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하(立夏)호, 넷째 주
에세이 - 대화의 순기능
정이가 이불 빨래를 해야 한다고 해서 같이 코인 빨래방에 갔다. 둘 다 저녁을 못 먹은 채 7시를 훌쩍 넘겼지만 오늘은 내가 자고 가기로 한 날이라 상관없었다. 이불을 건조시키는 것까지 생각하면 빨래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이불을 넣어두고 사과 유자차를 사서 다시 돌아왔다. 정이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일찌감치 직장인이 되어 나보다도 훨씬 더 어른 같다. 그동안은 서로 바빠도 집이 가까워서 자주 만났었는데 정이가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만난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빨래방에 있는 테이블에서 정이와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시작으로 쉴 새 없이 얘기했다. 매주 한 번씩 만났을 때도 할 이야기가 줄어들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니 정도가 더 했다. 서로의 남자친구가 얼마나 T (MBTI 성격 유형 중 하나) 같은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튜브에서 그 영상 봤냐는 등이 주 소재이다.하나씩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소재가 이야깃거리로 나온다. 보통 ‘이 얘기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거쳐서 나온 적은 드물다. 그냥 각자 떠오르는 탁구공만 한 말을 몇 개씩 던져주고 받다 보면 20분, 30분이금방 지나간다. 사과 유자차를 마시고 마셔도 갈증이 났다. 그러는 새에 이불이 포근하게 말랐다.
이불을 집에 놔두고 조금 늦은 저녁을 먹으러 간다. 우리는 얕은 지식으로 논리적인 척하는 사람들을 얘기하며 걸었다. 비 예보가 있어서 그런지 낮에는 불쾌하게 더웠었는데 밤이 되니까 바람이 제법 시원해졌다. 번쩍번쩍 소란스러운 먹자골목을 걷다가 닭발을 먹으러 들어왔다. 둘 다 매운 것을 잘 못 먹어서 덜 매운맛으로 시켰다. 소주도 있으니 계란찜 같은 탕도 시켰다.기본 반찬으로 노란 알배추와 집 된장이 나왔다. 어떻게 이걸 기본으로 주냐면서 맞장구치는데 바로 계란탕이 나왔다. 정이가 먼저 먹어보고 감탄했다. 나도 따라먹고 긍정의 인상을 찌푸렸다. 찜도 아니고 탕도 아닌 것이 너무 촉촉하고 맛있다, 근데 이거 된장에 참기름 맛이 약간 나서 더 맛있다, 된장만 따로 안 파냐며 서로 첨언했다. 무슨 미슐랭 점수 매기는 사람들 같다면서 웃었다. 너도 나도 먼저랄 것 없이 연신 ‘히익’하는 소리를 내며 호들갑 떨었다. 왔다 갔다 하며 닭발을 봐주시던 사장님이 뿌듯해하실 것 같았다. 우리는 매워하는 와중에도 주먹밥은 역시 국물에 적셔먹어야 한다면서 서둘렀다. 그래도 하던 얘기는 멈출 수가 없었다.맛있는 걸 왜 맛있어하는지 아는 친구와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과한 사람이 아니라 센스 있는 사람이 되는구나. 인중에 맺힌 땀을 닦지도 않고 흘려보내면서 생각했다.
매워서 퉁퉁 부은 입술을 가지고 중랑천에 산책하러 갔다. 거기서 정이와 나는 상추 다발같이 큰 장미도보았다. 장미가 너무 풍성하고 예쁘다는 말로도 문장이 네 다섯 번 오고 간다. 십만 원 주면 이 울타리 넘는다 못 넘는다 같은 여러 가지 수상한 질의응답도 했다.어느 정도 산책했다 싶었을 때는 지금 딱 100보만 걷고 돌아가자면서 일일이 숫자를 세며 걸었다. 야한 농담들도 서슴없이 하며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도사고, 맥주도 샀다. 정이는 편한 옷을 건네주고 몸에 익은 동작으로 상을 가져와 폈다. 우리는 새벽 4시가 넘도록 옛날 노래를 들으며 입만 움직이다 잤다. 할 얘기가 많았는지, 공감받고 싶던 얘기가 많았는지는 모른다. 현실에서 벌어지기 어려운 일들에 같이 고민하다 웃고, 화냈다. 정이는 내가 놀러 온다고 말하면 저번에 쓰고 갔던 칫솔을 미리 꺼내두는 친구다. 나도 자신 없는 내 앞날에 구체적으로 용기를 주는 친구다. 왜밤에 보는 장미가 유독 다르게 예쁜지 정성껏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