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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산수 Jan 26. 2024

[D+324] 375만원 버리고 퇴사합니다

모든 어른들의 뒷모습이 애잔한 이유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을 나오면서 아빠와 비슷하게 생긴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유의 love wins all을 듣고 있어서 그랬던 걸까. 이번 한 주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짓눌린 마음이 펑하고 터진 기분이었다. 아이가 밤마다 고열에 시달렸지만, 아침이면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고, 회사에서는 오래 곱씹었던 퇴사를 얘기하며 정리를 해나가는 한 주였다. 그리고 머릿 속은 온통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더 참을 수도 있었을텐데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퇴사를 결심한 내가 무책임하게 느껴져서, 그리고 이런 고민에 빠져 아픈 아이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내가 이기적으로 느껴져서 마음이 두 배로 무거웠다. 이유식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등원 전 부랴부랴 만들던 내 모습이 얼마나 정신을 놓고 살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퇴사를 결심한 것은 아이와는 무관했다. 복직 후 나는 주어진 실무가 없었다. 프로그램은 모두 축소된 상황이었고, 각기 인력이 배치돼 있었다. 나는 오히려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팀장님과 협의 후 기획안을 쓰게 되었다. 회사에서 프로그램을 늘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들은 터라 걱정이 되었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기획안으로 설득하면 되는 문제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모두가 방송을 만들기 위해 하루종일 들락날락할 때 꼼짝도 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기획안을 썼다. 그 과정이 너무 괴롭고도 즐거웠다. 중간중간 길을 헤맬 때마다 팀장님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답'은 내가 찾아야 하는 거라며 선을 그으셨다. 팀장님도 여력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작 팀원들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그렇게 적어도 나에게는 매력적인 기획안이 완성되었고 프로그램이 실행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팀장님께 부탁드렸다. 알겠다고 하셨지만 그 약속은 실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프로그램의 편집하는 일을 받게 되었다. 


아무 말씀 없는 팀장님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내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해가 되기도 했고, 일단 시키는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이기에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3개월만 더 버티면 육아휴직 급여 375만원을 돌려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버티기 싫어도 버텨내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은 내 마음을 너무 간과한 결정이었다. 


당장 새 프로그램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젠가 내가 하고 싶은 프로그램을 할 날을 꿈꾸며 4년 넘게 버텨왔는데 더 기다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기획안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조직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온기'가 있는 조직을 원했다. 누군가는 먹고사는 문제 앞에 온기를 찾는 것이 웃기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마음을 나누고 살고 싶다는 마음을 무시한 채 사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삶이 아닐까? 그래서 3개월만 버티면 375만 원을 받을 있는, 그 쉬운 일을 도저히 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 상반기 계획을 적어 제출해야 하는 날 아무것도 적을 수가 없어서 퇴사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본인 것만 챙기는 팀장님이 야속하고 솔직한 말로 참 미웠는데, 오늘 아빠를 닮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미움을 전부 내려놓게 되었다. 그도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본인 밥그릇을 챙기려고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을까. 나는 이곳에서 밥그릇 싸움에 졌지만 새로운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또 떠나야 한다. 그게 무척이나 두려워서 눈물이 난다. 이제 막 0.000000001g의 부모의 무게 앞에도 잔뜩 겁먹은 나는, 삼남매를 먹여 살린 엄마 아빠를 떠올려본다. 평탄치 않았던 길을 걸으며 엄마 아빠는 얼마나 현실이 무서웠을까. 미래에 대한 불안함 앞에 나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삶의 자세를 떠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으로 버텨낸 당신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싶다. 그리고 일하느라 아이와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로 한다. 인생의 무게를 견디며 열심히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엄마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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