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 때 우산 없이 걷는 사람을 본다면 어떨까. 아마 사람들은 무슨 사연이 있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다. 특히 우산이 있어도 쓰지 않는다면 더 그렇지 않을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실연을 당한 여주인공은 왜 늘 청승맞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폭우 속을 걸어서 안쓰러움을 강조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가끔 비가 올 때 비를 맞으며 걷고 싶은데 그때마다 비련의 여주인공이 떠올라 망설여지게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우산으로 가릴 수 있는 비의 양이 아니라 폭우가 쏟아진다거나, 태풍이 불고 있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우산을 들고 있어도 어차피 똑같이 비를 맞게 되거나 바람 때문에 쓰고 있는 우산이 오히려 짐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누군가와 비가 오는 거리를 함께 걸으며 우산이 쓸모없다고 느껴지는 경우라면 우산 없이 함께 걷는 길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겠지만, 나 혼자 길을 걷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우산을 써도 비를 흠뻑 맞게 될 텐데 그때는 우산 없이 걸어도 괜찮을까.
난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사람들이 내가 비를 맞으며 우산도 없이 걷는 걸 본다면 그 모습을 보며 나를 과도하게 걱정하거나, 나를 보면 뭔가 어떤 사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내가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는 바람은 어쩌면 사람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이 세차게 분다는 걸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어차피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이상 그런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그럴 땐 누군가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게 어디든 비가 오지 않는 곳으로 피해야 한다. 그게 나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편한 일이다.
개인주의적인 가정에서 자란 나는 사춘기 때 큰 혼란을 겪었다. 평소에 나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던 부모님이 나를 과도하게 신경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 내 언니에게 사춘기라 부를 만한 시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 사춘기가 성인이 된 후에 시작됐기 때문이다. 만약 청소년기였다면 웃고 넘길 수 있는 작은 일들을 나는 더 크게 만들고 다녔고 늘 부모님의 관심 밖이었던 나는 부모님의 과도한 집착에 시달리며 지쳐갔다.
그때 나는 내게 쏟아지는 관심이 싫어 부모님의 생각과 정반대 방향으로 계속 엇나가기 시작했다. 때로는 관심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무관심보다 무관심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관심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한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그 상황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저 괜찮은 척하는 것뿐이라고. 어느 순간 나는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도 괜찮은 척할 수 있을 만큼 담담하게 말하는 재주를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내 사춘기는 아직 낫지 못하고 진행 중이다. 아플 땐 충분히 아파야 낫는다. 그때 사춘기를 제대로 앓았다면 나는 지금쯤 성인(聖人)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태풍이 불 때 우산을 쓰고 걷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오히려 바람 때문에 한껏 무거워진 우산을 들고 끙끙대느라 우산 없이 걸을 때보다 더 많은 비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쉽게 우산을 놓지 못한다. 우리는 때론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보다 못한 사람이 되곤 한다. 누군가의 걱정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그 비바람을 견뎌내고 싶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다. 무거운 우산을 끙끙대며 안고 있을 필요도, 태풍이 그치길 기다리고 있을 필요도 없다. 비바람이 심할 때는 손에 꼭 쥔 우산을 과감히 내려놓아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