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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2)

내 편지 내놔!

by 사색가 연두


다음 날 아침, 등굣길 버스 안. 건우는 어젯밤에 꾼 그 찝찝하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던 꿈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두근 뛰어댔다. 꿈속에서의 키스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때문에 건우는 버스를 타는 내내 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문득 밀려오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머리카락과 함께 쓸어 올렸다. 자신이 그런 꿈을 꿨다는 사실에 왠지 오늘은 지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만약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런 별의별 걱정들이 건우의 머릿속을 휘저어 댔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건우는 곧바로 자신의 옆 자리를 향해 시선을 꽂았다. 하지만 지수의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학교에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건우는 다행이다 싶은 마음과 함께 왠지 아쉬운 감정마저 들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가방 속에서 책을 꺼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다.


툭-


"안녕!"


책을 읽고 있던 건우에게 지수가 불쑥 어깨를 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건우는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들켜버린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데미안 읽고 있네? 그 책 되게 어렵던데. 아 맞다, 너 작가가 꿈이랬나?"


"응."


"그럼 그 책의 내용도 다 이해할 수 있어? 나도 소설 좋아하거든. 근데 고전은 너무 어려워서 손을 못 대겠어."


"글쎄. 사실 이해하려 드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싶어."


"무슨 뜻이야?"


"음... 뭐랄까. 어제 네가 사람은 이름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고 말했었잖아."


"응."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하나의 소설은 그 소설을 구성하는 문장들로만 규정할 수가 없어. 이름이 그 사람의 문을 여는 열쇠이듯이 소설을 구성하는 언어 또한 그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일 뿐인 거지. 그러니까 사랑도 하기 전에 인간을 이해하려 드는 것과 같이 작가를 사랑하기 전에 소설을 이해하려 드는 건 부질없는 짓이야."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네."


"딱 그거야."


이내 지수는 자리에 앉아 몸을 숙여 가방을 뒤적거렸다.


"자."


"응?"


"먹어. 초콜릿이야."


그때,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이 초콜릿을 건네주는 그녀의 모습을 환하게 비추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마치 화보를 찍기 위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조명을 비추는 것 같았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기가 막힌 구도 앞에서, 그는 또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실존할 줄이야.'


"혹시 초콜릿 별로 안 좋아해?" 굼뜬 채로 얼어붙은 소년을 보고서 소녀가 물었다.


"어? 아... 아니 잘 먹을게. 고마워."


그날, 초콜릿을 받은 소년은 다짐했다. 그 작은 포장지에 담긴 달콤한 맛보다도, 건네받는 순간 닿은 그녀의 손길과 눈가에 비친 수줍은 빛이 그의 가슴을 강하게 두드렸다. 손끝에 남은 따스한 온기가 자꾸만 지워지지 않았다. 언젠가 나 또한 그녀에게 이 두근거림을 온전히 전해주리. 그러나 그에게 사랑의 고백이란 아직 하나의 거대한 알껍질과도 같았다. 말을 꺼내기엔 언제나 부족한 용기와 두려움이 앞섰다. 결국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오월의 첫날까지 지나가 버렸고, 그날 아침 그는 뜻밖의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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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다다-!


"어어...!"


우당탕탕!!!


"아으..."


건우는 영문도 모른 채 길바닥에 쓰러졌다. 생각에 잠겨 걷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학교 후문 쪽으로 가는 골목틈 사이였다. 그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건우를 상대방이 그대로 들이받아버린 것이다.


"어떻게,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어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우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앞에는 운동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보었다. 보아하니 탁구부 학생인 듯했다. 여자애치곤 체격이 꽤 다부진 편이었다. 그는 자연스레 화가 가라앉았다. 그러고서 괜찮다고 말하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바지를 툴툴 털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어딘가 허전했다. 분명히 들고 있었어야 했다. 건우는 허겁지겁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편지 봉투가 사라진 것이다. 어젯밤 지수를 생각하며 밤을 지새워가면서까지 고민해서 쓴 편지였다.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해댔던지, 이번에는 기필코 건네주리라 다짐까지 했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어떻게 어디로 튄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골목 담벼락 위에 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그 고양이는 무언가를 입에 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맞았다. 베이지색 배경에 작은 하트모양이 가득한, 그가 들고 있던 편지 봉투였다.


"자자, 착하지. 그거 내 거니까 곱게 돌려줘." 건우가 슬금슬금 그 고양이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가 가까이 갈수록 녀석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야옹!"


그러자 녀석은 편지를 문채로 고함을 질러댔고 이내 등을 돌리곤 재빨리 달아나버렸다.


"야 거기서!" 건우가 소리치며 쫓아갔다.


하지만 고양이를 잡는다는 건 역시 무리였다. 아무리 쫓아가도 거리는 벌어지기만 할 뿐, 좀처럼 손에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건우는 결국 지쳐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로 앞에 어느 여학생이 서 있는 듯했지만 그런 건 지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니자니 옆구리 통증과 함께 빈혈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헉... 헉... 아 미치겠네. 저거 뭐야 도대체?"


