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을 잘 모르겠어요.
과거 드라마를 보면 봉투를 내미는 장면들이 종종 있었다. "당신과 우리 아이는 출신부터가 다르니 헤어져주게나." 보통은 이런 뻔한 대사를 남기는 장면들이었다. 드라마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던 것들이 생각보다 사회에서도 많이 발생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연애 참 어렵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부모님도 좋아하면 참 좋겠지만, 그러지 않은 일들이 세상엔 꽤 자주 일어난다.
지인 L은 종교가 있다. L의 부모님은 L이 같은 단체의 M과 잘되기를 빌고 H와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길 빌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L은 M이 꽤 맘에 들지 않았다. 뭐랄까 그냥 끌리지 않는 것? L은 H와 썸을 타다가 비밀리에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L의 부모님은 나중에 M이 별로인 사람인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H를 허락해준 것도 아니었다. "H를 만나면 불효하는 거야."라는 부모님의 말에 L은 썩 마음이 편치 않다.
L도 분명 여러 연애를 했고 근 30년을 살아오면서 사람 보는 눈을 길렀고 스스로의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H가 끌렸고, 대화가 잘 되었지만 부모님의 시선 때문에 공개적으로 사귈 수는 없었다. 이미 비밀리에 몇 개월의 관계가 지속되었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생각은 확고하고 L은 부모님의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L의 고민은 사실 그런 것이었다. 분명 이 사람이 좋지만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죄를 짓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헤어지자니 아쉽다. 이 사람과 아직 무엇하나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만약 H가 평생의 짝이라면 어쩌겠는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도 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하나 뚜렷한 것이 없다. 헤어지느냐 계속 만나느냐. 이 연애 괜찮은 건가에 대한 자기 질문이 쉼 없이 반복되는 듯하다.
나도 예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엄마가 아팠고, 나는 막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매일 데이트를 하고 집에 가는 길마다 죄를 진 기분에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는 아픈데, 나는 이렇게 또 행복해도 되나. 괴로운 마음은 2배, 3배를 넘어서 나를 짓눌렀다. 차마 고민을 상담하기도 힘들었고, 어렸다. 몇 달을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모질게 헤어졌다. 사실, 헤어지고 나서 맘이 무척 아프고 자주 울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이 후련했던 것은 또 사실이었다.
아마, L은 지금 현실을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일도 많고, 불효라는 단순하지만 복잡한 감정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면 되는 것이고, 부모님에게 딱히 관련된 내용만 말하지 않는다면 거짓말하는 것도 아니기에 막상 눈 앞에 주어진 문제를 외면하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조금 더 만나다 보면 내 마음에 확신이 생길 거야라고 말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선택이 아니면 해결되는 것이 없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관계가 시작되면 끝을 내기도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신중하게 되는 면이 있다. 예전에는 배우자의 법칙이었다가 지금은 비서의 법칙으로 불리는 것이 있다. 100명의 지원자가 있다면 상수 e(2.718)로 나누면 약 37이 나온다. 그러면 37명째까지 면접을 본 최고의 사람보다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뽑으라는 법칙이다. 그러면 확률적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런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과거 대학 수학 시간에 교수님에게 들었다. 연애도 비슷한 법칙이 이뤄진다고 한다. 많이 만나봐야 결혼도 잘한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L도 그냥 바로 부딪혀봤으면 좋겠다. 부모님과도 대판 싸워보고, H에게도 말을 하는 것이다. 내 상황이 이러니까 우리가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하나씩 단계를 헤쳐나가자고 말이다.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보이게 될 것이고 스스로가 내려야 할 선택의 답이 확실하게 보일 것이다. 이 연애 계속해도 괜찮을지에 대한 여부는 현실을 직시하고 파도처럼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다. 이게 관계가 거품인지 진짜인지는 뭐든 바닥에 깔린 패를 까 봐야 아는 법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