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더 이상 참고 넘어가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 난 그다음 날.
남편이 시어머니께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시어머니한테 장문의 카톡과 문자가 왔다.
내용인즉슨 "OO이가 많이 속상했을 것 같다. 네 남편이 너 설거지 두 번 시키는 게 안타까운지 아껴서 그랬다. 다 좋은 뜻에서 그런 거니까 넘 섭섭해하지 말아라. 형님과도 대화했으니 이 문제로 앞으로 거론하지 말자, 이젠 설거지도 내가 다 할게. 둘이 마음 맞춰 살면 그만이다. 네 남편이 소심한 아이라 너 또한 그럴 것 같고 별거 아닌 거 갖고 그러지 말자, 아직도 화 안 풀렸구나? 나는 아직까지 먼저 미안하다 사과한 적 없는데 며느리 인생선배로써 이야기할게, 전화해~ 나는 언제나 니 편이다."
2개의 카톡 메시지와 4개의 문자 메시지를 요약하면 대략 저런 내용인데,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내가 답변을 하면 따지는 내용밖에 안될 것 같았다.
왜 남편이 설거지한걸 문제인 것처럼 말하는지, 앞으로 이 문제 거론하지 말자 하지는데 그럼 다음에도 또 이렇게 넘어가실 건지, 우리가 소심해서 별거 아닌 걸로 이러는 거라 생각하시는지, 언제나 내 편이시라는 분이 왜 그땐 내 편 안 들어주셨는지... 등등
내가 이 내용들을 정정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뭐가 문제인지 모르시고 넘어갈 것 같았다.
퇴근을 하고 남편에게 시어머니에게서 온 카톡과 문자를 보여줬다.
답장은 안 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남편은 답변을 안 하는 건 더 큰 오해를 불러올 수 있으니 그냥 대답이라도 해주라 했다.
그럼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메모장을 켜고 시어머니께 보낼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내용을 쓰다 보니 한참 길어졌다. 그래도 이번 참에 잘 내용을 정리해서 보여드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 생각해 긴 시간 동안 내용을 수정했다.
어머니께 내가 답변한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어머니가 저랑 남편이 소심해서 그렇다 하시는데 우리가 소심해서도 아니고 아랫사람이라서도 아닌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고 싶은 것뿐이다. 이번 문제의 원인은
1. 내가 설거지를 안 하고 남편이 설거지해서 형님이 화가 났고
2. 아주버님 말씀에 따르면 시댁에 7번 들르는 동안 눈치껏 센스 있게 '어머니 제가 할게요'라고 안 해서 맘에 안 드셨고
3. 남편이 '형수는 6년 동안 집안일 안 하지 않았냐'라고 말해서 형수한테 사과하라 하셨고
4.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남편에게 손아랫사람이니까 참고 사과하라 하셨다.
형님은 내가 이해 못할 이유로 화가 났고 그걸로 어머니 아버지가 참으라 하셔서 나도 화가 난 것이다.
어머니가 결혼 전에 저한테 그러시지 않으셨냐, 며느리들 집안일 안 시킨다. 너는 정말 시집 잘 오는 거다. 근데 언제부턴가 집안 풍조가 바뀌신 거 같다. 스스로 어머니 아버지한테 며느리로서 도리 못한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집안일도 눈치껏 안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리시니 제 입장에선 네 분이서 저 왕따 시키는 것으로 느껴졌다. 서운한 것들이 있으시면 뒤에서 말을 하지 마시고 직접 말을 해주셔라. 그리고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랫사람만 참는 시대도 아니다. 이 문제의 원인인 형님은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계시는데 아주버님, 남편, 어머니, 아버지 중간에서 말을 전달하시고 진정시키려고만 하신다. 나는 이러면 이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해결되지 않고 오해만 커진다고 생각한다. 형님이 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시기 전에는 형님네 부부 뵙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럴 맘도 없으니 그 문제로 더 이상 저에게 참으라고 하지 말아 달라."
엄청나게 긴 장문의 카톡을 보내고 나선 다시 시어머니의 카톡이 이어졌다.
"그래 너가 무슨 이야기 하는지 알겠다. 앞으로 이런 일로 얼굴 붉힐일은 없을 거다. 상처 받았다면 미안하다. 앞으로 불편한 일 없이 웃으면서 살자."
그러다 또 몇 분 뒤에 다시 카톡이 왔다.
"다시 읽어보니 형님이 너한테 전화해서 사과하라는 거냐, 자꾸 따지지 말고 이번에는 넘어가자. 작은 일이 큰일이 될 것 같다. 니가 우리 며느리 된 거 후회할 일 없도록 할게 그냥 넘어가자~"
어머니는 일을 크게 만드시고 싶지 않으셔서 계속 나에게 참으라고 넘어가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앞서 길게 쓴 카톡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도 이어서 카톡을 보냈다.
"어머니 제가 설거지를 하는 게 문제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다. 집안일은 누가 해도 상관없다. 근데 여자만 일을 하는 게 맞고 그게 아니면 눈치 없고 센스 없는 사람인 것처럼 분위기를 형성하는 형님의 생각에 동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중재해주시기보다 형님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형님이 스스로 사과하고 문제 해결하실 생각이 없으신 거 잘 알겠다. 죄송하지만 그럼 저도 형님과 교류하면서 잘 지내긴 어렵겠다. 제가 성격이 못됐고 모나서 그렇다. 이렇게밖에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그리고 그 이후로 카톡이 다다다다 이어졌다.
"그래 보지 말거라, 가족이니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게 옳다고 생각돼서 그런 건데, 내가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냐 그렇게 그게 따질일이냐 그냥 너희 둘이 잘 살아라, 우리 집에 대해 신경 쓰지 마라"
"우리 집은 집안일에 대해 여자 남자 안 따지고 다 한다"
"다 모였을 때 형님한테 사과하세요라고 하지 며칠 지났는데 왜 갑자기 그러냐 내가 다 알아듣게 말했다고 하지 않았냐 그냥 내 말 믿고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원리 원칙 따지니 여기가 회사니? 가족이니 뭐니?"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OO아 내가 꼭 형님한테 사과시킬게, 가족을 보니 안 보니 하지 마라. 나 너무 충격받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해야 할 말 안 해야 할 말이 있는 거다. 어쨌든 미안하다 사과는 꼭 시키마"
"OO아 엄마 아빠는 너 처음 보고 많이 이뻐했다. 왕따가 어딨니 그런 마음 갖지 마라. 우린 식구잖니.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라 할게 그만 풀거라~"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니가 많이 상처 받았구나. 미안하다"
회의를 다녀오니 시어머니의 복합적인 마음이 느껴지는 여러 개의 카톡과 부재중 통화가 남겨져 있었다.
나도 이어서 카톡 답장을 보냈다.
"네 잘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랑 남편도 이번 문제로 충격이 컸네요. 결혼하고 처음으로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런 문제가 생겨서 남편과 언성도 높아지고 그랬습니다"
남편과 나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기에 저 말이 시어머니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시어머니의 카톡이 이어졌다.
"그래 안 싸우고 이쁘게 연애해서 결혼까지 해서 너무 좋아. 형님이 사과할 거야 앞으로 잘 지내자"
시어머니와의 카톡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이번 대화로 느낀 건 생각보다 시어머니와의 대화가 어려웠다는 점.
나는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고 싶은 것뿐인데, 왜 자꾸 참으라고만 하시는 걸까.
그건 문제의 해결이 아닌 문제에 지푸라기와 휘발유를 들이붓는 행위인데...
어쨌든 형님이 사과를 한다고 하니 기다려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