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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기댈 곳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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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Sep 15. 2023

기다림: 경기의 하나


• 기다리다:
어떤 사람이나 때가 오기를 바라다.
• 경기(競技):
일정한 규칙 아래 기량과 기술을 겨룸. 또는 그런 일.


유난히 익산 대회에서 지난 대회들보다 긴장을 많이 했다. 예선 시작 전부터 호제의 표정이 좋질 않아 마음이 어떤지, 화가 나는 일이 있는지 물었다.


“긴장되어서 그래. 너무 떨려!”


굳은 얼굴로 돌아다니다가 몸을 풀기 시작하니 이제야 표정이 다양해졌다. 예선전이 시작했다. 첫 경기는 3:4로 패. 그다음 세 번의 승리를 이어갔다. 예선전을 호기롭게 모두 통과한 사브르 형들이 에페 경기장에 와서 호제를 응원해 줬다.


“호제 어디 있어요? 호제 이겼어요? 저기 있다, 호제! 호제야 할 수 있어! 1점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어! 오! 찔렀다! 이겼다! 파이팅 호제! 호제!!!“ 를 외치다 두 번째 경기의 승리를 확인하고 사브르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호제는 3승 1패로 예선전을 통과했다.




출전 인원이 많지 않아 예선 통과 후 바로 8강이다. 8강 경기에서 지면, 짐 싸서 집에 가면 된다. 예선 통과 후 한시름이 놓였는지 같이 출전한 형, 같이 따라온 동생과 색종이도 접고, 형 옆에서 영상도 봤다. 사브레 형아들을 응원하러 옆 경기장도 들렸다. 관람석 계단을 못 찾아 1층을 맴돌다 형들을 못 만나고 다시 돌아왔다.


기다린 지 1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8강 경기가 시작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슬슬 호제의 질문이 시작됐다.


“엄마, 언제 시작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야? 아흥! 몇 분 남았어?“

”좀 더 남았어,“


같이 예선전을 통과한 형도 기다림이 지루한지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멘트를 호제는 톡 받아, 형에게 ”형, 그럼 예선전에서 떨어졌어야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호제야…)


이제 준비하고 경기장으로 올라간다. 대기석에 앉아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이 다시 이어졌다. 아이들의 긴장도는 더욱 높아졌다. 호제의 감정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엄마 언제 해? 몇 분 남았어? 아- 진짜!“

”호제야 차분히 기다려보자. 저기 선수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면서. 호제야, 박상영 선수가 쉬면서 말했던 할 수 있다!를 떠올려. 호제야, 할 수 있어!”


“말하지 마! 할 수 있다 말하지 마!! 나 지금 떨리고 무섭단 말이야!!!!!!!!”


“아빠가 오늘 즐기고 오랬잖아. 그냥 즐겨봐. 그냥 해봐 봐.”

“흥 언제 하냐고! 몇 분 남았어? 말하지 마.”


극도의 짜증과 예민함을 보였다. 무섭다는 본인의 감정도 알고, 표현해 줘서 한편으로는 아이다워 보여 귀여웠다.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위치에 따라 무서움이 드러나지 않게 잘 관리하는 것이 어른의 덕목인 것으로 배우기도 할 테니.


Y에게 호제가 극도의 긴장 속에서 무섭다고 외친 상황을 문자로 알렸다. Y는 “결과를 의식하니까 그렇지”라는 답을 보냈다.






선수장으로 드디어 들어간다. 또 기다린다. 몸을 비꼬기 시작한다. 바닥에 철퍼덕 앉아 턱을 괴고 앉아 경기를 바라봤다. 벤치에 상체를 눕히고, 다리 힘으로 버티기도 했다. 클럽 형들과 함께.



멀리서 “엄마 언제 시작해?”를 묻는 호제에게 다가갔다. 꼰대스러운 말을 하나 던지고 나왔다. 진심이었다. 펜싱 경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니까. 경기라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겨루는 일들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될 거다.


“호제야, 힘들지. 기다리는 것도 경기의 하나야. 칼 들고 피스트 위에 있는 것만이 경기가 아니야. 기다릴 때 어떻게 기다리는지도 중요해. 오늘 한 번 기다리는 거 연습해 보자. 다른 선수들 경기도 한 번 보고.“


호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관중석 자리로 돌아왔다. 몇 분 지나 호제는 8강 경기에 들어갔다. 경기에서 이겼다.


4강 경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메달권에 들어가서 그런지, 다시 밝아졌다. 원장님과 형들에게도 가서 같은 클럽 형들 경기를 응원하며 기다렸다. 8강을 기다릴 때보다 훨씬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기다림.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덕목이다. 살아가면서 일에서도 사람에서도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나한테도, 타인한테도 기다림을 기꺼이 줘야 할 때가 있다.


그 기다림을 떳떳하게 맞이하기 위해, 두 팔 벌려 맞이하는 호제만의 방법을 찾아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4강을 앞두고 원장님 옆으로 쪼르르 가서 뭐라고 재잘거리며, 형들과 시합을 뛰는 형에게 밝은 표정으로 응원을 했던 것처럼.


호제만의 기다림 방법을 터득하려면 수많은 수행착오를 겪을 거다. 그 과정을 헤쳐나가는 동안 나 역시 옆에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할 테다. 시간을 뭉개며 기다리는 것보다 시간을 나의 편으로 만드는 기다림의 아름다움. 해보자, 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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