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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양선 Dec 01. 2023

우리의 상부상조

나는 조카에게 말랑말랑함을 얻고, 그녀는 나로부터 든든함을 얻기를

     나는 기본적으로 언어에 무척 관심이 많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하는 나만의 질문 리스트가 있는데, 그중 단연코 내 마음속 최애의 자리를 차지하는 질문도 '좋아하는 단어가 무엇이냐'는 단어와 관련된 질문이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수시로 사전을 꺼내서 찾아보고, 그중 인상 깊은 것들은 메모장에 뜻을 따로 적어두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 이미 알았던 단어도 다시 돌아보게 해주는 조카의 직관적 화법은 매우 신선하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겠다.


[숫자 2의 재 발견]

   영상 통화를 하다가 나온 대화였던 것 같다. 이제 막 어린이집에서 숫자를 배울 무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상 통화를 하다 갑자기 조카가 물어왔다.

   "이모는 몇 층에 살아?"

   "이모는 2층 살아"

   "오리 모양 2층에 살아?"

   "(웃으며) 응 이모는 오리 모양 2층에 살아"


[비교]

   같이 대화를 하다가 비교라는 단어가 나왔고, 언니가 문득 아직 그 뜻을 아이가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카에게 물었다

"너 비교가 뭔지 알아?"  

"키 재보는 거 같은데"


[낙엽]

   조카와 조그만 천이 옆으로 흐르는 공원을 산책하는데 발 밑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만났다. 반갑게 낙엽이라며 막 줍길래, 내가 물었다.

"너 낙엽이 뭔지 알아?"

"물 들은 거"


[요술]

   차를 타고 가다가 창 밖으로 보이는 가로수들을 보며 조카가 뒷좌석 카시트에 앉아서 입을 열었다.

“나무에 나뭇잎이 이제 없네”

“응 맞아 겨울이 되면 이제 나무가 옷을 다 벗어”

“그리고 봄이 되면 다시 옷을 입어”

“요술이야?”

“(웃으면서) 응 요술이야”


[으스스하게 추울걸]

고고다이노라는 변신 공룡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나눈 대화이다.

“이모도 북극 가보고 싶다 “

“나도. 근데 엄청 으스스하게 추울걸?”


[마술사]

조카가 마술을 보여달라고 해서 형부가 돈이 사라지는 마술을 보여주다가 돈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니까 조카가 말했다

“마술관이 정말 우습다” (여기서 마술사라고 말 안 한 것도 그 와중에 킬포다)


   모두 다 조카가 만 세 살~ 네 살 때 나눈 대화다. 특히 '비교'와 '낙엽'에 대한 조카의 정의는 나라면 누가 물어왔을 때 조카만큼 명쾌하게 떠올리지 못할 것 같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이런 직관적 표현이 나의 마음에 정화 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모두 다 들었을 때 만연에 미소를 띠우며 일시적으로 행복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내가 가진 아이에 대한 애정도 있을 것이다. 조카와 나는 혈육으로 맺어진 사이니까. 근데 피가 섞이지 않은 네 살 아이가 비슷한 말을 나에게 해줬어도 내 마음에 똑같은 정화 작용이 일어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틀에 갇혀 있지 않은 말랑한 사고에서 오는 무언 가이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핵심을 꿰뚫고 있어서 반가운 것 같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충격을 감당해 내는 능력이 향상된다. 대신 그만큼 말랑했던 사고가 단단해지는 과정을 겪는다. 나는 이제 이전보다 단단한 심지를 가진 나 자신이 좋다. (물론 여전히 나는 잘 넘어지고 좌절한다.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을수록 느끼는 것은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런 순간들 속에서 날 도와주는 은인들이 있기에 가끔은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고, 그 안에서 배운 교

훈들로 심지를 더 단단히 한다.) 하지만 몽글몽글하고 말랑한 말들 또한 좋다. 나는 이제는 갖기 어려운 것들을 조카로부터 얻고싶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마음의 단단함일까. 그건 사실 내가 주고 싶어도 각자가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을 지나며 스스로 얻어내야 하난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뭐가 있을까.


    내가 서있는 이 땅 위에 무조건인 내 편의 존재에서 오는 든든함.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든든함인 것 같다. 20대 중후반에 수다를 떨러 중국어 학원에 다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잘 맞는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선생님과 정말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대화의 대목은 다음과 같다. 선생님은 결혼 3년 차 딩크족이셨는데, 여동생이 낳은 조카가 있었다. 그때 나도 막 첫 번째 조카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라 '아이가 X개월일 때는 무슨 선물을 사가는 게 좋아요?' 등의 질문을 하고 조언을 구하곤 했었다. 선생님은 조카가 초등학교쯤 되고 본인도 좀 더 사회생활 다운 무언가를 시작하니까 ’ 생각보다 자기에게 이렇게 조건 없이 지지해 주는 존재가 흔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아는 것 같다고 나에게 말해준 적이 있다. 조카의 태도에서 그런 게 묻어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걸 들으며, 나도 조카에게 그런 지지를 내내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조카가 살면서 맞이하게 될 여러 충격들을 완화시킬 수 있는 스프링 역할을 하는 것은 정서적 안정감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 안정감이 조금은 진부하지만 절대적 내 편이 있다는 든든함에서 온다고 본다. 살다 보면 나도 그녀를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큰 틀 안에서는 늘 지지를 보내는 이모가 되기를. 그렇게 우리의 상부상조가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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