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건우(1)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by 사색가 연두


'오늘은 무조건 성공할 테야!'


건우는 매일 아침 등굣길마다 다짐했다. 오늘은 기필코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해주리. 하지만 그 다짐을 미룬 지 어느새 두 달. 그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그에게 좋아하는 아이가


생겨 버렸다.




때는 고등학교 입학 첫날이었다. 새로운 학급이 열리는 날이면 누구나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건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내성적인 성격 탓에, 언제나 친구 사귀는 일엔 서툴렀던 그였다. 그래서 새 학기가 다가올 때마다 그에게 가장 큰 걱정은 늘 교우관계였다. 하필이면 금호 고등학교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라 중학교 때 함께 지냈던 친구들마저 곁에 없었기에, 그는 등굣길 내내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학교로 향했다.


후...


어느새 교실 앞에 선 건우는 걱정을 한아름 안은 채 문을 열어젖혔다. 들어가자 교실 속 분위기는 아직 어색한 기류로 가득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는 낯선 눈초리들이 부담스러워 재빨리 아무 자리에나 가 앉았다. 그때 책상 고리에 가방을 얹히자마자 뒷자리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그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안녕!" 한 여학생이 인사를 건넸다.


"어? 아, 안녕." 건우는 당황한 채로 인사를 받았다.


"이름이 뭐야?"


"나? 박. 건. 우." 혹여 작은 목소리가 묻힐까 봐 그는 또박또박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아~ 난 지수라고 해. 한지수. 잘 부탁해!" 그녀가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나도 잘 부탁해." 그는 얼떨결에 그녀가 건넨 악수를 받았다.


마주친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오밀조밀한 눈코입, 그리고 웃을 때 환하게 비추는 미소... 그 아이는 누가보나 꽤나 이쁘장하다고 얘기할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건우는 악수를 받자마자 곧바로 몸을 앞으로 돌려 두 팔 속에 얼굴을 묻었다.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저렇게 대뜸 말을 걸 수가 있는 건지, 그저 그는 그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띵동~ 띵동~


때마침 고등학교에서의 첫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새로운 환경으로 발을 딛는 일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한다. 동시에 그곳엔 인간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신비한 힘 또한 깃들어 있는 법. 건우는 그렇게 자기 일생일대의 서사를 써 내려갈, 생애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위대한 사랑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eunduu_empty_modern_Korean_classroom_with_large_windows_soft__3efd3010-ab32-49c4-811b-edab3b24bec4_3.png





"자~ 다들 주목! 오늘 우리 첫 만남이네. 그렇지?"


"네." 반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역시 이제 막 고등학교 들어온 애들이라 그런가 교실이 신선하네."


담임 선생님은 꽤나 젊어 보이는 남선생이었다. 그는 교실 전체를 한 번 쓱 훑어보고서 출석 기록부를 펼쳐 학생들 이름을 한 번씩 불러 주었다. 그렇게 이름을 다 부르자, 자연스레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름은 여승구야. 이름이 조금 특이하지? 승구란 좋은 것을 오래 받들자라는 의미야.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꽤 좋은 걸 많이 받고 자란 편이었어. 비록 아직 나이는 서른밖에 안 됐지만... 크흠! 어쨌든 선생님도 이곳에서 졸업을 했어. 그러니까 너희들 선배인 셈이지. 그때 내 담임이셨던 국어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셨어. 그분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까지의 내 발걸음마다 그 가르침이 배어 있을 정도야. 바라건대, 그 울림이 언젠가 너희들의 걸음에도 이어질 힘이 되어 주도록 노력할 거야. 하지만 이건 내 힘만으론 부족해. 너희들도 나를 잘 도와야 한다는 말이야. 잘할 수 있겠지? 1학년 1반."


지금까지 들어본 교사들의 자기소개 중 단연 으뜸이라고 건우는 생각했다. 범상치 않았던 그의 소개와 어울리게 그의 담당 과목 또한 국어였다. 역시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뭔가 다르다며, 한편으론 다가올 자기소개 시간이 문득 두려워졌다.


