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유학생 아내'가 전부다. 나 역시 유학을 선택하고 이곳에 와 있다면 유학생 부부가 되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유학생의 아내일 뿐이다. 그 외의 말로는 현지에서 나를 설명해 주는 단어가 없다. 별 것 아닌것 같은 이 표현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딱히 정해진 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저런 글들을 읽다가 발견했다. 유학생 아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집단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
유학의 대상이 되는 국가와 분야가 다를 뿐, 그들이 영위하는 삶은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배우자의 유학이라는 선택이 모든 일의 발화점이었으며,
당사자의 선택의 폭은 해당 국가로 가느냐 마느냐, 가서 낳느냐 마느냐의 정도일 뿐.
가느냐 마느냐의 선택에는 항상 당사자의 퇴사와 휴직이 이어지고, 그 이후의 삶에는 애석하게도 당사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매일의 현실이 놓여있었다.
누군가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 이제는 떠나간 곳이 두 번째 고향처럼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
당장 짐을 싸서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 간 이들도 있었다. 모두 공감한다.
배우자가 유학을 선택하려면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이는
한국에서 수년의 직장생활을 거쳐 재정적 기반을 다지고 이후 석박사의 길을 시작하는 터라
대부분의 유학생 아내들의 연령대는 대동소이했다. 그래서인지 그 시기에 꼭 해외가 아니어도 고민해야 하는 여러 가지 숙제들... 이를테면 2세의 탄생과 육아, 개인의 직업적 성취, 배우자와의 인생 등 갖은양념처럼
모든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몰려 있었다.
한참을 읽었고 읽다가 답답해져서 창을 닫았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11년 차를 겪고 이 곳으로 온 이후, 여기에 있는 나는 진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마주한 현실이다. 조금의 가감도 없이... 할 수 있는 게 없고 하려고 해도 잘하는 게 없고 때로는 뭘 해야 하는지 막막한 게 대부분의 시간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라는 공감과 안도감은 잠시.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에 대한 대답은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이제 막 체력이 최고조에 올라 전성기를 누릴 즈음의 운동선수가 종목을 아예 바꿔버린 꼴이니
초급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말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0의 지점에 놓인 것이다.
이게 생각보다 엄청 막막하고 답답하다. 0의 지점에 놓인다는 것.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현실이다. 한국에서 직장인 또는 가족, 친구 등 다양한 사회적 지위를 보유하고 있던 사람이 타국으로 오게됨과 동시에 소속된 곳이 없어지고, 주변인들이 모두 사라지는 경험.
그래서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나름의 깊이를 더해갈 수도 있겠지만, 그건 결국 역사가 미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난 이후의 서사일 뿐.
이제 막 그 시간을 통과해야 하는 초입에 들어선 나로선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간신히라는 단어를 붙여야 할 만큼 위태롭다. 배우자의 학업이 유학이 나쁘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아니다.
어떠한 분야를 심도 있게 연구하여 자기만의 결과물을 만들고 전파할 수 있다는 것 참으로 뜻깊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부부라면 그 과정에서 소진되거나 놓여져야만 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
그 사실에는 어떠한 해답도 해결책도 공감대도 없다. 그저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밖에는.
내가 놓인 배경만을 보고 주변인들은 쉽게 이야기한다. 미국 좋지 않냐고? 회사 나가지 않으니 좋지 않냐고?
좋지. 마음만 매일 고쳐먹으면 참 좋은 호시절이지. 근데 그게 나한테 정말 좋은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좋아 보이는 것과 내게 좋은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눈물을 쏟으며 마지막 회를 보았던 드라마에서 그러더라.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그렇게 만든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였다고. 주변에 있는 소소한 것들부터 사랑하라고. 그것이 네 인생을 보듬고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드라마 대사처럼 드라마 장면처럼 일상이 아름답고 멋질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만은
그 한마디에 기대어 오늘 하루도 온전하게 살아내 본다. 외줄 타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는 내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