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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여해 Jul 14. 2021

등산 경험 5회의 한라산 관음사 코스 탐방기

사골곰탕면에서 불닭볶음면까지 다 있다.

날씨에 따라 일부 구간 통제되는 한라산 


관음사 코스를 통한 백록담 구경을 예정하였으나 흐린 날씨가 지속되더니 1주일의 장마가 찾아왔다. 

https://jeju.go.kr/hallasan/index.htm


한라산 국립공원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면 실시간 탐방로 개방 상태를 볼 수 있고, 또 CCTV로 한라산의 현재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지 못하는 아쉬운 마음에 가끔 들어가서 확인했다. 비가 올 때 아예 통제하지는 않았지만, 백록담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막아놓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록담까지 가는 길을 막아놨다면 그럼 어차피 백록담까지 안 가는 다른 탐방로를 통한 등산을 해볼까 했지만, 영실이나 돈내코 탐방로도 비가 오니 코스 전체를 다 운영하지 않고 일부만 개방해놓았다. 


제주 날씨는 확확 바뀌어서 '섬 날씨는 믿을 게 못된다'는 것을 점차 체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날씨를 알아야 어디를 갈지 계획을 세울 수 있어 계획충 ENTJ에겐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핸드폰 어플로 날씨를 확인하다 이제는 제주지방기상청 사이트가 즐겨찾기에 등록되었다. 이 역시 100%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 정보가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전날 새벽에 보고 자도, 아침에 일어나면 또 바뀌어 있는 날씨이다. 

https://www.kma.go.kr/jeju/html/main/index.jsp


또, 한라산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는 탐방 예약제가 실시되고 있기 때문에 계획을 세워 미리 사전 예약을 해두는 것도 필요하다. 날씨를 보고 '맑음'임을 확인한 2021년 7월 13일 화요일을 관음사 day로 잡았다. 


역시, 이틀 전에 분명 '해'만 있는 맑음 날씨였는데, 아침에 나서보니 그 정도는 아니다. 구름도 꽤나 있는 상황으로 '구름 많음' 날씨임을 알 수 있었다. 어둑할 때 출발했지만, 관음사 탐방 안내소에 가까워질수록 멀리 해가 뜨는 게 느껴졌다. 엄청난 풍경에 차를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습을 보니 날 좋을 때 일찍 나가 일출을 보고 싶어 졌다. 분명히 매일 엄청난 장관을 연출하고 있을 것이다. 시작부터 엄청 흥분했다.



서귀포에서 관음사 시작 지점까지 한라산을 넘어가는데, 그동안 노루를 4마리나 봤다. 지난번 성판악 코스 등반하러 갈 때도 노루를 봤었다. 이들 노루는 길 한 중간에 떠억 있으면서 차가 와도 놀라지도 않고, 달아나지도 않고 그냥 바라본다. 내가 도리어 당황해서 헤드라이트를 끄게 된다. 호기심이 많은 거니, 겁이 없는 거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니. 찻길로 오면 먹을 게 있긴 있니. 내려서 사진을 찍어도 그냥 쳐다볼 것만 같다.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얼은 걸 수도 있으니 그냥 못 본체 하고 지나가 준다. 아직 자동차가 자신들의 천적임을 DNA에 새기지 못한 노루들이다. 



이런 일출을 보이는 날씨에 백록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난번 처음으로 올라가 본 백록담 구경에 아~무 장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록담은 쉽게 허락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 산행에서 알 수 있었다. 



관음사 탐방로 : 오르는 데만 5시간 걸린다는 8.7km


# 2021년 7월 13일 5시 40분 ~ 13시 20분 (7시간 40분)

# 올라가기 : 관음사지구 야영장 해발 620m 5시 40분 ~ 구린굴 해발 700m 6시 ~  숯가마터 6시 25분 ~ 탐라계곡 화장실 3.2/8.7km 6시 40분 ~ 개미등 원점비 해발 1,060m 7시 15분 ~ 해발 1,200m 7시 25분 ~ 해발 1,300m 7시 50분 ~ 삼각봉 대피소 해발 1,500m 6/8.7km 8시 15분 ~ 전 용진각 대피소 8시 50분 ~ 해발 1,700m 9시 15분 ~ 백록담 전망대 8.7/8.7km 9시 45분 (4시간 5분)

