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청소 알바가 끝나고 몇 주가 지나자 Job Centre에서 또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어학원 칠판에 내 이름뿐 아니라 다른 중국 유학생들 이름도 여럿 적혀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중국 친구들과 Job Centre를 방문했다. Job Centre의 직원은 나와 중국 친구들에게 시립 병원에서 청소를 하는 알바를 주선해 주었다. 이번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어학원의 친구들과 같이 일한다는 생각에 외롭지 않고 의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더구나 일할 수 있는 기한에 제한이 없었다. 즉 원한다면 계속 일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동안 성실하게 열심히 일해서 Job Centre에서 이제 나를 믿고 일을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급여는 시간당 4.2파운드로 나쁘지 않았다. 다만 집에서의 거리가 꽤 멀어서 알바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이 좀 걱정이 되었다.
병원이름은 Bournmouth Hospital로 매우 큰 종합 병원이었다. 나는 병원의 사무실과 병실을 청소하는 일을 했는데 병원의 규모가 워낙 큰 데다 구조가 특이하고 매우 복잡해서 길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병원 안내판에 모르는 단어도 많아서 길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부터 주머니에 수첩과 볼펜을 가지고 다니며 일하면서 접하는 모르는 단어를 모두 적은 후 집에 와서 사전을 찾아보고 암기했다. 그렇게 며칠을 하니 이제 병원 안내판을 거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하며 가끔씩 복도나 탕비실에서 중국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짧게 나누는 담소가 일을 덜 지루하게 해 주었고 마음의 위안도 되었다. 그러다 우리들과 같은 알바를 하는 영국 청년을 보게 되었다. 인상이 좋고 친절해 보여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영국 배우 휴 그랜트를 너무 닮아서 혹시 휴 그랜트 닮았다는 얘기 들어봤냐고 했더니 그런 얘기를 수도 없이 들어봤단다. 심지어 싸인까지 해 준 적도 있다고 했다. 일하면서 가끔 이렇게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꿀맛이었다. 일도 덜 힘들게 했다.
병원 일이 크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사무실이 아닌 병실을 청소할 때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특히 중증환자가 있는 병실을 청소할 때는 누워있는 환자들이 거의 거동을 못하는 노인분들이어서 그 모습을 보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시립 병원이어서 가격이 저렴해서 인지 환자 침대가 매우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런 환자들 수십 명이 2열로 늘어서 있었다. 나이 든 노인이 거동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삶이란 게 무엇일까?'
'그들에게도 젊고 건강한 날이 있었을 텐데......'
'나도 언젠가 저들처럼 저렇게 늙게 되겠지'
하는 애잔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환자들의 침대 옆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과 환자들에게 간식을 전달하는 일을 했는데 일을 지시하는 팀장으로부터 이 병동의 환자들은 나이가 많고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음식을 먹다가 토할 수 있으니 음식과 쓰레기통을 최대한 환자에게 가깝게 두어야 한다고 했다. 더불어 이 병동에서는 하루에 한 두 명씩 저 세상으로 가시는 분들이 계시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런 이야기까지 들으니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병상에서 시간당 4.2파운드 벌겠다고 매일 몇 시간씩 여기서 일하는 나는 시간을 과연 현명하게 쓰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병원의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청소를 하는 어느 날이었다. 시설물을 수리하시는 병원직원으로 보이는 나이 드신 영국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다. 보통 영국 사람들은 내게 필요한 일이 없으면 딱히 말을 걸지 않았는데 그 아저씨는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셨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한국인지 북한인지, 영국에는 언제 왜 왔는지, 앞으로 뭘 할 건지 등 많은 질문을 하셨다. 아저씨의 마지막 질문은 어학연수가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면 영국에 다시 올 계획이 있냐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영국에 다시 올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정말 그럴 계획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의 대답에 대한 아저씨의 말씀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Who knows what will happen in the future?"
"Well, I dno't know."
딱히 질문이 아닌 아저씨의 말씀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잘 모르겠다고 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느냐?"라는 아저씨의 말씀을 그때는 그냥 '참 의미 있는 말이구나'라고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아저씨의 말씀이 맞았다는 것이다. 영국으로 다시 올 계획이 전혀 없었던 나는 우리나라로 돌아간 후 3년 후에 게임회사를 다니면서 영국으로 파견 근무를 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또 대략 3년 후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이건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병원일을 마치면 저녁시간에 가까워왔다. 어학원에서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수업을 마치고 병원에서 4시간가량 일을 하면 정말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하지만 군것질로 푼돈을 쓰지 않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기 위해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영국에서는 자전거를 인도에서 타는 것이 불법이다. 반드시 도로에서 타야 하며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할 경우 자동차의 깜빡이를 켜듯 수신호를 보내야 했다. 병원이 도시 변두리에 위치해 있어서 큰 도로와 roundabout(교차로)을 지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겁도 많은 내가 헬멧도 없이 수신호를 해가며 20분도 넘는 거리를 자전거로 왔다 갔다 했다니 정말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던 것 같다.
