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가 안내자 혜연 Feb 20. 2024

한바탕 앓고 난 후 쓰는 영화 감상문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2019년 12월, 이직과 취업준비로 바삐 지내던 나는 꾸준한 수련을 할 만한 요가원을 찾아 합정역을 헤매었다. 네이버에 별 정보는 없었지만 <언더독요가>라는 곳에서 체험을 해보기로 하고, 아쉬탕가 수업을 들으러 갔다. 수업 전 원장님과 짧은 상담을 하며 '제가 요가 강사로 일했었거든요 ^^'를 시전한 나는 원장님의 정말 쉴 틈 없는 힘든 수업을 들은 후 땀에 절어 부족한 아사나에 대한 부끄러움과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언제 가도 집 같은 나의 수련 장소, 망원동 <언더독요가>

그 후 2022년 6월 회사를 퇴사할 때까지 주 5일의 새벽수련, 어려울 때에는 점심과 저녁 타임 혹은 주말의 수련이라도 채우려고 노력하며 언더독요가에서의 수련을 이어갔다. 코로나 시기와 일산에서 재택근무를 할 때 요가원에 못 다니는 때는 있었지만, 특히 새벽 수련을 매일 다니던 때에는 불안정한 일상 속에서 요가원에 가는 일이 내 삶의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새벽 GOD의 '촛불 하나'를 한 곡 듣는 시간 동안 요가원에 걸어가고, 6시 반에 시작한 수련이 힘들어질 무렵 매일 같은 시간 옆 집의 강아지가 컹컹 짖었다. 


도무지 왜 하는 건지 모르겠는 동작들을 아무튼 간 이어가다 보면, 어느 날에는 몸이 가볍게 뜨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느 날에는 여전히 힘들고 싫기도 했다. 


22년도 퇴사 후 이런저런 워크숍과 지도자과정을 다시 들으러 다니며 언더독요가에서의 수련도 그만두게 되었다. 내가 아쉬운 마음으로 마지막 수련을 마치고 매트를 말며 '오늘이 마지막이에요'라고 원장님께 말씀드리자 원장님이 '그래요, 다시 또 와요.' 하고 담담하게 인사해 주었다. 


바쁘게 수업하며 지내던 날들 중, 듀엣 레슨을 대관해서 이어가던 스튜디오가 문을 닫으며 언더독요가를 떠올리게 되었다. 마침 원장님은 근처에 언더드릴이라고 하는 필라테스 기구/웨이트 트레이닝 기구가 있는 센터를 운영 중이었고, 나는 언더독요가와 언더드릴을 대관해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웨이트 트레이닝, 필라테스 기구, 요가 매트 등.. 많은 도구들을 활용해서 수업할 수 있는 공간 <언더드릴>


요가원에 바닥을 데워두고 수업을 하고 있자, 수련하던 때와 같은 시간에 옆집 강아지가 컹컹 짖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너 아직 건강하구나!'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관계들이 이리저리 뒤바뀌는 세상 속에서 시간이 흘러도 지켜지는 것들이 있는 곳, 돌아갈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원장님은 몇 년이 흘러 다시 언더독요가와 연을 맺는 나를 보면서 영화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영화가 떠오른다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는 평소에 감정적인 나를 더욱 감정적으로 만들기에 보지 않지만, 내용이 궁금해서 오랜만에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우씨 역시나 눈물 펑펑 쏟았다. 하지만 정말 좋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기쁘다.


나이 든 채로 태어난 한 남자가 점점 어려지는 그의 삶 속에서, 한 소녀를 만나 그녀가 나이 들어가는 그 여정을 함께 겪으며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도, 헤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각자의 삶에서 시련을 겪기도 하며 긴 서사를 엮어나간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배우려고 이 세상에 오는 걸까?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음악에 조예가 깊고, 누군가는 엄마가 되고, 누군가는 벼락을 맞지만 모두 언젠가는 눈을 감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2월의 책 목록

얼마 전 본 친구에게 추천받아 사주를 보러 갔는데, 사주 선생님은 나에게 <웰컴투 지구별>이라는 책을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었다. 


책에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영혼의 차원에서 어떠한 일들을 배우기 위해서 이 일을 겪고 있는지 나름대로의 맥락으로 해석한 이야기들이 풀어져 있었다. 


이번 주, 세 번째 코로나를 겪으며 일도 모두 쉬고 집에서 청소를 하며 우울감에 젖어 있었다. '회사 생활을 계속했다면 이렇게 몸이 아팠을 때도 벌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될 텐데, 더 적은 것들에 대해 책임지고도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이런 일을 선택해서 하고 있는 걸까?'





그러다가 22년 5월, 퇴사 한 달 전 제주도 출장을 마치고 김포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택시 안에서 쓴 메모가 떠올라 읽어보았다. '붉은 달이 뜬 날이다. 내 영혼의 일부를 두고 다니는 기분이다. 여유와 안정을 위해 이 삶을 택했다는데 게으름과 사치가 여유와 안정일까 싶다.'


공허한 마음으로 택시 안에서 붉게 뜬 달을 바라보며 내 영혼의 일부를 두고 다닌다는 생각을 했던 나에게, 지금까지의 선택들은 이번 삶에서 내가 배워야 할 일들을 만나기 위해 쌓아 온 선택들이리라.


2014년도, 문화인류학과 수업인 <현대사회와 정체성> 수업에서 <비행공포>라는 책을 읽고 나는 아래 감상문을 남겼다. 


문득 내가 왜 이 모든 고생을 자처하며 움직임과 명상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나는 이 지구에서의 삶이 '자기 자신이 되는 여정'이라고 믿고, 요가든 서핑이든 춤추기이든, 어떤 행위든 잠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과 '접속'하는 시간을 통해 살아갈 길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계속 이런 주제에 대해 공부하고, 스스로 해보고, 사람들에게 알게 된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 셈이다. 


몸이 아프고, 이사를 하고,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들이 생기며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해졌었다. 그러던 중 두 시간 남짓의 영화로 사람들이 태어나고, 늙어가고, 무언가를 포기하고, 다시 성취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장면들을 본다.


우리 인생 참 긴 것 같지만 이렇게 두 시간의 영화로 바라보면 - 지금의 삶을 사랑하고, 당면한 어려움들을 헤쳐나가고, 순간순간 최선이라고 믿는 선택들을 내리다가, 어느새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눈을 감는 장면으로 막이 내리게 된다. 


언더독요가의 원장님은 내가 수업을 맡게 된다면 수업명으로 '복원'이 어울릴 것 같다고 추천해 주었다. 복원. 원래대로 회복함. 


요가 수련은 언제나 나에게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의 의미였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회복하여 돌아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그런 수업을 앞으로 만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알게 모르게 조금 지쳤던 최근의 나에게 어쩌면 필요했던 휴식-! 잘 쉬고 차근차근 다시 쌓아나가는 한 해가 되길.


또 나에게도 요가 수업을 하며 살아가는 일이 복원의 시간이기를, 회복하고 본질에 가까워지는 시간이기를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평가 받으며 사는 삶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