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을 생각하는 시간
꼭 필요한데 맘대로 되지 않는 여러 가지 중에 한 가지,
30년을 살아온 타향이자 터전인 미국 땅에서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것이 영어다.
지금도 공식적인 서류를 작성할 때 기입하는 Speaking 혹은 Writing language를 보더라도 쓰는 언어에 따라 미국이 고향인지 타향인지 구분되는 것 같다.
가끔 못 알아듣거나 말하고 싶은 표현이 나오지 않을 때면,
"니가 한국에서 한국말 못 하는 거나 내가 미국에서 영어 못하는 거나 Same"이라고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현실 앞에서 설득력이 없는 소리다.
모국어와 고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한 단어가 있다.
'노스텔지아'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무슨 뜻인지,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모르지만 울림이 있었다.
이름 같기도 하고 합성어 같기도 했다.
North + Tell + Fantasia, 북쪽에서 들려오는 (말하는) 환상곡??
알고 보니 '향수'라는 그리스말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보다 '처음 보는데 언젠가 와 본 적이 있는 듯한 향수를 일으키는 곳이나 이미지'라는 뜻이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뜻을 묻는 나에게 대답해준 사람도 그렇게 말했다.
이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단어를 거의 매일 한 번씩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있다.
오후의 햇빛이 긴 그림자를 그리며 기울어 가면 세상은 노랗게 변한다.
이 고요한 빛의 색깔을 뭐라 표현할 수 없어서 나는 그냥 황금빛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슬프면서 평화롭고,
어둠이 오기에 두려우면서도 쉼이 있기에 기다려지고,
가 본 적 없어 낯설지만 언젠가 있었던 고향을 그리는 '노스텔지아'의 빛에 잠긴다.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에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 걸 보고 있자니
황금빛을 표현해 보고자 애쓰며 그린 그림이 떠오른다.
모국어가 외국어가 되어야 하는 이민 초기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칼리지에서 ESL 클래스를 마치고 정식 English 클래스로 들어갔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낙제하기 전에 그만두고 대신 듣기는 많이 하고 말하기는 조금 할 수 있는 미술 클래스를 들었다.
한 두 해가 지난 어느 날, 교수님이 과제로 자주 꾸는 꿈을 그리라고 하셨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리기 시작했다.
꿈속의 나는 고등학생이다.
그 당시 살았던 동네 시장에서 언덕 위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야 하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다 나지막한 집들이 줄지어 서있는 두 갈래길이 나오고 전에도 그랬는데 어느 쪽이 집으로 가는 길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쪽은 집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한쪽은 언덕 위 절벽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는 걸 안다.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 갈림길에서 나는 갑자기 슬퍼진다.
'노스텔지아'...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지금은 없는 곳으로 나있는 길을 걷고 있다면 슬픔뿐이다.
그러나 쉴 수 있는 집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가고 있다면 그리움은 설렘이 된다.
세상이 노랗게 변하는 시간에 고요하게 앉아 고향을 그려본다.
방랑길에서 -크놀프를 생각하며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내 밤이 됩니다
밤이 오면 파란 들 위에
서늘한 달이 살며시 웃는 것을 바라보며
서로 손을 잡고 쉬십시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내 때가 됩니다
때가 되면 쉬십시다 우리들의 작은 십자가
밝은 길가에 둘이 서로 서 있을 것입니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오고 갈 것입니다
- 헤르만 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