# 내려오기 : 백록담 전망대 10시 5분 ~ 삼각봉 대피소 10시 50분 ~ 관음사지구 야영장 13시 20분 (3시간 15분)


관음사 탐방로는 8.7km로 편도 5시간이 소요된다. 한라산의 동쪽에서 올라오는 성판악 코스와 달리 관음사 코스는 한라산의 북쪽에서 시작한다. 해발고도 차이가 가장 큰 코스라서 날씨 변화가 심하므로 바람막이와 비옷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고 사전 정보를 얻고 갔다. 첫 번째 화장실이 있는 탐라계곡 대피소까지는 3.2km로 평탄하고 수월하다. 이후 난이도는 '상'이 되어 나무 계단과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헬게이트 오픈을 맞보고 개미등을 지나면 삼각봉 대피소가 나온다. 여기서 용진각 대피소까지는 난이도가 낮아져 '하'가 되고 숨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왕관능과 백록담까지는 최대 빌런 지옥불을 맞볼 수 있다. 



시작은 안성탕면 : 탐라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


분명 관음사 코스에선 관음사를 갈 수 없다고 들었는데, '관음사 주차장'을 찍고 가니 정말 관음사 주차장이 나왔다. 차가 한 대도 없는 것을 보아 여긴 아니다는 판단으로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내려가 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을 보고 이곳임을 추측해본다. 1,800원 주차비를 내며 여기가 관음사 코스 시작하는 데가 맞냐고 물어보았다. 관음사 코스의 이름이 관음사 코스인 것도 한라산 동쪽에 있는 이 관음사 때문이다. 성판악의 이름 유래를 알기 위해 노력했던 것과 달리 여기는 이해가 쉬운 이름이다. 하지만 관음사 코스에 관음사를 따로 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코스 이름이 조금은 의아하다. 


해가 조금씩 뜨고 있는 관음사지구 야영장엔 까마귀들이 주인이었다. 너무 지척이라 새콤달콤을 뺏어갈 것만 같았다. 준비를 하고 QR 코드를 찍으니 오전 5시 40분. 5시 정각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졌다.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오른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숲 길만 있던 성판악과는 시작부터 다른 풍경이다. 계곡엔 조금씩 물이 고여있었는데, 이건 원래 항상 있는 건지 저번 주에 비가 와서 고인 건지 궁금해졌다. 관음사 코스는 해발고도 620m에서 시작하는데, 아직 이 높은 곳까지는 해가 도달하지 못해 어두웠다. 5시였으면 지난번 성판악 때처럼 더욱 어두웠을 테지.  



물이 금방이라도 흐를 것 같이 생긴 산속의 계곡이라도 졸졸거리는 물소리는 들을 수 없는 한라산이다. 이렇게 계곡을 건너기도 한다. 이런 길이 가능한 것도 물이 죽죽 지하로 다 빠져버리는 한라산 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시작부터 성판악 보다 훨씬 재미있다. 



심지어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동굴도 있었다. 이름은 '구린굴'이다. 왜! 구려서? 이름에 대한 유래를 열심히 검색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다음에 다시 도전. 



구린굴은 한라산 백록담 형성 이후에 흘러내린 용암류에 의해 약 2만여 년 전에 형성된 용암동굴이다. 안내판에는 얼음창고로 사용했다고 쓰여있다. 근처에 숯가마도 있으니 사람이 살았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구린굴은 제주도에 있는 동굴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고도 700m. 나는 차 타고 620m나 올라왔는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살게 되었을까? 현재는 이곳에 멸종위기 동물 1급인 붉은박쥐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천장이 붕괴되면서 하천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https://www.hani.co.kr/arti/area/jeju/999788.html


구린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숯가마터


탐라계곡 목교를 6시 35분에 지났다. 저런 바위 위에서도 살고 있는 나무가 신기하다. 이렇게 제주의 나무들은 돌 위에서 살아남고 있다. 거친 환경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제주의 숲을 보면 자연스럽게 해녀가 떠오른다. 





