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으로 어학연수를 오기로 결정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영국은 외국인이 합법적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대학교 졸업 후 어학연수를 가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고 영어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저축했지만 이것 만으로는 부족하여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그래도 부족한 자금은 영국에서 벌어서 쓸 생각으로 나는 영국행 어학연수의 절차를 속전속결로 진행시켰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가지 못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도착한 후 일주일 동안은 크리스마스 연휴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학원도 쉬었다. 저렴한 비용 때문에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주택가에 숙소를 마련한 나는 시내 구경을 하지도 못하고 학원도 못 가서 지루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드디어 연휴가 끝나고 어학원이 개강을 하자 나는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 알바 자리를 어떻게 구하는지 물어보았다. 같은 어학원에 다니는, 이미 어학연수를 온 지 1년이 넘은 한 학생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알바를 하려면 Job Centre라는 곳에 가서 등록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알바를 알아보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어학원에서 걸어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Job Centre가 하나 있었다. 한국과 중국 유학생들 몇 명과 함께 그곳에 가서 구직등록을 했다. Job Centre의 사장님은 친절하게 절차를 설명해 주며 알바 자리가 나오면 어학원으로 연락을 준다고 했다.
당시(2001년)에는 영국에서 휴대폰을 마련하기에 비용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휴대폰 없이 지냈다. 전화를 해야 할 경우에는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어학원에서는 어학원으로 전화나 소포가 올 경우 1층에 있는 Reception Desk 옆칠판에 해당 학생의 이름을 적어 놓는다.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Reception에 이름을 말하면 어디에서 전화가 왔다거나 해당 학생 이름으로 온 소포를 전달해 주었다. 요즘과 같이 스마트 폰으로 무엇이든 조회하고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시대에 비하면 아날로그적인 구식 방식이지만 나름의 낭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어학원 수업이 끝날 때마다 심지어는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도 Reception옆의 칠판을 매일 수시로 확인했다. 내 이름이 있을 경우 재빨리 Job Centre에 연락하지 않으면 내 일자리가 다른 사람에게로 갈까 봐 조바심을 냈던 것이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칠판에는 내 이름이 없었다. Job Centre에 구직을 등록한 다른 유학생들에게 연락이 왔냐고 물어도 소식이 없었단다. 영국에서 아르바이트 자리 얻는 것도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다른 Job Centre를 알아봐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어학원에 다니는 한국인 친구가 1층 칠판에 내 이름이 적혀 있으니 확인해 보라고 얘기해 주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1층으로 내려가서 확인해 보았다. Job Centre에서 드디어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나는 바로 Job Centre로 달려갔다.
드디어 나에게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Job Centre의 직원분은 친절하게 나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설명해 주었다. 내가 일할 곳은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기장이었다. 그 경기장 내에 있는 매점에서 돌아오는 주말 이틀 동안 일하는 단기 아르바이트였다. 보수는 시간당 4.3파운드! 우리나라 환율을 감안했을 때 시간당 거의 8300원이나 된다. 물론 세금은 떼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시간당 2000원에서 비싸봤자 3000원 했던 것과 비교하니 정말 보수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샌드위치 하나 가격이 4~6파운드(약 8~11천 원)이고 시내버스 요금이 2~3파운드(4~6천 원)하는 어마어마한 영국 물가를 생각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수이긴 하다.
일하는 기간이 단 2일이라는 것에 실망했지만 그래도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일자리에 대해서 한국 친구들과 이야기해 보니 Job Centre에서도 일하는 사람이 성실한지 확인을 해보기 위해 처음부터 기간이 긴 일자리는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단기간 일 하는 것을 보고 잘하는 것 같으면 그때 긴 기간의 일자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어느 나라든 일 할 때 신뢰가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 되자 나는 서둘러 내가 일할 경기장으로 향했다. 나는 중고 자전거 한 대를 사서 타고 다녔다. 영국은 도로와 인도 모두 이름이 붙여져 안내판에 잘 안내되어 있고 지도에는 모든 도로와 인도가 이름과 함께 잘 표시되어 있어서 지도 한 장만 있으면 못 갈 곳이 없었다. 나는 늦지 않게 가기 위해 미리 목적지를 지도에서 확인해 두고 자전거를 타고 경기장으로 갔다.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경기장의 매점으로 들어가자 일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과자류와 음료를 파는 두 가지 일이 있는데 어느 것을 하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직 영어에 그다지 자신이 없어서 종류가 별로 없는 음료를 팔겠다고 했다.
경기장이 오픈했는지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음료의 종류는 콜라 스프라이트 환타였다. 내 예상대로 사람들이 과자류를 살 때는 말을 많이 했는데 음료를 선택할 때는 단 한 마디면 되니 못 알아들을 일이 없었고 일이 엄청 쉬웠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잠깐이었지만 정신없이 일을 했다. 경기가 시작됐는지 사람들이 관중석으로 모두 들어갔고 매점 안에는 과자류를 파는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영국 소녀 2명과 나만 남아 있었다. 두 소녀들은 서로 대화하고 장난치면서 시간을 보냈고 나는 혼자서 주변을 정리하면서 다음 손님들을 기다렸다. 성격이 활발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런 상황이 매우 뻘쭘하고 불편했다.
매점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져서 나는 잠깐 매점 밖을 나가서 경기장을 구경해 봤다. 경기장이 이렇게나 크다니! 우리나라에서도 경기장엔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나는 축구경기장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드넓은 운동장에 사람들의 환호성까지 울려 퍼지니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경기를 관람하러 오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첫 번째 영국 아르바이트는 특별한 일 없이 잘 끝났다.
경기장 매점 알바가 끝나고 한 참 동안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알바 신청 방법을 알려주었던 한국인 친구가 자기가 하던 알바를 잠깐 쉬려고 하는데 한 달 동안만 내가 받아서 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일의 종류도 묻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알바는 영국의 한 초등학교에서 청소를 하는 일이었다. 보수는 시간당 4파운드. 경기장 매점 알바보다 적은 금액이지만 기간이 길어서 좋았다.
초등학교는 어학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20분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간단히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자전거로 달렸다. 도착해서 청소복으로 갈아입고 급식실로 가서 점심시간이 끝난 후 아이들이 반납하는 식판을 닦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일은 단순한데 그 단순한 일을 한 시간 동안 반복하니 손목과 어깨가 아팠다. 식판 닦는 일이 끝나면 수업이 끝난 교실로 가서 교실 바닥을 빗자루로 쓸었다.
가끔 하교를 늦게 하는 초등학생들과 마주쳤는데 나를 쳐다보는 영국의 초등학생 눈빛이 뭔가 신기한 것을 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아이가 신발주머니나 소지품을 두고 가는 모습이 보여 물건을 놓고 갔다고 얘기해 주니 내가 영어로 얘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한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대꾸도 없이 물건만 가져갔다.
교실 청소를 끝으로 나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20분 넘게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가면 힘들어서 한 참을 누워있었다. 그래도 20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약속한 대로 한 달 동안 일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