"지금부터 임시 반장도 뽑을 겸 다들 한 번씩 자기소개 시간을 갖도록 하자. 그러고 나서 한 학기 동안 앉을자리와 짝꿍을 정할 거야."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그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자기소개란, 지금까지 살아오며 수도 없이 많이 해 봤지만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는 낯섦 그 자체다. 건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여러 친구들의 소개를 듣다 보니,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로 한 학급 내에 정말 다양한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간단하게 이름만 소개하고 나오는 친구들이 있는 반면, 앞에 나서서 웃음을 주는 걸 즐기는 유별난 친구들도 있었고, 마치 강연을 하듯 뛰어난 말솜씨로 자신을 드러내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다. 사람의 첫인상은 그렇게 반전과 편견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추리 게임과도 같았다.


"다음 박건우!"


드르르륵-


터벅터벅


건우는 떨리는 마음을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른 명 가까이 되는 학우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꽂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 는 박건우라고 합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첫마디를 땠다. 자칫하면 삑사리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저는 글 쓰는 걸 좋아합니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요."


건우는 말을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지금 어떤 얘기를 꺼내고 있는지 인지할 수가 없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말해주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는 마음을 놓고 자기 자신에 상황을 내맡기도록 했다.


크흠-!


"건우라는 이름은 하늘에서 지은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상상력은 무한한 우주와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잠시라도 머물 수 있도록 제 글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짝짝짝!


건우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친구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조금 오글거렸나 싶었던 찰나 훌륭한 소개였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건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 들어가 앉았다.


"자 이제 마지막 차례네. 한지수!"


어느새 자기소개 시간은 마지막 한 명 만을 남기고 있었다.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자 건우는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아침에 인사를 건네왔던 그 여자애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지수라고 합니다!"


지수가 한마디를 뱉자 교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교실 전체가 한가득 울릴 만큼 어딘가 남다른 발성의 청량한 목소리는 주위 시선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계속해서 소개를 이어갔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지수란 이름은 꽤나 흔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제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흔하다는 이유만으로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결코 이름으로만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잠시 호흡을 살피며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흔히 사람들은 이름만으로 대상에 이미지를 부여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름은 문을 여는 열쇠일 뿐, 그 문 안에는 그 사람 본연의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성격과 기억이 함께 살아 숨 쉽니다. 세상엔 수많은 지수가 있을 테지만, 결국 ‘나’라는 '한지수'의 집은 단 하나뿐이라는 겁니다. 저는 현재, 지수라는 열쇠가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이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열쇠를 사용해 제 집 안으로 들어와 줬으면 합니다. 이상입니다!"


지수의 소개가 끝나자 잠깐의 정적이 교실을 감 싸돌았다. 그리고 하나둘씩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건우는 홀린 듯이 그녀를 향한 박수를 쳤다. 그는 그날,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욕망을 느꼈다.


eunduu_light_pink_monochrome_background_filled_with_soft_emboss_01232c90-0fcd-4c39-b621-d95f0c1ac62b.png





그의 바람을 하늘이 들어준 것일까, 제비 뽑기로 정한 자리에서 건우와 지수는 짝꿍이 되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그녀와 첫마디를 나눴고, 심지어 첫 짝꿍 또한 그녀가 되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상의 우연이 운명으로 바뀌는 일은 사랑 앞에선 시간문제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 믿는다.


"지금 너희들 옆에 있는 친구는 한 학기 동안 같이 지내야 될 짝꿍이야. 그래서 첫날엔 서로 친해지기도 바랄 겸, 짝꿍의 얼굴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질 거야."


그림이라면 자신 있는 건우였다. 평소에 심심할 때면 습관적으로 연필을 쥐고 주변 풍경을 스케치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는 실력발휘 좀 해볼 겸, 이번 시간을 그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만드리라 다짐했다. 다만 문제가 생겨버렸다. 선을 따려는 순간마다, 건우가 그녀의 얼굴을 흘겨보자 손이 떨려오며 그림에 온전히 집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한 번씩 눈을 마주치게 되면 고개를 획 돌려 저도 모르게 눈을 반사적으로 깔아 내렸다. 바로 옆에서 조차 몰래 훔쳐보게 되는 자신의 모습에 건우는 괜히 스스로가 음흉해 보였다.


