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정책이 다를 수 있지만, 경남의 2023년 지자체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은 거의 비슷하게 한 달 동안 하루 5만 원의 숙박비, 그리고 체험비가 별도로 지급된다. 전남도 지역의 조건이 조금 더 좋았지만 경남을 굳이 택한 이유는 집에서 가까워서였기 때문일까, 낯선 동네에서 한 달을 사는 데에 익숙한 지역이라는 건 큰 위안이 된다. 그렇지만 나는 경남 태생이라 해도 함양은 거의 가볼 일이 없었던 낯선 동네였다. 짐을 꾸리고 7kg짜리 검은 시골강아지 길동이도 챙겼다.
한 달 살기 지원 프로그램은 하루에 5만 원의 숙박비라고 해도 한 달에 무려 145만 원의 숙박비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시골의 넓은 촌집 정도야 구할 수 있겠지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살고 싶다고 생각한 웬만한 숙소는 하루 25만 원 이상을 호가했고, 숙박업소로 등록이 되지 않은 곳에서는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한 달 145만 원의 월세면 어디든 가겠다는 나의 생각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 숙소를 검색하는데 두통이 생겼다. 특히 강아지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이란 정말 한정적이었다. 그런데 손품을 팔았던 보람이 있었던 것, 함양에서 꿈의 집을 찾았다. 내가 원하는 시골집. 마을 초입이라, 대청마루에 앉으면 뻥 뚫린 건넌 마을 풍경이 보이는 곳. 방 두 칸의 혼자 살기 넉넉한 집. 그리고 강아지도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집. 역시 하루에 25만 원이었지만, 때는 휴가철을 갓 지난 비수기였던 9월. 나는 사장님께 사정을 했다. 한 달 여행을 몽땅 여기서 할 테니 하루 5만 원으로, 무려 1/5으로 깎아주시면 안 되냐고. 무뚝뚝한 경상도 분이셨던 사장님은 무심한 듯 쿨하게, ‘그랍시다.’ 하고 동의를 해주셨다. 함안의 침대도 없고 빛이 잘 들지 않는 원룸 숙소에서 고생을 좀 했던지라 지쳐있는 상태였는데, 민박집을 보는 순간 나는 반해버렸다.
“나 여기서 평생 살 수 있을 것 같아!”
우선 대청마루가 너무 근사한 집이었는데 대청마루에 넋 놓고 앉아 있기에 9월의 날씨는 또 얼마나 좋았겠나. 아들분이 관리를 하시는지, 숙소에는 내가 원하는 모든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편의시설이라고 해야 별 거 없다. 대청마루에 콘센트가 있었고, 흔들의자가 있었고, 거실엔 소파와 간이 탁자가 있었고, 침실의 침대 옆에는 잠 자기 전 활용하기 좋은 스탠드가 있었다. 모텔이나 펜션을 한 번 돌아다녀보면 의외로 많은 곳들에 진짜 생활을 하면 불편한 사소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콘센트가 짧거나 개수가 모자라거나, 취침등이 없다거나,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먹을 수 있는 상이 없다거나. 별 것 아니지만 이 사소한 것들이 우리 생활의 질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올해 1월에 리모델링을 했다는 이 숙소는 겉은 시골이나 이케아 스타일의 인테리어였다. 그 외에 민박집에서 갖출 만한 모든 것이 다 있었다. 민박집은 복불복이고 펜션처럼 사전 설명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 구하면 고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맘에 들었다.
짐을 풀고 동네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강아지가 앞장섰다. 3살 견생, 충북에만 박혀 살다가, 갑자기 언니 따라 함안을 여행하더니, 창원 본가에 수시로 드나들다, 이번에는 함양까지 따라온 것이다.
함양은 참 분위기가 따뜻한 동네다. 나는 집을 이사할 적에도, 사무실 터를 잡을 적에도 공간이 주는 느낌과 기운을 꽤 중요시하는데, 내 느낌은 언제나 들어맞는 편이었다. 스무 살부터 집을 떠나 이 십여 년 동안 밖을 혼자 떠돌며 얻었던 자취집이 그리고 사무실이, 내 예감이 따뜻하다 싶으면 그곳에 오래 머물게 되고, 뭔가 모르게 차갑지만 그래도 대안이 없으니 고른 집에서는 오래 버티질 못하고 옮기게 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 스스로 축적한 통계를 보자니, 나에게 어떤 기운 같은 게 있나 하고 자신의 기분을 맹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함양은 도시 자체가 따뜻하고 기분 좋은 곳이었다. 민박집이 있는 신기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아도, 읍내를 나가보아도, 옆 마을 읍내에 마실을 나가보아도, 지리산 등지를 구경하러 가 보아도, 날이 궂거나 비가 올 때에도 좋았던 곳이 함양이었다. 나는 이 동네에 매료되어 하루하루 줄어드는 여행 일자를 아쉬워하며 일을 하고 글을 쓰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고 대청마루에 앉아서 멍하니 야트막한 앞산을 바라보았다. 민박집 텃밭에 심어진 상추며 부추, 그리고 가지는 날이 다르게 부쩍부쩍 커갔고, 한낮의 햇살이 아직 따가운 9월이었기에, 아침에 빨래를 마당에다 널면, 두 시간이면 빳빳하게 말랐다. 매일 이불을 마당에 널어두었는데 저녁이면 뽀송뽀송한 이불에선 한낮에 담긴 햇살의 내음이 나서 자꾸만 코를 킁킁거리며 그 냄새를 맡게 되었다. 동네에서 자주 가는 반찬가게를 정해두고 밥을 지어먹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조용히 글을 쓰고 일을 하는 일상이 평온했다. 언젠가는 봐야지 하고 아껴두었던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두 편 애니메이션을 보며 키득거렸다. 나에게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이 여행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행이 좋은 것이었나.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는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내가 밖에서도 차질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양해를 해 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감사했다.
길동이에게는 매일매일이 이벤트였다. 온갖 벌레들을 잡아보겠다고 호다다닥 뛰어다니느라 바빴고, 마당에 기어 다니는 사마귀를 손으로 때려 잡기도 했다. 사마귀 몸에서 나온 검은 연가시가 내장과 같이 꿈틀거리며 이글거리는 태양에 굳어지고 있었다. 연가시는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구부러진 얇은 못처럼 까맣게 말라비틀어졌다.
용감한 길동이는 화장실에 나온 지네도 잡아주고 집 안으로 들어온 개구리도 쫓아주었다. 원래 살던 시골에서 더 시골로 내려오게 된 길동이는 하루살이들의 공격에 눈꺼풀 밑을 온통 점령당하기도 하고, 어딜 들어갔다 왔는지 진드기 서너 마리를 온몸에 붙여 오기도 했다. 매일 가장 더운 시간에 씻기고 나면 햇볕이 잘 드는 대청마루에 온몸을 구우며 자연스럽게 털을 말렸다.
매일 아침 대청마루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캄캄한 밤이 되면 역시 또 대청마루에 기어 나와 잠시 멍을 때리며, 그렇게 변해가는 9월의 하루하루의 온도 변화를 실감했다. 밤과 아침은 점점 선선해지고 있었고 반팔 잠옷에서, 긴팔 잠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차가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석이 되기 전에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긴 여행을 마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길동이는 동네의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고성으로 삑삑거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동네에서 길동이와 나만의 비밀 산책로를 찾았다. 동네는 여름을 완전히 탈피하고 가을빛을 띄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아지 네 마리에게 오랜만에 황태두부국을 해다 주었다. 다시 잔잔한 나의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https://youtu.be/u8ivUTGThEg?si=e7hDlIC1xGASNfg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