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코코'라는 핸드폰이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박지윤이 광고하던 그 작은 빨간색 기기가 친구의 손에 들려있을 때 그건 마치 마법의 도구처럼 보였다. 언젠가 나도 저런 핸드폰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간절함으로 매일매일을 잠들었다. 그러다 드디어 중학생 때 그 순간이 나에게도 왔다. 퇴근하시면서 한 손에 마법의 물건을 달랑달랑 들고 온 아버지의 모습은 그 어느 개선장군 못지않게 멋져 보였다. 그리고 꺼내주신 그 자그마한 물건이 준 행복감은 지금도 선명하다. 물론 그때의 핸드폰은 지금의 스마트폰과 비교하면 기능이 정말 형편없었다. 전화와 문자, 그리고 몇 개의 단순한 게임이 전부였던 그 자그마한 물건이 어린 중학생에게는 온갖 세상이 담긴 듯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세상에서는 그 기기 위에 사람이 있었다.
며칠 전,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반 아이들이 연루된 SNS발 학교 폭력이 발생했으니, 사안을 얼른 조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올해도 어김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26명인데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핸드폰이 있다. 그것도 나 때와는 다르게 생각만 하면 대부분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기능을 가진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아마 아이들이 첫 핸드폰을 가졌을 때도 내가 처음 느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더 적극적으로 쓰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고학년을 전담하며 느낀 불안감은 이 물건을 악마의 파우치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파우치 안에는 지독한 SNS가 자리하고 있다. 학생들은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카카오톡 등 다양한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극적인 콘텐츠를 소비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채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간다. 편집된 하이라이트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극심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만나서는 의사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이 핸드폰만 잡으면 '온라인 여포'가 되는 모습도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기술이 부족했던 우리 때에는 기기 위에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의 교실에서는 기술 뒤에 사람이 끌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에 읽었던 책에서 '잔혹한 낙관주의'라는 말이 있었다. 사건의 본질은 외면한 채, 자신이 가진 특수하고 우월한 상황에 빗대어, 너도 조금만 노력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는 말이다. 그동안 내가 우리 반 학생들에게 잔혹한 낙관주의를 기대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문제는 더 복잡할 것이다. 거대한 테크 기업과 소셜 자본주의가 날실과 씨실처럼 엮어, 아이들을 그 속에 빠뜨리고, 스스로는 도저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낙관을 기대하기 어렵다.
예온이가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를 때가 올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다 가졌다며, 아빠는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좋겠냐는 궁극의 공격을 하면, 아빠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온이가 그런 말들을 하기 전에 아빠로서 신체 활동과 대면의 경험이 주는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고, 이 마음을 우리 딸에게도 잘 전할 수 있는 회피기를 마련해야겠다. 여전히 아빠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나의 가치관은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놀아야 하고, 다쳐봐야 다치지 않는 법을 안다.'는 단숨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