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게 없어서 겁을 먹냐

by 박홍시

겁은 나를 보호하면서도, 때로는 내 가능성까지 가로막는 정체불명의 감정이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본능이 만든 방어기제다. 겁이 없었다면 인간은 진작 멸종했을 것이다.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채 무모하게 살아갔을 테니까.


나는 겁이 많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공포증이나 공포영화를 못 보는 그런 부류는 아니다. 고소공포증조차 없고, 최근 개봉한 공포영화는 거의 다 챙겨봤을 정도다. 나에게는 그저 흥미로운 SF 영화처럼 느껴질 뿐이다.


문제는 '시작'에 대한 두려움이다. 보수적인 성향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일 자체가 무섭다. 새로운 취미, 방법, 인생의 방향 전환… 내 인생에 모험이 될 수 있는 크고 작은 시도들이 늘 부담스러웠다. 이 나약한 마음가짐은 언제부턴가 내 안에 뿌리내려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것들을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했다.


어릴 적, 유학을 가면 공부가 잘 맞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공부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교육은 나랑 안 맞아’, ‘선생님들은 날 이해 못 해’라는 오만한 마음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결과는 뻔했다.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고, 먹는 즐거움에 빠져 건강은 망가졌다. 결국 1년 남짓 버티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완벽하게 공부해서 돌아오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유학 갔다 왔다는 겉모습만 얻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뒤엔 음악을 시작했다. 처음엔 그래도 인정했다. 내가 학업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사실을 대놓고 말하는 게 두려웠다. 뭔가 열심히 하느라 공부를 못하는 거라는 핑계가 필요했다. 예술은 그런 도피처로 적당했다. 그렇게 시작한 음악은,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실력의 벽을 느끼고, 연습량을 감당하기가 겁이 났다. 결국 음악도 포기하고는, ‘나는 재능이 없어서 안 돼’라는 핑계를 댔다.


늘 이런 식이었다. 겁이 났고, 도망쳤고, 또 다른 도피처로 숨었다. 반복의 연속. 결국 나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었다. 고통의 역치는 점점 낮아졌고, 나는 더 한심한 사람이 되어갔다.


20대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신은 무너졌다.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부모님 등에 업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존감은 끝없는 구멍 속으로 꺼졌고, 자존심은 그것을 가리기 위해 더 높아졌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이 전환점이 되었다. 별생각 없이 보던 영상 속에서, 도망치기만 하며 자신을 과대평가하던 누군가를 비판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위대한 사람인 척하던 나. 그 사람을 향한 냉철한 비판이 내 마음을 난도질했다.


“평생 이룬 것도 없이 자아가 비대해진 찐따”이라는 한 문장이 나를 무너뜨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재생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팠지만, 동시에 머리가 맑아졌다. 그 누구도 해주지 않던 날카로운 조언이었다. 나는 찌질했고, 도망쳤고, 겁쟁이였다.


그때부터 변화를 시작했다. 겁을 마주하고 삶을 조금씩 바꾸려 했다. 삶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는다. 움직여야만 바뀐다. 나는 아직 젊다. 위험한 곳에 사는 것도 아니다. 내 겁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실패한 나, 실패 후의 자괴감, 나를 물고 늘어지는 반추, 그리 타인의 시선이 무서웠던 것이다.


멋있어 보이고 싶었다. 특별해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노력은 하기 싫었다. 이 모순을 품은 채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취미를 만들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했다. 작고 소소한 일들이었지만, 나에게는 큰 변화였다.


겁을 마주하며 싸우기 시작하자, 삶이 반응했다.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듯 선명해졌다. 허황된 꿈을 버리고, 발 앞의 현실을 딛기 시작하자 변화가 찾아왔다.


집에 누워 무언가를 시작하길 겁내며 허송세월하던 삶은 이제 끝이다. 거창한 목표는 필요 없다. 남들에게 잘나 보일 이유도 없다. 그저 오늘 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고, 남는 시간엔 내가 즐거운 걸 하면 된다. 무언가를 버리고, 무언가를 얻었다. 삶은 그렇게 사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도 일을 마치고 글을 쓴다. 더는 겁먹지 않기 위해, 더는 숨지 않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그리고 상처받은 과거의 나를 위해.


겁 많은 나에게도, 삶은 다시 기회를 준다. 나는 오늘도 그 기회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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