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중학교 입학한 둘째 딸이 아침부터 옷장이며 세탁물통, 빨래 건조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분주하다. 친구와 약속이 있는데 입고 나갈 옷이 마땅치 않다며 볼이 잔뜩 부어있다. 아이 옷 서랍장을 열어보니 입을만한 옷들이 꽤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 걸까? 적당한 윗옷, 아래옷을 꺼내어 코디해 주었더니 "정말 별로야.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런다. "엄마가 뭘 몰라?" 했더니 "뭐가 예쁜지 아무것도 몰라!" 이러는 거다. 내 눈에는 아이가 뭘 입어도 예쁜데 아이 눈에는 아니라니 내가 정말 뭘 모르기는 한가 보다.
요즘 들어 아이와 생겨버린 거리감에 마음이 조금 쓸쓸하다. 아이의 학교생활, 새로 사귄 친구들이 궁금한데 재밌다는 말 한마디뿐 더 이상 얘기해주지 않는다. 아침 일만 해도 그렇다. 내가 골라준 옷이 맘에 안 들 수도 있는 것인데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니. 아이에게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은 내 욕심이었을까. 밤이 되어 엄마가 느끼는 쓸쓸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만히 듣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도 사춘기 있었잖아. 나도 지금 그래." 사춘기가 어떤 것인지 엄마도 알 테니까 이해 좀 해주라는 말일까.
나는 질풍노도의 중학교 3년을 보냈다. 그 치열한 시기의 결과물인 내 못생긴 발과 발가락을 내려다본다. 움츠린 발가락, 마디마다 벤 굳은살, 짓눌린 새끼발가락과 발톱, 충분히 더 클 수 있었는데 크지 못한 발. 170센티가 넘는 키에 얼마 전까지 235밀리 신발을 신었으니 큰 키에 비해 내 발은 작은 편이다. 후천적인 이유로 발이 크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얘기를 하면 자연스레 중국의 전족을 떠올릴 것이다. 어린 소녀나 여성의 발을 인위적으로 묶어 성장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국의 풍습이었던 전족, 내가 이것을 했던 것이냐고?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 사이 키가 11센티나 자랐다. 밥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고 끼니마다 두 공기씩 해치워야 살만했으니,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키만 자랐겠는가. 팔, 다리, 발도 커졌다. 옷은 언니들에게 물려받으면 되었지만, 신발은 물려받지 못했다. 발 사이즈가 언니들과 비슷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발 주인의 발 모양에 꼭 맞게 길든 낡은 운동화를 물려받고 싶지도 않았다. 설날에 산 운동화가 여름이 지나니 작아져 발가락들이 비좁다고 아우성이었다.
몇 달 전에 산 신발을 또 사달라고 부모님께 얘기하기 뭣해 큰언니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맏이 역할을 톡톡히 해내던 언니였다. "얼마 전에 새 운동화를 산 것 같은데 그새 작아졌다고? 뭐가 그렇게 빨리 크니? 쓸데없이 키만 커가지고.. 여자애가 발이 그렇게 커서 어디에 쓰겠어?" 잔뜩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성장의 문제는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억울했다. 새 신발을 샀다. 6학년때였고 신발사이즈는 230밀리였다. 그리고 중학교 내내 이 신발 사이즈는 바뀌지 않았다.
발의 성장이 멈추었던 것일까? 아니다. 키는 7cm가 자랐고 자연스레 발도 커졌다. 하지만 신발 사이즈를 바꾸지 않았다. 옷이 작아지면 팔과 다리가 짧뚱해져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신발은 그렇지 않다. 걸을 때마다 운동화 앞쪽 끝에 몰려있는 발가락이 불편하고 아팠는데도 꾹 참았다. 매주 있던 체육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번씩 있던 체력장이나 운동회, 반 벌칙으로 받았던 오래달리기 시간은 그야말로 고난이었다. 고통은 내색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자처했던 무엇이었을까?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다. 타인으로부터 들어오는 뾰족한 말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내가 조심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제멋대로 자라는 발의 성장을 어쩌라는 말인가. 다시는 이런 것으로 당황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발가락이 아픈 고통보다 마음에 입는 상처가 더 두려웠기에 열네 살의 나는 이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중학교 3년을 지내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친구에 대한 배신감으로 밤잠을 설친다든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모님의 논리에 반박하며 반항한다든지, 나를 무시하는 언니와 크게 한판 붙는다든지, 상담받다가 감정에 복받쳐 선생님 앞에서 엉엉 우는 일들 말이다. 말 없고 유순했던 아이가 이렇게 되까지 수없이 많은 내면의 부침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꾹꾹 눌러 담기만 했던 감정들은 결국 나에게 큰 상처를 내며 터진다는 것을, 마음 한 켠에 쌓아두는 것보다는 밖으로 내보내야 해소되고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깨달았다.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공격에 대비한 방어보다는 문제를 피하지 않는 태도라는 것도 함께 말이다. 중3 가을쯤 한 치수 큰 235밀리 신발을 샀다.
엄마를 보면 어김없이 달려와 안아주던 아이, 엄마의 힘든 일상을 알아주던 선물 같은 아이가 지금 사춘기란다.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의 시선은 이제 오롯이 밖을 향해 있다. 그 바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아이가 엄마가 보기에는 아슬아슬 위태로워 보이지만 직접 경험하고, 부딪치면서 깨닫게 되는 지혜가 있기에 선뜻 손 내밀어 도와주지 않으려 한다. 친구, 성적, SNS, 학교 등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아이가 균형 잡아갈 수 있기를 아이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줘야겠다.
나이 마흔 넘으니, 마음과 함께 몸도 후덕해져 신발사이즈도 240밀리가 편하게 되었다. 편한 신발 안에서 꼬물거리는 발가락들이 자유롭다. 열네 살, 스물네 살, 서른두 살, 마흔 살... 인생의 여러 시점에서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궁금해지는 시기가 있다. 나에게는 스스로 전족을 행하던 열네 살이 그랬다. 그 시절의 어린 나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너를 몰아세우지 않아도 돼. 자신을 믿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의 인생에도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궁금해지는 시기가 있는지, 그것이 언제였는지,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를 말이다. 당신 옆에 가만히 앉아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