"다 그렸다~!"


어느새 지수는 그림을 다 그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건우의 눈치를 보며 그림을 보여주었다.


"어... 근데 미안해. 내가 그림을 진짜 못 그려서."


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건우도 그 그림을 받아 들고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게 정말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린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그림 실력이었다.


"정말 미안해. 네가 절대 이렇게 생기진 않았어. 그러니까 오해는 마. 내가 그림을 진짜 못 그려서 그래." 그녀는 계속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러자 건우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음의 이유가 우스꽝스러운 그림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서툰 손길이 귀여워서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알 수 없는 그 애매함이 오히려 더 그의 마음을 간질였다. 건우는 다시 펜을 집어 들고 선 위를 천천히 이어나갔다. 그렇게 십여분쯤 지나자, 소년이 소녀에게 그림을 건네주며 말했다.


"나도 다 그렸어."


괜스레 긴장이 된 건우는 쉽사리 지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누군가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림을 그린 적은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조한 마음가짐으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우와!"


다행히도 걱정과는 달리, 건우의 그림을 받아 들자마자 지수는 감탄했다. 건우는 자신의 그림이 썩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기뻐하면 그걸로 만족이었다.


"너 그림 진짜 잘 그린다! 미술을 배운 거야?"


"배우진 않았고 그냥 혼자서 그리다 보니..."


건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자꾸만 삐죽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뿌듯한 작품을 완성한 듯 스스로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학교가 끝난 뒤, 집에 들어와서도 그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순간 지수가 지었던 미소를 마음 깊숙이 간직하며 그녀와의 첫 만남부터 오늘 하루 있었던 모든 일들을 회상해 보았다. 그러자 그는 불현듯 낯선 자신의 모습을 감지했다. 언제부턴가 머릿속엔 온통 지수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게 되었고, 지수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심장은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미칠 듯이 뛰어댔다. 내일도 그녀를 볼 수 있단 생각에 설레었다.


"나 이거, 설마..."


소년은 그렇게, 끝내 소녀 생각을 놓지 못한 채 꿈결로 자신을 내던졌다.




...


눈을 떠 고개를 들어보니 교실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건우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살폈다. 교실엔 아무도 없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그때였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


"응...?"


옆 자리에 앉은 지수였다. 분명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이게 마치 자연스러운 하나의 상황인 것처럼 지수의 등장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가만히 있어 봐." 그녀가 말했다.


아무런 맥락 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건우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소녀는 소년을 향해 몸을 점점 더 가까이 기울었다. 그는 몸에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기를 완전히 포기했고, 그저 자신을 완전히 상황에 내맡기기로 작정했다. 소녀가 소년에게 입술을 맞대었다. 따뜻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곧장 천국으로 올라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쾅!


누군가가 교실 문을 확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건우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정체 모를 한 사람이 교실에 들어와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 사람 형태를 한 누군가였다. 하지만 형체를 도저히 판별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그림자가 흐물흐물 거리며 떡 하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웅웅웅


그가 들어오자 주위에서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건우는 그제야 무언가 수상함을 감지했다.


"건우야." 지수가 속삭였다.


건우가 시선을 지수에게로 옮기자 그녀는 곧바로 그에게 또다시 입술을 맞대었다.


웅웅 웅웅


그러자 소음은 더욱 거세게 현실의 경계를 울렸다. 지수와 닿은 입술의 촉각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몸을 틀어보려 해도 힘을 전혀 낼 수가 없었다. 감각이 외부로 떨어져 나간 시체가 된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려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 어어!"


눈을 뜨고 보니 익숙한 방 안이었다.



eunduu_deep_midnight_sky_wispy_and_ethereal_clouds_soft_moonl_9fd80956-9732-4281-964b-3a59312154e4_0.png









keyword
이전 10화하늘(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