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시' 시리즈 - 베를린 이야기
주소는 쇼세스트라세(Chausseestrasse) 126. 베를린의 중심인 미테(Mitte) 지역에 있지만 공원이 넘치는 이 도시에서는 김, 이, 박 씨 같은 공원인지라 무심코 스쳐 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평범한 공원에 입장하는 내 마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설레고 심장이 뛰고 살짝 긴장되어 땀까지 난다. 사실 이곳은 공동묘지다. 공동묘지도 그냥 공동묘지가 아닌, 헤겔, 하이네 뮐러, 하인리히 만 등 독일이 배출한 철학자, 작가 및 문화 인사들의 묘비가 모여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 내가 보고자 하는 그분이 있다.
철문을 열고 묘지에 들어서자 참새인지 직박구리인지 모를 째엑~짹 소리가 난다. 봄바람에 챠르르르 흔들리는 나무 소리도 나고 저 멀리서 묘지 관리사가 잔디를 깎는지 우우우웅~ 기계 소리도 난다. 거기에 묘비 사이로 샤각샤각 흙길을 밟는 내 발소리가 더해진다. 그 소리들 끝에 아주 조용히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장식도 없이 묵직하고 진중한 큰 돌의 모습으로. 4월 말의 순진한 햇빛이 빚어낸 나무의 그림자가 그 돌 위에서 춤춘다. 역시나 묵직하고 진중하고 아주 조용히. 나는 지금 독일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와 그의 아내 헬레네(Helene)의 묘비 앞에 있다. 현실 같지 않다. 신이시여! 진정 내가 실제로 그의 묘비 앞에 있단 말입니까! 근 1년을 베를린에서 살았건만 그때는 한 번도 오지 않더니, 네덜란드에서 사는 지금, 아이의 학교 봄 방학을 맞아 베를린으로 여행하러 온 신분이 되어서야 보게 되는 이 아이러니라니.
큰 돌에 새겨진 활자를 한 자 한 자 읽는다. B.e.r.t.o.l.t B.r.e.c.h.t. 설렘에 뛰던 심장은 이내 울컥하는 감정으로 옮겨간다. 쿨한 척 눈을 깜빡이며 눈가의 뜨거움에게 주책바가지라고 놀린다. 이건 유럽의 한 시골 도시에서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맥락 없이 어렸을 때 무척이나 좋아해서 흥얼거렸던 송창식의 ‘참새의 하루’ 노래가 흘러나오자 깜짝 놀라 토끼 눈으로 ‘아침이~ 밝는구나아~’를 따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감정과도 같은 감정이다. 즉, 덕질의 감정이다. 난 어렸을 때 퀸과 송창식을 덕질했고, 20대 때 아일랜드 록밴드 U2와 브레히트의 희곡을 덕질했다.
그의 묘비 앞에 라이터와 팬과 조약돌과 들꽃이 수줍게 있다. 나도 뭔가 놓고 싶어서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니 마침 큐브형 초콜릿이 있다. 초콜릿을 놓고 그 앞에 앉아 중얼중얼 대화를 시도한다. 그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개고생 한 거. 대학원 때 당신 작품으로 논문을 썼다가 교수들에게 엄청 깨졌어요. 심사 때 교수 8명이 반으로 갈려 제 작품이 좋다 안 좋다 싸우는 걸 봐야 했죠. 한국으로 돌아와 맡은 첫 작품 ‘억척 어멈’은 아직도 제 디자이너 인생에 오류로 남아 있어요. 당신의 여성관은 아주 싫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희곡을 좋아했어요. 그 양가감정과 싸워야 했죠. 잘 만들기 어렵다는 당신 작품에 대해 도전 정신도 불타올랐어요. 그런데 지금은 당신의 작품은커녕 공연도 거의 안 보네요. 젊은 시절의 치기일까요? 그 시절 전 정말 진지했는데... 당신 무덤이 있는 이 도시에서 살면 참 좋을 거예요. 힘들 때마다 당신에게 와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처음으로 베를린에 ‘입성’한 때는 2010년 겨울이다. 애인(현 남편)과 함께 자원봉사를 하며 세계 여행을 하는 프로젝트를 끝낸 후 머물 곳을 찾을 때, 그는 베를린으로 가자고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살던 곳이라 친구도 많고 마음도 편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양반, 왜 하필 겨울을 택했을까. 북유럽의 겨울이, 특히 베를린의 겨울이 악명 높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굳이 거길?’ 하며 다른 옵션을 들이밀었을 텐데. 우중충하고 오후 4시면 해가 져서 광합성이 어렵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우울감으로 고생한다는 그 악명을. 하지만 어찌어찌 잘 버텼고, 이구동성으로 ‘겨울이 혹독해서 그렇지, 유럽에서 베를린만 한 도시 찾기 힘들다’는 친구들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했다. 물론 ‘뭐야! 1년 중 반이 겨울이잖아! 어쩌라고!’ 소리치며 항의했지만. 우리는 베를린을 베이스로 NGO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큰 봉사 단체의 비리들이 속속 터졌을 때라 기존의 단체를 거치지 않고 여행을 통해 바로 지역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통로를 찾으려 했다. 그리고 그때 난 당연히 성공에 대해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체를 만들려면 6명 이상의 파트너를 찾아야 하고 얼마 이상의 설립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우린 왜 그리 순진했던가.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추진했던 매 순간, 난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 확신했다. 유학 시절, 반드시 브로드웨이 무대 디자이너가 될 거라 확신했고, 한국에서 활동할 때는 무대 디자인상을 받을 거라 확신했고, 아이를 데리고 유럽을 돌아다닐 때는 자연 속에 집을 짓고 커뮤니티를 만들 거라 확신했다. 그 확신은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의 확신이란 때때로 얼마나 허무한가.
