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way Mar 31. 2018

봄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온천천을 걸으며 생각한 것들



서른 해 가까이 살던 향집에서 떠나

새로운 동네에서 지낸 지 다섯 달이 넘었다.



매년 봄이면, 고향집 근처 대로변에는 팝콘 같은 벚꽃이 일제히 피어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자박자박 느린 걸음으로 밤벚꽃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자정 무렵 독서실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고등학생 시절 그랬고, 두 도시를 오가는 통학버스의 종점부터 집으로 걸어가던 대학생 시절 그랬다. 밤의 벚꽃은 낮의 그것보다 훨씬 교태스러운,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다. 새로운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수천 개의 꽃송이들이 무채색 아스팔트 위에 떠오르면, 나는 태어나 수천번은 오갔을 길을 새삼 설레어하며 걸었더랬다. 꽃집에서 팔지 않고, 1년 중 오직 봄에만 잠깐 볼 수 있는 꽃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그래서 내게 봄은 항상 기다려지는 계절이었다.


그 벚꽃이, 이 동네에도 피어나고 있다.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걷기로 한다. 긴 하천을 따라 책하는 사람들이 오가고, 양쪽의 벚나무들은 한 이틀 후면 자지러지게 꽃잎을 피워 올릴 기세다. 자박자박, 그것들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다 문득,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새 집에서 회사까지의 거리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짧아진 탓이다.


왕복 세 시간의 출퇴근길 위에서 들었던 수많은 음악들과 팟캐스트들, 전철 안에서 토독토독 핸드폰으로 써내려가던 작은 글들. 사소하지만 내 일상을 차지했던 것들이 자취를 감춘 것을 깨닫고, 나는 잠깐 묘한 기분에 빠진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운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길고 넓은 하천을 따라서 걷기. 생각해보면 내 고향 집앞에도 이렇게 전철 따라 흐르는 하천이 있다.


물비린내가 코끝을 맴돈다. 자박자박 걸으며, 오늘 만나고 온 친구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우리는 중학교 같은 반에서 처음 만났다. 중간고사와 연예인과 교환일기 같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던 우리는, 어느새 각자의 결혼생활과 그것이 커리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토로하는 '으른 여자'들이 되어있었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우리는 말했다. "인생은 끝없이 새로운 문을 열고 나아가는 과정 같아. '이제 다 됐다'하고 나가보면 눈앞에 새로운 미션이 펼쳐져." 긴 세월동안 그녀와 내가 열고 나아갔던 여러 개의 '새로운 문'에 대해 생각한다. 졸업, 입학, 졸업, 입학, 졸업, 구직, 취직, 연애, 결혼, (그녀의) 출산.


우리가 '가끔씩 오래 보는 친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우리의 모습과 처지는 계속해서 변한다.

세월 따라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눈앞에, 맞춘 듯 샛노란 금발을 한 커플이 걷고 있다. 플티는 봤어도 커플염색은 처음이라 자꾸만 시선이 간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듯, 서로를 다정히 팔로 감고 느릿느릿 비척비척 걸어간다. 어지기 싫마음이 발목에 모래주머니처럼 매달려 있는 것 같다. 귀엽고 예쁘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하루의 끝에는 결국 헤어져 각자의 침대에서 잠들어야 한다는 것, 나는 그 기분을 익히 알고 있다. 그것은 괴롭고 쓸쓸하면서 애틋하고 감미로운 일이다. 결혼 전, 세상에 오직 둘뿐인 듯 밀어를 나누다가도 꿈에서 깨듯 막차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향할 때, 우리의 발걸음이 딱 저들과 같이 느렸으리라.


이제 나는 나의 오랜 연인과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고, 단절 없이 연속된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더이상 '보고싶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오늘은 언제 집에 와?"라고 물으면 되니까.


그리움과 갈망이 빠져나간 자리를, 늘 함께하는 시간이 채우는 사랑. 그것이 주는 안도감과, 그것이 앗아간 애틋함을 생각한다. 어젯밤 하늘의 달과 오늘밤의 달이 다른 것처럼,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어떤 미묘한 변화들을 생활에서 감지할 때, 마음에 이는 일렁임을 생각한다. '사랑할수록 욕망하지 않는다'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을 생각한다. 


래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묻는다면, 그건 물론 아니라고 하겠다. 정작 저 어린 연인들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부러워할지 모를 일이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동네에서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우리 신혼부부 같지 않아?" 키득댔던 과거 어느 날의 우리처럼.


그저, 같은 빛깔의 머리칼을 한 연인에게는 없고

리에게는 있는 것,

혹은 그 반대를 생각할 뿐이다.



걷던 중에 발견한 낙서. 아직 '부부' 대신 '커플'이라 스스로를 칭하는 나는, 그 혹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낙서를 휘갈겼을지 짐작하지 못한다.



에 거의 가까워졌다. 비로소 눈에 익은 풍경들이 펼쳐진다. 나의 집, 나의 동네가 되어가고 있는 곳. 지금의 내가 떠나온 고향집을 그리워하듯, 언젠가는 이 곳을 그리워할 날도 생길 것이다.


문득 모든 것들이 밤벚꽃 아래 물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강물이 나아가듯 , 나의 삶도 일렁일렁 모양을 바꾸며 나아가고 있다. 와중에 여전히 밤벚꽃은 아름답고, 나는 더 어리던 나날들처럼 그 아래를 천천히  걸으며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변해가는 것과 여전한 것이 공존하는, 그런 삶 혹은 일상.



집에 가까워지는 동안 기도하듯 생각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조화로운 나날일 수 있기를.

변하지 않는 것들을 힘껏 껴안고,

변해가는 것들을 향해 미소 지을 수 있기를.




- 2018. 3. 28. 10:41 PM





매거진의 이전글 수고했던 어느 청춘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