다.
가을 낙화를 연상시키는 감성적인 나뭇잎과는 차원이 다르다. 바람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엷은 잎이 아니다. 숫자도 많지 않은 데다 본체가 가지를 꽉 붙들고 있어 좀처럼 분리되기 힘들어 보인다. 기상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쉽게도 꽃이 피거나 열매를 맺는 광경은 감상할 수 없다.
낯선 이국 땅에서 자란 두꺼운 잎은 잘 떨어져 나가지도 않고 열매를 맺고 싶어도 기후가 허락하지 않는 쓸쓸한 이 나무의 이름은 놀랍게도 바나나 나무다.
이곳은 식물원도 아니고 온실도 아니다. 집에서 화분에 키우는 반려식물을 감상한 것도 아니다.
학교 정원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야외 공간에서 자라는 생명력 있는 나무 한그루다. 바나나가 자라야 하는 나라의 높은 온도와 습한 환경을 맞춰주었을 리 만무하다. 오지 체험 프로그램 같은 데서 본 사람이 기어 올라가 열매를 잘라 땅으로 툭 떨어뜨리는 거대한 나무보다 훨씬 왜소하다.
방송에서 본 바나나 나무는 커다란 잎이 무성하게 피어 있고 사이사이에 자라는 바나나 무더기도 그 자체가 나무라고 보일 정도로 개수가 많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 나무가 바나나인지도 잘 모른다. 그저 무심히 지나갈 뿐이다.
여름에야 어찌어찌 견디겠지만 겨울 혹한에서 살아남아 몇 해를 보낸 걸 보면 쉽게 명을 놓지 않는 놈이다.
한국 땅에 와서 하얗게 내리는 눈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어리둥절했을 것인가. 동지라고는 아무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놓인 자신의 모습에 얼마나 당황했을까.
바나나나무가 있는데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어느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 입학 하고 처음 해보는 알바였는데 내 손으로 돈을 번다는 건 신나는 일이었지만 생각보다 녹록하지 않았다.
주류 판매 업종이다 보니 늦은 오후부터 새벽까지 하는 일이 고되기도 했고 그리고 어떠한 이유로 정신적인 수양을 상당히 필요로 했다.
가게는 주인 어머니와 주인인 아들과 그 동생까지 세 명이서 운영했다.
주인의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얼마나 일품인지 아르바이트생과 본인들을 위해 저녁 식사거리를 만들어 놓으면 밥을 먹다 모두들 감탄하기 일쑤였다.
김치찌개 같은 단순한 반찬 하나를 해도 어느 맛집 못지않게 훌륭한 맛을 자랑했다. 간혹 동태탕이나 갈비찜 같은 별식도 해놓으면 일하다 짬이 날 때 이건 꼭 먹어야 한다며 반드시 챙겨 먹곤 했다.
인심도 얼마나 후한지 뭘 좀 먹으려고 밥 같은 걸 뜨고 있으면 많이 먹으라는 말을 항상 해주었다.
그리고 허기 진 상태에서 일하면 피로가 누적된다며 밥을 안 먹으면 한밤중에라도 챙겨 먹게 했다.
가게 주인의 동생 그러니까 음식 솜씨 좋은 아주머니의 막내아들은 제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그 또한 음식에 일가견이 있었다.
어머니가 반찬을 해놓으면 한 숟가락 떠먹어보고 그 안에 들어간 양념을 모두 알아맞췄다.
두부, 야채, 버섯 같은 눈에 보이는 식재료야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들기름, 깨소금, 새우젓 약간에 후추 조금 쳐서 만들었다,와 같은 설명을 줄줄이 읊어댔다.
그런 양념을 넣으면 국물이 이런 맛이 나나? 같은 집에 살기 때문에 주 사용 양념을 대략 아는 것 아니야?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막내아들이 해놓은 음식을 먹어 보면 그런 생각이 쑥 들어간다. 막내아들의 음식도 기가 막힌 찬사가 쏟아져 나온다.
