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들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후로도 계속 (태권도와 피아노를 몇 달간 배운 것을 제외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공부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사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시기와 목적에 맞게 행해져야 빛을 발할 수 있다. 주위 아이들이 다닌다고 엉거주춤 몰려다니는 것은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반짝거리는 빛이 내 아이가 내는 광채인지 학원선생님이 능숙한 손으로 닦아준 광채인지 부모는 알아볼 수 있다. 잘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피드백에 모든 걸 의지한 채 회피하고 싶지 않다.
아이가 원할 때 학원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친구들 중에 학원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이들이 있기는 만무하고 쉴 틈도 없이 스케줄이 빡빡한 친구들을 보며 아이는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하교 후에 아이들은 도서관으로 향하는 날들이 많았다. 평일의 오후, 그 시간의 도서관은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탐하며 이야기 속으로 쉽게 빠져들었다. 취향에 편중되지 않고 다양한 책들을 골라서 꺼내어 읽을 수 있음이 도서관의 묘미 아니던가! 서가사이를 넘나들며 유유자적하는 아이들은 편안해 보였다. 시간에 구애 없이, 필독도서를 읽어야 한다는 지침 없이, 읽고 독서감상문을 써야 한다는 숙제 없이, 그저 아무 의자에서나 털썩 앉거나 기대어서 읽으면 되었다.
물론 매일이 한결같을 수는 없어서, 어떤 날은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했다.
모두 학원에 가고 텅 빈 놀이터에 우리 아이만 땀 흘리며 뛰어놀던 어느 날, 무거운 가방을 메고 제 몫의 하루를 힘겹게 마친 아이가 학원을 다녀오는 걸 목도했을 때, 아주 가끔 현타가 왔달까! 작고 날카로운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면 언제나 한계를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심심한 시간들 속에 결국 창작의 열망이 생기는 법이니까.
매일의 습관과 성실함이 중요한 공부. 과연 통제를 벗어나 긴장감이 없어도 괜찮을까, 하는 마음은 기우였다. 아이의 학습에 필요한 것은 통제와 긴장감이 섞인 집중력보다 공부정서를 키워주는 게 먼저가 되어야 한다. 어려운 공부 앞에서 갖게 되는 불안감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대뇌피질을 방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복잡한 사고를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가 짜증을 내면서 푸는 문제는 실수가 잦았고 확장된 사고를 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나열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쾌하게 학습을 주도하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풀었던 문제는 학습의 태도와 풀이 과정에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좋은 학원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면 그 학원의 장점을 메모했다. 그리고 내가 집에서 아이를 가르칠 때 참고하여 어설프게나마 해볼 수 있었다. 그런 과정들을 아이도 나도 좋아하며 즐겨왔다. 이를테면 학원놀이처럼 공부하기. 늘 즐거운 공부? 어림없다. 언제나 가능성의 말을 해주고 북돋아주어야 했지만 날을 세우며 대립했던 어느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그냥 학원 보내줘."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는 공부를 하다가 한 번씩 문제에게 짜증을 냈다. 문제는 대답도 못하는데.
"이 문제 이상해 짜증 나."
6학년이 끝나가는 12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올 것이 왔다.
분명히 아이가 가고 싶을 때 보내겠다 약속했었고 시기도 적절하다 싶었다. 드디어 영어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아이의 반응이 기가 막히다.
"너무 재미있어서 숙제 많이 내달라고 했어."
아이의 첫 영어학원. 이제 두 달을 채워간다. 여전히 재미있어하고 열정적으로 공부를 하는 아이에게 엄지 척을 해주며 운을 띄웠다.
"진작에 갈 걸 그랬나? 너무 학원이 체질인 거 아냐?"
"엄마? 그게 아니고 실컷 놀아서 그래. 나는 지금 시작하니까 학원이 재미있거든. 근데 내 친구는 지겹데.
그리고 나는 겨우 한 개 다니잖아 에너지가 많다고!"
내가 나 자신을 믿기에 내 아이도 더욱 신뢰할 수 있다. 방향은 언제나 바뀔 수 있으니 조바심 내지 않는다. 다만, 지금처럼 활기찼으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