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의 기쁨과 슬픔

by 김민

마트 가는 길에 어디선가 ‘민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처음엔 환청인가 싶었다. 이 동네에 내 이름을 부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또 한 번 ‘민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난 쪽을 보니 식당 앞 널평상에 두 분이 앉아 계셨다. 자그마한 체구의 아주머니가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다. 누구시더라? 낯은 익은데 도통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고 그냥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하며 다가섰다. ‘민이 맞네~’ 얼굴이 변해서 긴가민가했다 하신다. ‘요 동네 사나?’ ‘아버지는?’ ‘엄마는?’ 이것저것 물으시는 걸 보아하니 옛날 동네 아주머니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데 댕기노?’ 물었지만 혼자서 뭐 좀 한다고 얼버무렸다. 이야기하려면 길다. 작가라 말하는 것은 쑥스럽고 집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려면 복잡하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는다. 길 한가운데에서 옛 동네 어른에게 작가의 일과 프리랜서의 삶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다리를 모으고 꾸벅, 건강하시라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작가의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굳이 구분하자면 내게 시는 돈오(頓悟)고 수필은 점수(漸修)라고. 시는 쓰고 싶다고 언제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필은 쓰기 싫어도 늘 써야만 하는 것이라고. 구분은 필요하나 얽매이지 않으려 한다고. 내게 글은 사라지지 않는 유일한 것이며 나를 살아지게 하는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는 죽어도 남을 유일한 것이며 내가 남길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이다. 어떻게 편집자의 일을 설명할 것인가. 오전 내내 원고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바람이라도 잠깐 쐬자 싶어서 밖으로 나서지만 공원 운동 기구에서조차 오탈자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주술 호응이 되는지를 살피게 되는 강박적인 삶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프리랜서와 백수의 차이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프리랜서의 삶. 출근하지 않으니 좋겠다지만 퇴근의 기쁨도 없다. 일 년 내내 휴가라 착각하지만 오히려 방학이 없는 삶이다. 모든 곳이 일터고 감옥이다. 마음 편하겠다는 이에겐 프리랜서의 어원을 찾아보라 하고 싶다. 창날에 매달린 삶이고 칼날 위를 걷는 인생이다. 뭐, 어차피 내가 선택한 길이니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다. 규칙적인 생활을 선호하건만 일에 대중이 없다. 글쓰기도 그렇지만 편집 작업도 마찬가지다. 만약 소설이라면 헤밍웨이나 하루키를 본받아 하루에 정해진 분량을 꾸준히 작업할 수도 있겠지만 수필의 경우는 여의치 않다.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이 찾아오진 않을까 늘 안테나를 곤두세우고 다닐 뿐이다.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일상의 풍경을 유심히 본다.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기는 하지만 그날 쓸 수 있는 분량을 장담할 수는 없다. 몇 줄씩 꾸역꾸역 쓰는 경우도 있고 한 달에 걸쳐 완성해야 하는 글도 있다. 몇 편의 글을 단숨에 쓰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런 행운을 매일 기대할 수는 없다. 편집 일도 마찬가지인데 매일 정해진 분량을 꾸준히 작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출판사의 일정에 따라, 작가의 사정에 따라, 나를 맞추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언제쯤 파일이 도착하려나. 목을 빼고 기다리지만 독촉할 수는 없다. 며칠 동안 손가락이나 빨고 있다가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작업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다고 대충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작업을 한다.