중간 3.1km는 신라면 : 탐라계곡 대피소 ~ 개미등 ~ 개미목


여기서부터 난이도 A의 어려움으로 바뀌어 삼각봉 대피소까지 3.1km가 이어진다. 헬게이트 오픈임을 느낄 수 있는 게 나무다리를 건너기도 전부터 보이는 엄청난 경사의 나무 계단이다. "한라산 국립공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표지판이 있는데, 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작 부분에서 보지 못했던 환영 인사를 헬게이트가 시작되는 곳이 위치해 있으니 말이다.



첫 번째 화장실이 있는 탐라계곡 대피소 3.2km/8.7km 지점을 지나면서 오르니 이제 해가 산속 깊이 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개미등을 오르면서 왼쪽으로 보이는 절벽 너머의 풍경에 취한다. 나무 사이로 절벽 너머 보이는 한라산의 풍경을 보면서도 백록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땀이 다이빙할 때 바닷물이 묻어있는 것 저리가라로 온 얼굴에 줄줄 흘러내린다.




갑자기 굉장히 허기져서 걸으면서 김밥을 꺼내 먹었다. 그냥 배고프다와 허기지는 것은 다르다. 배고픈 것은 무언가를 하다가 가끔 떠올릴 수 있는 느낌이라면 허기짐은 배고프다는 생각만 드는 상태이다.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고 그냥 배고프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이럴 땐 모든 걸 멈추고 뭘 먹어야 한다. 아주 조금만 먹어도 허기진 상태에서 배고픈 상태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에. 무념무상하게 다리는 계속 오르막을 오르면서 김밥을 씹었다. 


올라가는데 원점비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1982년 2월 5일 특전사를 태운 수송기가 추락하여 군인 53명이 즉사한 곳이라니 끔찍하기 그지없다. 분명히 엄청 어린 나이였을 텐데. 보러 가고 싶었으나 길이 뭔가 애매하게 되어 있어 포기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해발 1,200m 지점을 7시 35분에 지났다. 2시간을 올라 개미등을 계속 걸었다. 여기서 탁탁 소리가 났다. 앞서가는 누군가의 등산 스틱이 고장 났나 보다 라고 생각하며 오르고 있는데, 계속 나는 게 이상했다. 알고 보니 딱따구리로 추정되는 새가 나무를 쪼는 소리였다. 신기하다! 



올라가는 데 그냥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힘들다, 어쩌다 이거보다 그냥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뇌와 다리가 분절된 느낌. 성판악 마지막 부분을 걸을 때는 심박수가 치솟는 게 너무 심하고 숨이 차서 자주 쉬었어야 했는데, 여기는 그런 느낌과 다르다. 그냥 헉헉 대며 계~속 주구장창 올라갈 수 있는 경사를 가지고 있는 개미등이다. 



탐라계곡을 지나서 이어지는 능선을 개미등이라 하고, 더 올라가면 삼각봉 직전 좌우로 동, 서탐라 계곡 폭이 좁아진 곳을 개미목이라고 한다. 왜 이름이 개미일까? 역시 검색했지만 잘 나오지 않아 다음을 기약. 


곧 삼각봉이 보였다. 걸으면서 또 이름에 집착하며 왜 삼각봉일까? 검색해봐야 하나 궁금해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나는 삼각봉이오' 산에 쓰여있다. 성판악 코스는 5시에 출발할 때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관음사 코스는 아무래도 적다. 삼각봉 대피소까지 10명도 안 되는 사람밖에 보지 못했다. 



아주 잠깐 사골곰탕면 : 삼각봉 대피소 ~ 용진각 계곡



삼각봉 대피소에 8시 15분에 도착했다. 삼각봉 대피소에서부터 산안개가 보였다. 구름인가, 안개인가 이 두 개는 구분이 가능한 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분명히 새파란 하늘이 있는데, 나에게 가까운 운무가 몰려와서 새파란 하늘을 가린다. 그러다 슈웅~ 바람이 불면 다시 안개가 흩어져 파란 하늘이 나타나고, 제주시 풍경이 살짝살짝 보였다. 삼각봉 대피소 화장실 위에 올라가서 제주를 내려다보는데, 바람이 어찌나 센지 사진 찍다 핸드폰을 놓칠 것만 같았다. 



