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 Kim Mar 31. 2016

어떤 10월의 날

주체할 수 없는 우울로 시작했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잠에 든다.

어떤 10월의 날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그냥 모든 게 가라앉았다는 문장만 떠오른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현재라는 수면인데, 지금 내 정신상태는 그 아래에 처박혀서 올라올 생각을 안 한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몸 상태도, 마음도 모든 게 가라앉았다. 갑판 위로 올라온 줄 알았던 관계의 닻은 여전히 바다 바닥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을 햇살에 뒤통수가 따가울 만큼 따뜻하건만, 나의 상태는 위태롭다. 바람만 조금 불라치면 흔들리는 가느다란 나뭇가지 같다. 작은 입 바람 같은 여파에도 스스로가 거대한 풍선인형처럼 모든 게 휘청거린다. 얼마 전 타로 리스트가 말했던 이유 없는 우울함이 딱 지금이다.


무너질 줄 얼면서도 진행하는 젠가-게임 같다.

 

시간은 흐를수록 나는 내 안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빼서, 결국은 나 자체를, 아니 우리의 관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걸까. 이미 다 쌓아버린 나무토막들을 하나씩 해체하는 중일까. 아슬아슬하게 쌓고는 누군가 무너뜨리기를 기대하는 걸까. 하지만 젠가는 모든 게 무너지면 다음 게임으로 넘어갈 수가 있는데. 우리의 관계도 다음이란 게 있는 걸까. 있다면 언제쯤일까. 이 젠가의 나무토막은 몇 개나 될까.       


위로받고 싶은 당사자에게 위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다. 상처받은 마음을 보여주고, 위로받고 싶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우울해진다. 만족할 수 없는 현재에, 나는 불행해진다. 볼 수 없는 애통함에 나는 슬퍼진다. 어제까지 만해도, 슬프지 않았는데. 현실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아직은 준비가 안됐음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쿨한 척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이 모든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슬프다.




오늘 아침, 그리고 점심때 까지만 해도 모든 게 다 싫었다. 주말 내내 광장에서 찬바람을 많이 맞았던 탓에 컨디션도 안 좋았다. 온몸이 붓고, 눈가도 붓고 따가웠다. 월요일이지만 모든 것을 놓아버린 금요일 저녁 같았다. 회사에 온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으면서 집에 가서 이불속에 웅크리고 쉬고만 싶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우울했고, 나는 좀체 종잡을 수 없는 기분에 허우적댔다.   


하지만 오후가 되면서 미팅에 들어가고, ‘팀장님’이라고 불리며, 여기저기 응답하고 이것저것 신경 쓰며 일하다 보니 나의 우울한 기분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하게 됐다. 각자 전화통화로 시끄럽고, 감독님 목소리는 너무 크고, 한 장소에서 예닐곱 개의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어서 정신이 너무 사나웠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내 주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 주제로 금방 쏠려버리는 분위기였다.


정말이지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언제 빠져나올지 모르겠고, 그런 것 따위 관심도 없던 바닥에서 금세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일하느라 바쁜 게 도움이 되는 하루였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이던 우울감이 일하느라 사라져버렸다. 아마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았더라면, 계속 바닥에 이불 둘러 싸매고 웅크린 채로 며칠, 몇 달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디론가 버스 티켓 끊어서 훌쩍 떠나버렸거나.


폭풍 같던 업무가 몰아치고 6시쯤 현장 답사를 갔다. 현장에 나가니 기분이 또 좋았다. 분수가 나오는 청계광장에서 시작해서, 이 곳을 등불로 가득 채운다는 생각을 하니 설렜다. 내가 직접 작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을 함께하는 크루라는 것 자체에 설레는 거다. 1.2킬로의 거리를 파워워킹으로 걸어가면서, 감독님 설명을 들으면서, 물소리를 들으면서, 철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무성한 잡풀들을 지나가면서, 좁아지는 길들을 조심히 그러나 빠르게 지나가면서, 우울 따윈 다 사라져버렸다. 지금 있는, 걸어가는 현장에 있는 게 참 좋았다. 나를 우울하게 만든 원인도 다 잊혔다.      


아침에 전철을 타면서 점을 쳤다. 만약 내 앞에 앉은 사람이 금방 일어나서 내가 앉아서 가게 되다면 모두 다 잘 되는 거라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앉는 건 포기한 상태였다. 그냥 나 혼자만의 점이지만, 내 앞에 앉아있던 사람이 두 정거장 만에 내려서 기분이 좋았다. 정말 모든 게 잘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록 오전 내내 우울했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마인드 컨트롤했다. 일희일비하지 말자, 우울해지지 말자, 지금 이 기분을 빨리 끊자 등등. 그리고 집에 오는 지하철에는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점을 한 번 더 쳤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일찍 일어나서 내가 앉을 수 있다면, 다 잘 되는 거라고. 내 앞에 앉아있던 남자는 두 정거장 만에 내렸다.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그러니 됐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이전글 직장인 VS 작가 지망생, 선택과 기회비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