글쓰기의 힘을 나누고 싶어 시작한 라이팅 클럽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한글 파일로 보내 달라 했는데 다른 형식으로 보낸다거나,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카톡으로 보낸다거나, 한글 파일 대신 이메일에다가 글을 써서 보낸다거나, 문단 정렬을 어떻게 하는지 알려드렸지만 그냥 보낸다거나, 띄어쓰기와 마침표 정도는 체크해 달라는 당부를 무시하거나, 그런 사소한 것들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분도 계실 테니까.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분이니까. 약간의 수고면 충분한데 성가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작 신경 쓰이는 것은 따로 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꽤나 집중을 해야 하는 작업이고 시간도 잡아먹기에 더욱 그렇다. 이왕이면 매달 10일까지는 초고를 보내주시라 공지를 올리지만 강제할 수는 없다. 저마다 감당해야 할 하루가 있을 테니까. 다 큰 어른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초순까지 아무도 이메일을 보내지 않으면 괜히 조급해진다. 중순까지 보내지 않은 분이 있으면 마음이 계속 쓰인다. 친구는 한 번만 봐드려도 충분하다지만 힘들더라도 한 번이라도 더 살펴봐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프리랜서의 삶은 타인에 의해 흔들리기 쉽다. 강박이 있는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나만의 리듬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계획한 대로 하루를 꾸려 나가려 애쓴다. 운동을 하고, 사과를 먹고, 작업을 하고, 산책을 다녀온 후에 다시 작업을 한다. 집필의 경우에도 몇 년에 걸쳐 나만의 작업 리듬을 완성했다. A 원고를 집필하며 B 원고를 퇴고하며 C 원고의 구성을 짜는 식이다. 퇴고라는 건 어차피 끝이 없는 작업이다. 첫 책을 낼 때는 초고가 있었기에 두 달 만에 책이 나왔다. 첫 번째 에세이는 백일 동안 하루에 A4 2매 이상을 써서 완성했다. 두 번째 에세이는 쓰는데 반년이 걸렸다. 책이 쌓일수록 초고를 완성하는 시간은 물론 퇴고에 들이는 시간이 길어진다. 조금이라도 나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완성도를 높이고 싶었다. 그래서 초고를 쓸 때 두세 권 분량을 써서 절반 넘게 버린다. 그래서 일곱 번째 책은 퇴고만 일 년을 했다. 여덟 번째 책은 완성하는데 몇 년이 걸렸다. 초고가 완결되는 시점은 이만하면 할 이야기를 다했다 싶을 때지만 원고가 완성되는 시점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고비만 수십 번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문장은 빗을수록 빛이 나는 걸. 그러니 누가 알아주건 말건 원고를 붙들고 낮과 밤을 보내는 수밖에. 게다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멍하니 앉아 있느니 하루에 몇 장이라도 꾸역꾸역 하는 편이 즐겁다. 나는 할 일이 있어서 좋고 독자는 읽히는 글을 보니 좋다. 누군가는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을 떠올릴 수 있는지 물었지만 그저 모든 게 가라앉을 때까지 글을 다듬은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일 년 내내 퇴고 중이다. 편집 의뢰가 들어오면 거기에 매달려 지낸다. 라이팅 클럽 원고가 도착하면 피드백을 해드린다. 그렇지 않은 때에는 출력한 원고에 빨간 줄을 긋고 문장을 고치며 시간을 보낸다. 타이밍 상 퇴고할 원고가 없다면 공부라도 한다. 편집 매뉴얼을 들여다보고 철학을 공부한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으니 ‘독서’마저 ‘일’이 되어버렸다. 유일한 벗이 ‘일로 만난 사이’로 서먹해져 버린 것이다. 물론 지금은 즐거움을 위한 독서와 배움을 위한 독서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밤이 되어야 나를 위한 책을 읽는다. 그래봤자 소설을 읽다가도 좋은 문장이 떠오르면 메모를 하고,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작가란 퇴근이 없는 직업인걸. 그중에서도 에세이란 장르를 쓰기로 한 것은 내 선택인걸. 쓸 것이 있다는 것이, 아직 마르지 않고 샘솟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십삼 년간 잘 다니던 직장을 왜 때려치웠는가. 삼십 년 이상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가 소비를 통해 큰 기쁨을 얻지 못하는 인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유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도 아니었다. 생의 절반 이상을 그렇게 살았으니 나머지는 내 뜻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훌륭한 선장은 바다가 잔잔할 때 배를 띄우는 법이다. 나를 위한 바람은 오지 않는다. 운명이 이끌어 주길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가 바다로 나갈 순간이었다. 따박따박 들어오던 월급은 사라졌지만 그래서 가슴 뛰는 삶을 산다. 소박하고 검소한 일상,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궁상스러운 삶일지도 모르지만, 좁은 집이라도 감사로 가득 채우고 산다. 바라던 것을 내려놓으니 바라는 대로 살게 되었다. 기백이 넘치는 인간이라서 프리랜서의 삶을 선택한 건 아니다. 대단한 업적을 이루겠다는 각오도 없었다. 그저 글을 쓰며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살 수 없으니 뭐라도 해봐야 했다. 타인을 욕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운명을 탓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상을 버틸 힘이 있다면 일상을 바꿀 힘도 있는 거라 믿었을 뿐이다. 어차피 모두가 끝을 향해 가고 있지 않는가.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적어도 하루 정도는 나를 위해 살 수 있을 테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불안과 고독은 나의 친구가 되었고 가난은 나의 반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싫지 않은걸. 편집 작업이 힘들다고 징징대도 이해해 줄 사람 하나 없고 창작의 고통을 토로해 봐야 입만 아플 뿐이지만, 아무도 없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매일이지만, 이제야 내가 살아갈 집을 찾은 기분인걸.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누군가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오는 순간의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글쓰기에 깃든 치유와 성장의 힘을 나누는 건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니까. 그러다 어쩌다 ‘그러한’ 문장을 한 줄이라도 쓰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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