저 멀리 바다에 바로 붙어있는 도두봉이 보였다. 이렇게 이름을 하나씩 익혀가고 위치를 알아보고 불러줄 수 있음에 기쁘다. 


손 뻗으면 닿을 듯한 얕은 구름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는 게 흥미로웠다. 내가 바다보다 구름에 더 가까이 올라와 있음이 여실히 느껴진다. 사진을 찾아보면 이곳에서 원경으로 백록담이 보인다. 하지만 구름과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5분만 있어도 땀이 다 식고 10분 있으니 서늘하며 춥게 느껴진다. 해발 1,500미터의 힘인가. 여기서 본격적으로 김밥을 먹었는데, 먹다 보니 싸늘한 느낌이 놀랍다. 분명 오늘 폭염주의보였는데. 지난번에 성판악 코스에서 내려올 때 굉장히 허기졌어서 이번엔 조금 남기려고 했는데 김밥 두 줄을 다 먹어버렸다. 그냥 먹다 보니 사라져 버려서 남길 수가 없었다. 


삼각봉은 표고 1,697m의 삼각형 형태의 조면암 돔 화산체이다. 


삼각봉과 왕관바위가 보이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래서 성판악보다 관음사 관음사 하는구나를 깨닫는다. 역시나 파란 하늘인 이곳에서도 백록담이 그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용진각 샘터가 있는데서부터 안개가 짙어졌다. 관음사 코스에서 유일하게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아니라 쫄쫄쫄 해안가 용천수 소리이다. 용진각 현수교로 계곡을 건너는데, 바람이 세차서 다리가 흔들거렸다. 이런 거 좋다. 



용진각 계곡과 다리를 지나며 올려다보니 안개가 있다. 저러다 바람 불면 또 사라지겠지 싶었는데,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안개였다. 관음사 코스는 날씨 변화가 심하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역시나 백록담이 그럴 줄은 몰랐다. 



진정한 불닭볶음면 2.7km : 용진각 ~ 왕관릉을 지나 ~ 백록담까지 약 1시간 40분


여기서부터 불닭볶음면이 시작된다. 하지만 한라산의 품에 쏙 들어가 있는 느낌이 대단하다. 한라산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탐라 계곡을 타고 올라왔는데, 그 계곡이 여기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 북쪽으론 탐라계곡이 있고, 서쪽은 장구목이 보이며, 동쪽으론 왕관바위 그리고 남쪽으론 백록담을 받치고 있는 한라산의 북벽 사이에 폭 들어와 있다. 


왕관릉은 표고 1,666m의 조면암 돔 화산체이다. 왕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왕관암, 왕관바위라고 불린다. 이름을 잘 지은 것 같다. 이마 위에 올려진 왕관처럼 생긴 왕관바위이다. 이곳엔 연대가 있어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고 한다. 



장구목이 보인다. 장구목은 장고악(長鼓岳)이라고 불리며 표고 1,813m이지만 비고는 70m 밖에 안 되는 오름이다. 제주도 오름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장구목은 삼각형 형태의 볼록한 오름 모양이 아니었다. 사물놀이에 쓰이는 악기 장구를 옆에서 본 모양이라고 하여 장구목이라는데 잘 모르겠다. 다른 이름들의 유래와는 다르게 장구목은 인터넷에서 설명을 잘 찾을 수 있었다. '목'은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한 통로의 좁은 곳'이란 뜻이거나 '어떤 물건의 목에 해당하는 부분'이란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장구목'은 '장구의 목'과 같이 잘록한 부분이라는 데서 붙였다고 한다. 



http://www.newsje.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262



이 길이 진짜 지옥불이다. 나무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오르는 사람은 오르는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었나 싶다. 만드신 분들 존경. 경사가 굉장히 가파른 게 느껴진다. 계단이 이렇게 이어지니 말이다. 하지만 구경하느라 바쁘다. 나무 기둥 색깔을 띠고 있는 회색과 갈색 사이의 화산이 만들어낸 바위들이 웅장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바뀌는 모습에 사진 찍으랴, 구경하랴, 걸으랴 정신이 없었다. 