Bournmouth Hospital에서 2달 넘게 일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병원의 청소팀장이 나를 부르더니 오늘까지만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중국 유학생들은 계속 일해도 되는데 나만 잘린 것이다. 어리둥절한 나는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물었지만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나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준 Job Centre에서 그렇게 하라고 연락이 왔단다. 나는 일하면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기에 사전 통보 없이 일 자리를 잃게 되자 속상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다음날 Job Centre에서 연락이 와서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찾아갔다. 내가 갑자기 잘린 것에 대해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Job Centre 사장님은 내가 일하던 병원에서 나를 자른 것에 대해서는 사과도 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안내문 한 장을 주었다. 다음 주부터 이 병원으로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병원 이름은 낯설었지만 위치를 보니 전에 일하던 병원보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훨씬 가까웠다. 무엇보다 보수가 4.5파운드라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따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사는 곳에서 더 가까워지고 보수가 더 좋다니 마다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큰 도로를 위험하게 다닐 필요도 없게 되었다.
야호!
수업을 마치고 지도를 들고 새로 일할 병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건물이 병원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기존에 다녔던 시립 병원과는 달리 빨간 벽돌로 지어진 아주 큰 건물은 병원이라기보다는 무슨 기관 같았다. 건물도 깨끗했고 건물 앞에는 나무와 잔디가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이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Reception이 있었는데 병원이 아니라 마치 호텔의 로비 같았다. 안내원에게 내가 왜 왔는지 설명을 하자 잠깐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내게 오셔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본인을 Housekeeping Manager(시설관리 매니저)라고 소개하신 아주머니는 영어실력이 유창하긴 했지만 억양을 들으니 유럽 쪽 외국인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포르투갈 출신이었다.
아주머니는 내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며 건물의 어딘가로 향했다. 본머스 병원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건물 내부는 미로처럼 매우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는 것 같았다. 복도를 따라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해서 마지막에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수영장이었다. '병원에 수영장이 있다고?' 나는 이 병원이 병원비가 매우 비싼 사립병원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내가 첫 번째로 할 일은 수영장 옆에 있는 바닥 타일의 물기를 대걸레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수영장을 이용하는 환자들이 미끄러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밖에도 여러 복도를 닦는 일을 했다. 영국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인상이 깊었던 것은 안전에 매우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바닥을 닦은 후에 마르기 전까지 반드시 'Caution Slippery(미끄러짐 주의)'라고 쓰여 있는 안전 삼각대를 세워 놓아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한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최근 들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안전 삼각대가 세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직 보편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안전 수칙은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다음 업무는 병실 청소였다. 각 병실에 들어가서 휴지통을 비우고 바닥을 청소기로 밀고 병실마다 있는 욕실에 들어가서 변기를 청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자가 퇴원하여 병실이 비워질 때면 침대에 있는 배게 커버와 이불 그리고 매트리스 커버를 모두 제거하고 새 시트로 교환하는 일을 했다.
병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정말 놀랐다. 바닥에는 고급 카펫이 깔려 있고 창문 밖으로 정원이 보이는 전망과 손님들이 사용할 수 있는 소파와 탁자에다가 개인 욕실까지 있다니. 여기가 병실인지 호텔방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종합병원 1인실도 이렇게 좋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전에 일했던 본머스 병원의 중증환자병동 모습이 떠올랐다. 병실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20개도 넘는 병상이 한 공간에 있어서 사적 공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서민들의 병상, 거기서 신음하는 환자들 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토해내는 중증 환자들의 모습. 여기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도 나이가 든 노인이 대부분이었지만 본머스 병원의 환자들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것은 나의 편견 때문인 것일까?
나중에 Housekeeping Manager 아주머니에게 들은 얘기로 이 병원의 병실 하루 사용료는 400파운드에서 500파운드라고 했다(2002년 당시 환율로 계산해서 한화로 약 80만 원에서 100만 원). 이런 병실을 사용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영국도 빈익빈부익부가 심하구나'
'돈이 없으면 나이 들어서 병원 가는데도 비참해지는 것인가!'
일을 하고 오후 4시쯤 되니 매니저 아주머니가 간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일하는 사람에게 간식을 준다고?'
놀란 마음에 반신반의하고 식당으로 갔는데 같이 청소일을 하시는 아주머니 여러 분께서 이미 음식을 드시고 계셨다. 그런데 그것은 간식이 아니었다. 식당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거의 고급 뷔페식당의 식사 수준이었다. 푸딩, 연어 및 각종 야채샐러드, 스테이크, 포테이토 칩을 비롯해 내가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 많은 서양 음식들이 이미 조리되어 진열되어 있었다. 음식을 먹는 사람은 쟁반을 가져와서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가져다가 먹을 수 있었다. 이 모든 음식을 모두 무료로 말이다.
본머스 병원에서 일할 때는 배고픔을 참아가며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지금 상황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점심을 항상 간단한 샌드위치로 때우던 나에게 이런 복리후생까지 제공되다니 이곳의 일은 정말 꿀 아르바이트였다. 더구나 이곳에서의 일도 기한이 정해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면 계속 일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없어서 답답하고 외롭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병원에서 영국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아르바이트를 계속했다. 그리고 여기서 일하는 동안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가기에 충분한 비용의 대부분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