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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하LeeHa Sep 20. 2019

인간 관계 헤맬때. 자기 자리 찾기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


친한 후배가 저한테 연락을 해서 다짜고짜 이사를 가고 싶다며 한숨을 쉰 적이 있습니다.  무리를 하여 구입한 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실내 인테리어까지 해놓은 아파트였는데 이사라니요.  후배가 무척 좋아했었던 것을 알았기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었죠.


후배는 이사를 하고 나서 윗집 사람들과 소통을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아이들끼리 같은 나이이기도 했고 새로 이사한 동네 물정도 몰라서 묻다 보니 그렇게 되었나 봐요. 처음에는 좋은 이웃 만났다는 생각도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윗집 엄마가 시도 때도 없이 후배에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고 집에도 불시에 찾아왔답니다. 차 마시러 와라, 조조 영화 보러 가자, 엄마들 모임에 같이 가자.. 등등.  처음 몇 번은 응했다는데요. 모이면 모일수록 아이들 사교육 이야기와 다른 집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 엄마들이 부담스러워졌던 것 같습니다.


후배는 성격도 유순하지만 조용히 있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거든요. 게다가 자신의 시간이 타인들에 의해 이리저리 방해받게 되니까 스트레스도 생겼고요. 그래서 어떤 날은 전화 걸어올까 봐서 일부러 전원을 꺼놓기도 했대요. 후배의 마음을 눈치챈 윗집 엄마도 전 같지 않게 냉랭한 기운을 내뿜었답니다.


그러면 서로 거리를 두고 각자 인생을 살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겨버린 겁니다. 윗집 엄마가 후배 보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싫어하는 내색을 한다는 거예요.


인생이 참 우리들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가지 형태로 접하게 되는데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리면 꽤나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 후 윗집에서 쿵쾅대는 발소리며 의자 끄는 소리를 엄청나게 내기 시작했답니다. 후배가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라고 하소연을 하는데... 참 답답하고 안타깝고 그렇더군요.








후배의 얘기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야기가 있는데요.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라는 단편 소설집 속의 <작업실>입니다.  이 중 가장 첫 번째에 등장하는 <작업실>은 가정주부이자 소설가인 주인공이 글을 쓸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다가 생기는 사건을 다룹니다.


주인공은 남들이 보기에 안락한 집을 가지고 있지만요. 글을 쓰기 위한 자신만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집에서는 끊임없이 신경 쓰고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죠.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13쪽


주인공은 남편의 동의하에 평일 저녁과 주말만 글을 쓸 수 있는 작업실 하나를 얻게 되는데요. 그곳에 타자기(배경이 1950년대) 접이식 책상, 의자, 주전자, 티스푼, 머그컵, 인스턴트커피, 핫플레이트, 탁자를 가져다 놓고 온전히 글만 쓰고자 했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건물 주인이라는 남자가 주인공의 작업실에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주인공이 작업실에 입주하기 전,  그 작업실을 병원으로 쓰던 한 의사의 부도덕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죠. 또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글에만 집중하고자 자신의 물건도 몇 가지만 가지고 집을 떠나온 주인공에게 이젠 자꾸만 다른 물건들도 가져다주기 시작합니다. 화초, 차를 우리는 주전자, 고급 8각 휴지케이스, 방석 등등. 그리고 그런 물건을 가져다줄 때마다 주인공의 영역으로 계속 침범합니다.


나는 이제야 이 남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남자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면 꼬리를 사릴 거라는 내 생각은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니었다. 

<행복한 그림자의 춤> 24쪽


급기야 건물주 남자의 눈을 피해 주인공은 발뒤꿈치를 들고 작업실에 숨어들어가는 수고까지 하는데요. 남자는 매번 1분도 채 안 걸린다고 하면서 작업실로 냉큼 들어와 버립니다. 주인공은 질질 끌려다니는 자신의 물러터짐에 대해 한탄을 하죠.


그러던 어느 날 밤, 주인공은 작업실로 잊은 물건을 찾으러 갔다가 건물주 남자가 자신의 원고를 몰래 훔쳐보는 걸 목격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매일 작업한 원고지를 집으로 가져감은 물론 아예 작업실 문을 잠그고 남자의 노크 소리에도 응답을 안 하게 되는데요.


이에 분노한 남자가 주인공을 몰아세웁니다. 작업실 옆 화장실의 외설스러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냐고 하면서요. 또 날마다 작업실에서 문을 잠그고 도대체 누구와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주인공을 난잡한 사람 취급하죠.


결국 주인공은 짐을 챙겨서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작업실을 떠납니다. 원고를 다듬으면서 그 건물주에 대한 기억을 지워 없애는 것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죠.


소설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저는 소설을 읽을 당시에도 후배의 얘기를 듣고 난 후에도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만의 자리 찾기를 하는 존재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집에서는 확보되지 않는 소설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외부로 작업실을 구해 나가는 것도 '자신만의 자리 찾기'로 보였고요. 건물주 남자의 끊임없는 선물공세와 간섭과 생트집도 소설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몸짓으로 보였습니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 자기 시간을 갖고 공부하고자 하는 후배도 '자기 삶의 자리 찾기'를 하는 거였고요. 이사 온 후배에게 여러 정보를 제공하고 다른 엄마들 사이에 합류시키려는 윗집 엄마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후배와의 관계에서 '어떤 자리'를 선점하려는 의도로 보였습니다.


결국 사람은 혼자 있으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으나 자신이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고자 하는지를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는 존재가 아닌가 고민해 보게 됩니다. 그런데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 찾기'에만 골몰하다 보면 나의 삶 속에서 '나만의 자리 찾기'는 종종 실패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더군요.


그래서 후배가 손해를 보더라도 이사를 가겠다고 할 때, 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돈이 아깝지 않아? 그냥 참아 보는 게 어때? 그 사람과 화해해 봐. 그냥 무시하고 외면해 버려'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지만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자리 찾기' 관심사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잘 지내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사자와 호랑이를 한 우리에 넣고 키우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의외로 사자랑 호랑이가 같이 잘 지낼 수도 있으려나요???)


그나저나 이사를 하려면 손해가 심할 텐데...하긴 돈만 아까운 건 아니니까요. 우리의 삶도 아까운 거니까 자신을 아끼며 위해주며 살아야겠죠. 오늘도 '우리만의 자리 찾기'를 열심히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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