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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쓰는 이다솜 Nov 12. 2017

따뜻한 침묵이 좋아졌다

Essay


그가 전부터 종종 말했지만, 이해하지 못하던 말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흘려들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나는 네가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더라.”


애정 표현 정도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기분이 좋아서 “나도”라고 말하거나, 그의 양 볼을 잡아당겨 치즈처럼 쭉 늘렸다. 그런데, 이 말의 진짜 뜻을 알게 된 건 최근이었다.


2017년 가을, 38일 동안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막연하게 꿈꿨던 여행을 떠날 날이 다가오자 설레면서도 걱정이 됐다. 그와 9년 가까이 만났지만, 한 달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은 없었다. 일주일 정도의 여행을 몇 차례 다녀온 게 전부였다. 나 또는 그가 여행 중에 상대를 지겨워하게 되거나 싫증을 내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 무엇보다 이전 여행보다 금전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든 여행이 예정돼 있었다. 굳은 각오가 필요했다. 그에게 “서로가 조금 지겨워지면, 하루 정도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기우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놀라울 만큼 질리지 않았다. 지겨워하기는커녕 오랫동안 함께 하면 더 재밌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고 작은 실수로 곤경에 빠지고, 다퉜을 때조차 떨어져 있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긴 시간 함께 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됐다.


치안 때문에 밤늦도록 돌아다닐 수 없었던 여행지에서의 하루는 한국에서보다 조금 일찍 끝났다. 저녁 무렵, 숙소에 들어와 한 침대, 또는 양 옆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침대에 누워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는 인터넷 기사를 읽거나 유튜브로 영상을 봤다. 여행 리뷰를 찾아봤다. 나 역시 사진을 정리하거나 여행 책과 지도를 보면서 루트를 짰다.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럴 때면 둘 사이에는 몇 시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종일 붙어 다니면서 수다를 떨던 우리가 유일하게 조용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침묵이 너무나 편안하고 포근했다. 내가 말했다. 


“이렇게 한 공간에 있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것도 되게 좋구나. 꼭 뭘 같이 하지 않아도….”

“내가 항상 말했었잖아. 나는 너랑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네가 옆에만 있어도 좋다고.”

“그게 그 말이었어?”

“네가 나 만나서 밀린 잠을 잘 때가 많잖아. 그때 네가 옆에서 자고 있고, 나는 해야 할 일 하는데도 그냥 좋더라고.”


잘 몰랐다. 항상 내가 원하는 정도보다 가끔 만날 수밖에 없었고, 금방 헤어져야 했다. 그래서 늘 뭔가를 같이 하려고 했다. 얘기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보는 등. 서로 다른 일을 한 적도 있지만, 급하게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아니면, 내가 잠이 들거나…. 함께 있으면서 각자의 일에 몰두할 때의 즐거움을 느낄 기회가 거의 없었다.




둘 사이의 침묵이 참 따뜻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새삼 그와 결혼해도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어릴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침묵이 무서웠다. 소홀해진 마음이나 단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침묵은 불가피하다는 것, 심지어 그 고요가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부부가 된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연애할 때처럼 늘 서로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매 순간 무언가를 같이 할 수는 없을 거다. 방해받고 싶지 않은 서로만의 시간도 필요하겠지. 그런데,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고, 침묵조차 편안한 사람이 배우자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편안한 침묵의 의미를 곱씹어봤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공간을 인정한다는 것, 그 공간이 있어도 불안하지 않을 만큼 서로를 믿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사랑이 아주 뜨겁다고 느끼던 때와는 또 다른 행복을 느꼈다.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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