별식이 아니라 매일같이 해 먹는 그렇고 그런 음식들에서 말이다. 그도 음식 맛을 기가 막히게 내는 절대 미각을 가졌다.
그래서 가게 안에서 어머니는 안주 및 음식 조리 총괄을 하고, 막내아들은 주방 및 서빙 관리, 큰 아들은 직원 채용부터 돈 관련된 일까지 영업장이 돌아가게 하는 전반적인 책임자 역할을 했다.
솜씨 있는 사람들이 두루 있으니 언뜻 잘 돌아갈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사정이 다르다.
맡고 있는 직책이 모두 총괄책임자다. 모두가 매니저이며 모두가 책임자이고 셋 다 사장이다. 그리고 그 모두가 가족 관계로 엮여 있다.
밤마다 영업장 구석에서는 큰 소리가 오갔다.
주방에 딸린 0.5평도 안 되는 작은 휴식 공간에 앉아 서로를 향해 고성을 지르며 싸우는데 주로 이런 내용이다.
“엄마는 하지 마 그러니까 내가 한다고.”
“여기 니가 차렸냐? 내가 다 차려줬다 이새끼야.”
“엄마가 나서는 거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내가 뭘 나서. 니가 하는 게 하도 속 터지니까 이러는 거 아냐.”
가게는 아들 자금이 아닌 집안 돈으로 차려졌다. 자금줄을 대고 있는 어머니는 운영에 관여하려고 한다. 젊은 손님이 대부분인 장삿집에 나이 든 어미가 의견을 내면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내는 족족 탐탁지 않았다. 특히 큰 아들은 매번 엄마를 무시하는 투로 맞섰다.
그럴 때마다 모친은 투자금 운운하며 아들 자존심을 건드려 응수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일부 파악한 사달의 원인이다. 속사정은 몰라도 대부분 기승전 투자금 자존심 싸움으로 이어졌다.
물론 싸움의 강도와 빈도를 봐서는 그 이상의 내막이 있을 법 한데 매번 쌓이는 정신적 피로에 지쳐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구석에서 싸운다 해도 워낙 고성이다 보니 손님들에게도 들리는 일도 잦다. 무슨 소리냐고 묻는 이들에게 일일이 해명하다 보면 멘탈 털리는 건 일도 아니다.
이렇게 싸워대다 호프집으로 치면 이른 저녁인 아홉 시 무렵 주방에서 손을 놓고 주인의 어머니는 집으로 가버리곤 했다.
빈자리는 막내아들이 채워 부지런히 안주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주인 어머니와 막내아들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다. 이들은 매일 같이 어머니와 큰 아들, 큰 아들과 막내아들, 막내아들과 어머니가 번갈아가며 싸웠다.
하루는 눈이 펑펑 내리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서 길이 빙판으로 꽁꽁 얼어붙은 날이었다.
그들은 이 날도 어김없이 파이팅 넘치는 하루를 시작했고 보아하니 출근 전부터 냉랭했던 것으로 보였다.
계속되는 싸움에 모친은 단단히 화가 났고 그 길로 빙판길을 비틀 거리며 걸어 나갔다. 혼자 집에 가버리겠다는 것이다.
다른 날은 몰라도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누가 모셔다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걱정되는 마음에 따라 나갔다.
주인 어머니는 큰길 쪽으로 걸어 나가 잽싸게 택시를 잡았고 나 보고는 자기는 알아서 할 테니 어서 들어가 일하라는 말을 남기고 쌩하니 가버렸다.
다시 가게로 돌아온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영업 준비를 했지만 어둑해진 골목길 혼자 걸어 나가는 60대 노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안 좋게 나가버리면 험악한 분위기에서 다음 날은 어떻게 일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이튿날 그 가족은 모두 출근했고 나도 알바하러 도착했다. 전날 밤 우려했던 모습과 달리 이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화기애애했다.
어젯밤 일은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잘 들어가셨냐고, 퇴근 후에 불편한 건 없으셨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모두 어제는 아무 일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집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이 가족이 사는 방식은 참으로 아연실색케 했다. 허구한 날 싸우지만 그 싸움이 열두 시간이 지나지 않아 소멸되는 쿨내 나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알바생들만 힘겨워지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나날이었다.