묘지 바로 옆, 브레히트가 죽기 전까지 헬레네와 살았던 아파트는 현재 뮤지움이 되어 사람들을 맞이한다. 난 투어를 신청했고, 지금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그 아파트를 보고 있다. 참여자는 나 외에 독일 남자 한 명뿐이다. 온갖 책이 꽂혀 있는 그의 서재를 거쳐 큰 거실로 간다. 가이드와 독일 남자는 독일어로 떠들고, 어차피 알아듣지 못하는 난 거실 중앙에 서서 눈을 감고 마치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그 시절로 날아간다. 거실 한쪽 책상에서 그가 타이프 라이터로 희곡을 쓰고 옆에서 극단 사람들이 극장 모델을 앞에 두고 열렬히 토론한다. 모델 앞에서 무대를 설명하는 사람이 나라면 좋겠다. 거실 옆, 5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한 그 침실은 의외로 작고 심플해서 처연하기까지 하다. 헬레네가 꾸몄다는 응접실은 훔치고 싶을 정도로 세련됐다. 투어는 끝났지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렵다. 차마 떠나지 못하고 다시 그의 묘비로 간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란 닳고 닳은 문장을 실현한다. 묘비 앞에서 다시 그에게 말을 건다. 고마워요, 좋은 작품 많이 써 줘서. 당신 앞에 있으니 그 시절 그 꿈이 떠올라요. 이렇게 상기하니 좋네요. 언제 또 베를린에 오게 될까요? 그때까지 안녕. 그렇게 난 그 시절 내 꿈과 작별한다.
생각하면 아련한 도시가 있고 그리운 도시가 있고 가슴 설레는 도시가 있는 동시에 치가 떨리는 도시가 있고 아무 감흥이 없는 도시가 있고 슬픈 도시도 있다. 내게 베를린은 아쉬운 도시다. 이룰 듯했으나 이루지 못해서 아쉬운 도시. ‘어디든 그런 것 아니겠냐’ 하겠지만 누구든 뭔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곳에서 그러지 못했다는, 그래서 왠지 모를 굴욕과 열패감으로 자존심 상하는 도시. 하지만 한편으로는 워낙 나 같은 사람이 몰려드는 곳이기에 어찌어찌 살아남고 여차저차 이루어도 과연 지금과 크게 다를까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도시. 어찌 됐든 마음 한쪽 남아있는 미련을 부여잡게 되는, 그저 아쉬운 도시.
모르겠다. 한 도시에 대한 로망은 로망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지. 내가 아는 베를린을 지금 다시 겪는다면 그 로망이 사라질지. 그 실망에 대해 난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럼에도 계속 중얼거린다. ‘이 좋은 곳을 두고 말이지…’ 그러게 말이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 좋은 곳을 두고,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냐고!
공동묘지를 나와 걸으며 난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을 생각한다. 난 브로드웨이 디자이너가 되지 못했으며, NGO 단체를 만들지 못했으며, 자연 속의 공동체를 만들지 못했으며, 내 창작품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 더불어 수많은 ‘만약’을 생각한다. 그때 뉴욕에 남았더라면, 그때 베를린에서 아파트를 구했더라면, 그때 포르투갈에서 땅을 샀더라면... 질문한다. 우린 과연 실패했을까? 베를린, 너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가 실패한 거니?
2022년 봄, 베를린의 쇼세스트라쎄에는 왜소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한국인 여성이 있었다. 그 많은 ‘만약’들을 뒤로하고 그녀는 나아갔다. 길이 여전히 뻗어 있기에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여성이 이렇게 모든 걸 기록하려고 안달하는 건 베를린에 던진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