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른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가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고 회고하는 대목이 내 삶에도 투영되는 것만 같았다. 인문학적인 삶만 살아서 경제학적인 삶에 무지했다. 어른실격이다. 주식이 한창 열풍일 때, 사무실에 출근을 하면 퇴근할 때까지 주식 얘기가 들려왔다. 주식을 안하면 바보라는 소리까지 돌았던 때에 그 바보가 바로 나였다.
"주사님 전에 말했던 그 종목 들어갔어요?"
"아, 그 종목 단타로 치고 빠져 나왔어요."
주변에서 종목 얘기를 주고 받을 때마다 나는 스포츠만 떠올랐다(그래서 축구 얘기야?). 부동산 열풍으로 집값이 미친듯이 솟을 때에, 누군가는 경매까지 공부를 할 때도, 나는 소설을 읽었다. 그때 읽었던 장편소설이 10권의 태백산맥이었고 10권의 삼국지였다. 그런데 어른과 경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느낀다. 특정 계기랄 것이 없이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경제와 친하지 못한 게 가진 자본이 없어서일까. 어른이라는 이정표에 착실하게 다가서고 있기는 한 걸까.
어른의 경제적 요건에 대해 생각해본다. 서른을 넘으니 특히 남자는 웬만하면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 그랜저 같은 성공의 상징을 벌써부터 가진 친구도 있다. 게다가 일찍이 취업해서 청약 등으로 자기 집, 자가를 보유한 친구도 있다. 시세가 적어도 2배는 뛰었다고 하더라. 시세의 2 배면 내 연봉의 몇 년 치를 합산해야 할까. 친구에겐 기쁜 일인데 쓸쓸한 눈물이 나는 건 뭐람.
그럼 어디 나는 어떤가. 한숨부터 쉬고 나열해 보자(휴우). 차는 공무원을 붙자마자 여행용으로 개설한 마이너스 통장을 갚느라고 사지 못했다. 다행히 최근 다 갚았다. 중고차를 사려고 하지만 매번 시기가 늦춰진다. '올해에는 꼭 살 거야'에서 '내년에는 꼭 살 거야'로 계속 미루고만 있다. 유재석님이 광고하는 케이카 홈페이지에 들어가 매물들을 살펴보는데 아반떼가 이렇게 가격이 안 떨어질 줄은... 삼성전자 주식 같이 견고하다. 아반떼를 모는 사람들이 부자로 보인다. 최근에 나온 CN7 모델을 가진 사람은 형이라고 불러야 한다. 돈 많으면 형이니까.
내 집은 당연히 없다. 거처는 다행히 있다. 오피스텔에서 월세로 살고 있다. 기존에 살던 원룸에서 벗어나, 돈이 좀 들더라도 집 안으로 들어오는 채광과 주변의 편의시설에 욕심이 생겨 큰맘 먹고 대로변의 오피스텔로 옮겼다. 현 오피스텔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원인데 관리비까지 합하면 매달 50만원이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여름에 에어컨 켜기가 무섭다. 무더운 여름날 타들어가는 게 내 월급인 것만 같다. 공무원 월급 200만원에 매달 50만원씩 태워진다. 두툼해서인지 태워지는 아픔이 오래 간다. 예전보다 매달 10만 원 더 나가서 매달 치킨 2,3마리는 덜 시키고 있다. 그래서 종종 치킨 대신 치킨팝 과자에 맥주를 마신다. 언젠간 전세로 또 언젠간 내 집으로 옮길 수 있겠지?
없는 건 수두룩한데 그럼 나는 무얼 가지고 있나. 아, 대학생 때 이용한 학자금이 있구나. 취업 후 상환 대출로 매달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긴 한데 덩치가 커서 한 칼에 깎이진 않더라. 수박을 과도로 깎아나가는 기분이다. 내 손이 베는 건 아니겠지? 대학생 때 등록금에 더해생활비 대출을 몇 번 했다. 집이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학교 근로를 병행했지만 신입생의 용돈으로는 부족했다. 신입생 때는 모두의 마음이 봄이지 않는가. 개강 초에 술자리는 잦고,이곳 저곳 놀러도 다니고 싶고, 동기들에게 잘 보일 옷도 잔뜩 사고 싶었다. 특히 재수를 한차례 겪고 입학한 나는 연애가 너무나 하고팠다. 호박이라고 해도 줄을 잘만 그으면 여자친구가 생길 것만 같았다.