일하다 보면 조리가 필요한 안주는 손댈 수 없지만 과일 플레이팅 같은 쉬운 메뉴는 알바생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
그중에서 큰 접시에 나오는 색색깔 제철 과일 안주는 주문이 들어오면 가끔 세팅할 기회가 있었다.
사과 껍질을 까고 수박을 자르는 일은 쉽게 도왔다. 키위도 반으로 잘라주면 주방 담당(모친일 때도 있고 막내아들일 때도 있다)은 예쁘게 놓아주었다.
과일 중에 바나나는 좀 별나게 자르는 방법이 있는데 막내아들은 이걸 알바생들에게 가르쳐주곤 했다.
한 개를 따서 가운데쯤에서 칼집을 낸다. 바나나 잡고 있는 손이 칼에 찔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칼집 낸 부위를 사선으로 자르고 뒤집어서 한 번 더 사선으로 자르면 바나나에 삼각 귀가 두 개 생긴다. 양 끝 꼭지를 잘라 평평하게 만들면 길쭉한 바나나가 둘로 나눠져 세울 수 있다.
이 작업을 하게 된 후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 이외에 뭔가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새로운 기술 같은 것을 습득한 기분이었다.
매일 밤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여 새벽 무렵 잠드는 날이 겨울 방학 내내 지속됐다.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두 달을 그렇게 근무하고 나니 어느덧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고 말했고 셋 중 한 명의 대표가 그러라고 했다.
이듬해 5월 아무 생각 없이 빈둥거리고 있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겨울 방학 때 근무한 호프집 큰 아들이었다.
잘 지내냐. 잘 지냅니다. 저번에 전화했는데 전화가 아예 안되더라. 한동안 정지시켜 놨어요. 그래 방학 때는 뭐 하니. 그냥 놀려고요. … 그래 알았다.
6월 중순쯤부터 여름방학이다. 방학이 시작되면 다수 학생들이 알바를 구한다. 그 가게도 새 알바생을 구하는 모양이다.
완전히 신삥은 처음부터 가르쳐야 한다. 게다가 이 가게는 매장 일이 전부가 아니다. 주인 가족의 생리를 알아야 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기운.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만이 버틸 수 있다.
눈치 볼 줄 아는 사람이 사회 생활하기 편하다며 자기들끼리 싸울 때마다 훈시해 왔다. 이곳에서 윗사람 대하는 아부의 기술을 배우면 어디 가도 써먹을 일 있을 거라는 자체 합리화로 말이다. 그런 개똥철학을 이해할 알바생은 어떻게 해도 뽑기가 어려우니 기존에 해봤던 사람을 다시 불러오고 싶었던 것이다.
오너 일가가 하루가 멀다고 쌈박질해대는 걸 익히 보아왔다. 그만두던 날 받은 봉투에는 내가 계산한 것보다 적은 액수의 알바비가 들어 있었다.
매일 끝나는 시간이 달랐기에 그들이 계산한 근무 시간이 이거라고 들이밀면 맞설 방도도 없다.
사회에서 약자 중에 약자인 아르바이트생을 보호하는 제도가 없던 시절 그냥 참아야 했다. 그곳에서 더 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눈에 보이도록 존재한다.
여름방학 때는 그냥 놀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이유다.
거기서 배운 비위 맞추는 기술인가 뭔가는 이후 정상적인 직장에서는 도통 쓸 일이 없었다.
다들 일하기 바빠 파이팅 넘치는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좀체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싸움질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 속에서 눈치나 살피는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그보다 기억에 남는 건 뾰족한 삼각귀가 서있는 잘린 바나나 두 조각이다.
덜 받은 알바비는 바나나 자르는 법 배우는 걸로 퉁쳐야겠다.
아니면 맛있는 밥을 먹었던 걸로 위안 삼아야 되나?
이러나저러나 기분은 더럽다.
퉷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