여기서부턴 살짝 눈치챌 수 있었다. 안개가 바람에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막상 정상엔 짜잔! 파란 하늘일 수도 있어라는 희망을 가지고 올라갔다. 한 번 가본 게 전부인데, 그때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백록담이 있었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못 볼 수도 있다는 것은 전혀 염두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는 파란 하늘이 가끔씩 나왔다 가렸다. 한라산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다. 




1,700m 지점을 9시 15분에 지났다. 오른쪽은 안개가 잔뜩 꼈지만 왼쪽으론 파란 하늘이었다. 오르면서 흙붉은오름, 어후오름, 물장오름 등을 볼 수 있다고 되어있지만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를수록 아래 안개가 깔려있지만 위에도 깔려있다. 내가 올려다보던 바위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그냥 어림짐작으로 안개 너머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뿐 보이진 않았다. 어쨌든, 엄청난 계단을 올라서 그 바위들보다 위에 올라왔구나. 



이렇게 하늘을 안개가 자꾸 와서 가렸다. 



9시 45분. 4시간 하고도 5분 만에 백록담에 도착했다. 이게 정말 내가 저번에 봤던 백록담이 맞아? 비가 와서 물이 좀 차 있는 백록담을 보나 했더니 아예 보여주지도 않는다. 아래쪽으로 분화구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짙은 안개이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김밥도 다 먹어버려 먹을 것도 없고. 무엇보다 안개와 구름, 그리고 바람 때문에 오래 있기가 불편했다. 머리는 어느새 수영하고 나온 것처럼 다 젖어버렸고, 옷도 바람막이를 꺼내 입지 않으면 추운 정도였다. 지난번과는 확연한 온도차에 신기했다.



백록담은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하산길


백록담은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다는 말을 실감했다. 지난 성판악 탐방 때가 운이 좋았던 것을 알게 되었다. 성판악 코스에서 막판에 백록담으로 오르는 길은 서귀포 바다가 내려다보여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인데, 오늘은 그곳도 안개만 잔뜩 끼어있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한라산은 '구름 많음'이 아니라 '맑음'일 때 와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하지만 맑음이라 해도 이 높은 곳은 구름이 껴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설문대할망의 변덕인가!


또 한 가지. 고무줄 등산바지에 허리띠가 왜 있는지 의아했는데 이유를 알았다. 올라갈 땐 딱 맞던 바지가 내려올 땐 헐렁해진다. 아무리 김밥을 먹고 물을 마셔도 등산이라는 행위에서 배를 두둑하게 불려놓을 수 없나 보다. 허리띠가 거슬려하며 빼놓고 왔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라올 때 불닭볶음면의 경사 27도의 나무 계단이 내려갈 때는 수월하다. 돌로 되어 있으면 혹여나 발목이 꺾일까 걱정하며 조심하게 내려가야 히지만, 나무 계단은 빠르게 내려가도 문제없다. 등산 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우당탕탕 내려갔다. 시야가 좋으면 풍경을 만끽하며 천천히 내려갈 텐데, 그게 아니라 빠르게 이동했다. 올라올 때보다 안개가 더 짙어졌다. 너무 금방 내려와서 올라갈 때의 괴로움도 짧게 느껴졌다.



살짝살짝 오름 군락이 보인다. 



낙석주의라고 표지판이 붙어있는 것보다 낙석이 실제로 걸려 있는 게 훨씬 낙석을 주의할 것이다. 철조망이 없었으면 어땠을지 아찔함이 상상되는 모습이다. 



11시에 삼각봉 대피소를 지났다. 성판악 때는 너무 길게 이어지는 평탄한 하산길이 지루했는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관음사로 내려오면 좋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근데 거의 졸면서 내려왔다. 공부할 때 졸린 거라는 또 다른 느낌의 졸음이 몰려온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갑자기 확! 시원한 지점을 지나길래 '풍혈이다' 싶어서 따라 들어가 보니 그렇다. 자연산 에어컨이다. 풍혈은 정말로 신기하다. 



13시 20분에 관음사 지구 야영장에 도착하였다. 물이 찰방찰방한 백록담을 기대하고 올라갔으나 못 봐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다른 멋진 구경을 충분히 했고 또 다치지 않고 건강한 산행을 했으니까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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