'빅뱅의 지드래곤처럼 깔쌈하게 입으면 될까?'
근로장학금에 생활비를 더해 호박에 줄을 그어봤다. 당시 유행하던 스키니 진에, 드라마 '시크릿가든' 속 길라임 헤드폰까지. 그때 깨달았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여자친구가 바로 생기는 게 아님을. 그래도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인생공부를 했으니 후회는 없다. 국가에 돈을 빌린 거라 드라마에서 보던 사채업자의 압박도 없어서 좋다. 왜 사채는 조금이라도 연체되면 험상궂은 아저씨들이 쫙 달라붙는 티셔츠에 일수가방을 들고 찾아오지 않던가. 후회가 없긴 한데... 과거의 대가를 청산하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건 언제일까. 나도 도비처럼 외치고 싶다.
나는 자유예요!
'일한 지가 몇 년이 되었는 데 돈은 어디다 썼냐'라는 질문에 답을 한다면, '자신'에 돈을 썼다고 말하고 싶다. 누군가는 철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결혼하려면 조금이라도 일찍이 한 푼 두 푼 모아야 되는 것 아니냐고.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정답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인생은 다들 조금씩 기출 변형이지 않던가. 내 DNA를 분석해 본다면 '자기 계발' 나선형으로 꼬여 있을 것이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 중에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를 갈망한다. 나태주 시인의 시 중에 '아끼지 마세요'라는 시가 있다.좋은 것 아끼지 말라고, 옷장 속에 든 예쁜 옷 잔칫날 간다고 아끼다가 철 지나면 헌 옷 된다고, 마음 또한 아끼지 말라고, 마음속에 들어있는 사랑스러운 마음 정말로 좋은 사람 생기면 준다고 그러다가 마음의 물기 마르면 노인이 된다고.내 가치관을 뒷받침해 주는 이런 든든한 시가 있다니.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친구들에게 이 시를 언급하곤 한다. 한 마디로 너희들 아끼기만 하면 똥 될 수도 있어(그렇다고 너무 쓰면 안 되고).
꽂히는 취미가 생기면 해보려고 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선 주제곡 '인생의 회전목마'에 빠져 바이올린을 배워보기도 했고,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을 보고선 작화에 감탄해 기초 드로잉도 배워봤다. 여행도 이곳저곳 많이 다녔다. 오사카, 칭다오, 하노이를 다녀왔고 앞으론 방콕이나 도쿄를 가보고 싶다. 청춘일 때 조금이라도 더 멋지고 싶어서 옷도 많이 샀다. 니트는 보드라운 캐시미어 니트로 코트는 가벼운 핸드메이드 코트로 뽐을 냈다. 최근에는 집 인테리어에 흠뻑 빠졌는데, MBTI F(감성) 답게 집을 감성으로 꾸미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요즘이다. 심심할 때면 '오늘의 집'이라는 앱에 접속해 내 평수에 맞는 인테리어를 둘러보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과정들이 자신과 친해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어떤 색감의 옷이 어울리고 어떤 공간에서 잘 쉴 수 있는지 알아가는 시간이다. 물론 내 소득 범위를 벗어난 과소비는 옳지 못하다. 저축과 소비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제일 이상적이겠지만 지나간 소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매몰비용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지금은 소비보다 저축에 신경을 쓰며 매일 가계부도 작성하고 있다. 불필요한 소비를 구분하고 절제할 수도 있게 됐다. 친경제적으로 변해가는 요즘이다. 그리고이제는 자기소개를 할 때 표현할 말들이 마구 떠오른다. 자소서에 더 이상 소설을 써나가지 않아도 된다.이게 다 나 자신과 친해진 덕택이라 생각한다.
어른이 되는 건 여전히 어렵다. 우리 사회에서 어른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낭만 속에 갇혀서는 어른이 되기 어렵다. 가져야 할 것도 많고 때로는 잃어야 할 것도 있다. 가진 게 없고 잃는 게 두려운 나는 '어른 실격'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보이는 것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잔뜩 채워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북이처럼 성실히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차도 있고 집도 있겠지(아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