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

by 얀느

초등학교 4학년 때 반마다 각종 전집이 몇 질이나 들어왔다. 학교 선배인 성공한 사업가가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 책을 보니 눈이 번쩍 뜨여 반 친구들과 경쟁하듯 읽었다. 학급 문고를 다 읽은 후에는 학교 앞 마을문고에서 책을 대출해 읽었다. 책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못 읽어본 책들 천지인 그곳은 곧 나의 최애 장소가 되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읽었다. 돌부리에 넘어지고, 전봇대에 부딪혔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전래동화, 세계 고전, 위인전, 이솝우화 등 주인공과 함께 생각하고 숨 쉬고 모험 나서는 일이 즐거웠고 예상치 못한 사건에 마음 아팠다. 그리고 등장인물의 번뜩이는 지혜는 언제나 통쾌했다. 따로 오락거리가 필요 없었다. 책만 있다면 만사 오케이였으니까.

중학생이 되어도 책 사랑은 여전했다. 하교 후 책상 앞에 앉아 읽기를 시작하면 어느새 날이 깜깜해져 있을 정도로 집중해서 읽었다. 그날도 하교 후 책에 빠져 읽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빠의 벼락같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또 책을 읽는구나! 책만 그렇게 봐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 다시는 읽지 말아라! 그 시간에 공부해라!!" 여태껏 책 읽는 것에 별말이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나 으름장을 놓다니.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진 것이 화근이었을까? 언니들 성적이 고만고만해도 별로 신경 안 쓰는 아빠였는데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걸까.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아빠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책 읽기는 중2에서 멈추어버렸다. 책 읽으려 하면 갑자기 아빠가 나타나 호통칠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바람대로 책 읽던 시간을 공부로 채웠을까? 그랬으면 좋으련만 자유의지를 꺾여버린 소심한 아이가 책 읽기 의지만 꺾였을까?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께 이 일을 따져 묻지 못했다. 분노, 무능감, 자신을 향한 자책 등 어지러운 감정들이 가라앉고 무뎌질 때까지 수년이 걸렸는데 나를 힘들게 만든 장본인이 기억조차 못 한다면 다시 상처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마도 딸이 무언가에 깊이 빠지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던 것은 아니었을지. TV 금지, 책 금지, 그다음은? 연예인? 남자 친구? '네가 꽃길만 걸을 수 있게 장애 될 만한 것은 미리 다 잘라내 주겠어. 그런 과정에서 생기는 스크래치는 감안해 줘야 해. 나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중이니까….'이런 마음이었을까? ‘됐거든요. 제 인생 제가 알아서 할게요. 치워주는 거 하지 말아 주세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통쾌하게 외칠 수 있는 아이였다면 내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결혼하고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책 읽기의 즐거움을 다시 알게 되었다. 엄마가 좋아하니 아이도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랐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쿵짝이 잘 맞았다. 아이들 육아하는 내내 재미있는 책을 찾아 도서관으로 도서 중고 사이트로 밤과 낮을 넘나들며 보냈다. 나아가 아예 책에 둘러싸여 일하는 직업을 갖고 싶어 사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결국 책 읽기를 금지당했던 중학생은 학교에서 아이들과 책 읽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학교 사서가 되었다. 인생 돌고 돌아 딱 그때 중학생으로 돌아간 듯 원 없이 읽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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