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오늘은 온종일 힘이 없었다. 병원 가는 일만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늦잠을 잤을, 그런 날이었다. 꿈에서 이를 닦았다. 꿈에서 밥을 먹었고, 나갈 준비를 했다. 눈을 떴을 때, 내가 실제로 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억지로 일어나서 이를 닦고, 밥을 먹었고, 나갈 준비를 했다.
시간에 맞춰서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반대편에서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그 사람은 흰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엄청나게 꾸민 느낌이 났다. 나는 그 모든 걸 다만 주변시로 보았다. 직접적으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이나 보라고 그 사람이 그렇게 꾸미고 나온 건 아니었을 테다. 나도 다른 사람의 꾸밈을 알아봐 주고 싶지 않았다. 이건 또 무슨 심술일까. 한편으로는 패딩코트를 껴입은 나를 보고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내 뒤에 서 있었으니 내 뒷모습을 한 번은 봤겠지. 그리고 아마 아무 생각도 안 했을 테다. 버스는 제시간에 왔다. 빈자리가 많았다. 투피스를 입은 여자는 중간쯤에 앉았다. 누추한 버스 안에서 흰 투피스가 혼자 반짝거리고 있었다.
역에 도착했다. 아직 기차 시간이 30분이나 남아있었다. 근처 편집숍에 들러서 옷 구경을 했다. 저번과 달리 직원이 한 명 더 늘어있었고, 무척 친절했다. 그녀는 유능했다. 내가 바지 하나를 입어보게끔 했다. 그러나 그 바지는 내 마음에 쏙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옷값을 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는 힘없이 인사하고 나와서 기차에 올랐다.
날은 꽤 쌀쌀했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은 조금은 가벼워져 있었다. 심지어는 바람막이 하나만 입은 사람도 있었다. 장담하는데 그 정도의 날씨는 아니었다. 흐려서 싸늘했고 바람이 찼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의 옷차림과 비교하니 내가 좀 두껍게 입고 왔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힘없이 약국으로 향했다. 좀 답답한 느낌이 나서 마스크를 벗었다. 내가 가는 약국, 사람이 없어서 좋았는데, 점점 번창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와서 평소보다 조금 더 기다렸다. 약국의 직원들은 친절하고 싹싹했다. 나는 특히 약사의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같은 반듯한 느낌인데 똑 부러지게 일을 잘했다. 약값을 계산하면서 흰 가운에 달린 그녀의 명찰을 봤다. 이름을 읽었다. 그냥 힘없이 읽었다. 원래 그 사람은 내 눈을 보는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웃었다.
발이 점점 아파져 왔다. 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곳곳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행인을 붙잡았다. 설문조사, 투표, 설명 좀 들어보세요. 나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내 갈 길을 갔다. 약국에서 시간이 좀 걸려서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빠듯했다.
플랫폼에 도착하고 3분 후에 기차가 들어왔다. 내 옆자리엔 어떤 뚱뚱한 여자가 앉아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앞좌석 그물망에 구겨 넣었다. 그녀의 왼손 손가락에 시즈닝이 잔뜩 묻어있는 걸 봤다. 나는 집에서 들고 온 책을 꺼내 읽었다. 피곤했다.
오늘은 온종일 힘이 없었다. 정신을 그러모으지 못했고 그저 병원만 갔다 왔다. 마주친 사람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했다. 오늘 밖에서 본 반짝거리고 유능하고 친절하고 뚱뚱한 여자들의 모습이 꿈결 같다. 그 끝에서 강렬한 눈빛 하나가 떠오른다. 지하철에서 내리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나는 그걸 무시했다. 물 흐르듯 내려서 환승하러 갔다. 어떠한 감정적 동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힘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