어느새 고양이는 건물을 넘어 모습을 완전히 감추었다. 그와 함께 편지를 건네주리라는 건우의 다짐 또한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사실 기회야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건우도 충분히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지수 앞에만 서면 부끄럽기도 했고, 좀처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또한 주변의 시선들도 두려웠다. 지수는 학교 내에서 꽤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성격도 좋고, 공부도 나름 잘했고, 학급 내 부반장이기도 했다. 반면 건우는 조용하고, 친구도 별로 없고, 공부도 그다지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너무도 다른 둘의 세상, 그 간극이 건우에겐 시간이 갈수록 멀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골목길 주변은 등교하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건우는 그제야 부끄러움과 함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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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들어서자 오늘은 지수가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엔 한 권의 책이 쥐어져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건우는 조용히 옆 자리에 앉아 그녀가 책을 읽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아름다웠다. 그는 여러 번 의심하기도 했다. 자신이 콩깍지가 씌워진 게 아닐까 하는. 하지만 이제 와서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확실한 건 그녀를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안녕." 건우가 용기 내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마 먼저 인사를 건넨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리라.


"안녕!" 지수가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데미안 읽고 있네?" 건우가 살며시 물었다.


"응! 나도 사실 여러 번 도전했던 책이었거든. 물론 매번 실패했지만. 그런데 이번엔 정말 끝까지 읽어보려고."


"혹시라도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도 좋아."


"네가 저번에 말했듯이 너무 알려고 들지 않기로 했어."


"좋네."


...


"그런데 말이야. 혹시..."


"왜?"


"아, 아무것도 아니야!"


지수는 고개를 한 번 갸우뚱거리곤 다시 책 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건우는 고개를 숙이곤 표정을 찡그리면서 허벅지를 꼭 꼬집었다. 방금 전 자신의 모습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졌다. 말 한마디의 무게조차도 왜 이리 무거운 건지, 매번 이런 식으로 끝맺음을 내는 그였다. 상상 속으로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스토리를 구상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둘러싸인 알 껍질은 아직까지도 두껍기만 했다. 학교 마치고 뭐 하냐는 이 간단한 질문조차도 그에겐 필요 이상의 의미가 담긴 말이 되고 만 것이다. 하루 종일 지수 생각으로만 가득 찬 지는 오래였고, 지수가 뱉은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은유를 대어보며 해석을 하고 있는 그였다.


"야!"


그때, 누군가가 건우를 부르며 등을 툭툭 쳐댔다.


건우는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태준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입학 후에 거의 유일하게 친해진 건우의 친구였다. 첫날에 했던 자기소개시간 이후, 쉬는 시간에 태준이가 먼저 그에게 다가와 줬다. 알고 보니 그 또한 책을 좋아하고 작가가 되고 싶다는 공통사가 있었다. 그래서 둘은 비교적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매점 갈래? 나 배고파." 태준이가 말했다.


"나 귀찮은데."


"나 아침밥 안 먹었어. 빨리 와. 초코우유 사줄게."


건우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아침부터 정신 사나운 일을 당해 안 그래도 기분이 꿀꿀했는데 초코우유 정도면 나쁘지 않은 딜이었다.


"야 근데 너 걔 좋아하지?" 태준이가 매점 가는 도중에 뜬금없이 물었다.


"응? 어? 뭐가." 건우는 순간 당황했다.


"니 옆에 한지수 있잖아. 너 걔 좋아하지? 그렇지?"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촉이 좋거든요. 딱 보니 맞는 것 같은데? 내 눈은 못 속여."


"이상한 소리 할 거면 그냥 혼자 가."


"아니 아니. 장난이야 장난."


식은땀이 건우의 겨드랑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방심한 사이 심장에 허를 찌르는 화살이 관통한 것만 같았다.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눈치를 챈 걸까. 건우는 혹시나 자신이 지금 너무 티를 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만약... 지수도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건우는 갑작스레 태준이의 팔을 붙잡았다.


"왜?" 태준이가 놀라 물었다.


"야. 나 혹시... 너무 티 나냐?" 건우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




"너 항상 보면 걔만 쳐다보고 있더라."


"하..."


"뭐 고백이라도 하게?"


매점에서 먹을 것을 챙긴 건우와 태준이는 교실로 오르던 길, 계단 한쪽에 서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야. 걔가 혹시 알고 있는 거 아니겠지? 내가 자기 좋아하는 거." 건우가 초조하게 물었다.


"글쎄, 근데 걔 입장에선 좀 애매하긴 해. 네가 확실히 호감을 표시한 적은 없잖아? 이게 제삼자의 눈에는 분명히 드러나는 기류가 정작 그 안에 서 있는 이들에겐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경우가 있거든."


"하... 나 어떡하냐."


"그래서 언제 고백할 건데."


"몰라. 매번 다짐해 봐도 쉽지 않아. 사실 오늘 아침에..."


건우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황당한 일을 태준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다가 지금까지 지수와 있었던 나름의 소소한 교류들도 모두 털어놓았다. 태준이는 꽤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역시 사랑 얘기는 그 어떤 누구의 형태든지 흥미진진한 법이었다.


"물론 편지야 다시 쓰면 되긴 하지만..."


"근데 좀 신기하네. 편지를 물고 도망간 고양이라, 그런데 그 꿈은 진짜... 풋!"


태준이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건우의 시선이 곧장 그를 향했다. 두 눈은 얼어붙은 듯 날카로웠으나 속으로는 심장이 서늘히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입 밖에 낸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엔 태준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야야, 걱정 마. 나 입 무거워." 태준이가 건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띵동~ 띵동~


그때 1교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이야기에 몰입한 채 시간을 깜빡 잊고 있었던 둘은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곧바로 교실로 달려갔다. 교실에 들어서자 건우의 눈엔 또 지수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데미안>을 몰입해서 읽고 있었다. 그러자 곧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1교시는 국어, 즉 담임 선생님의 수업 시간이었다.


"자~ 수업 시작이다 얘들아. 일어나라 자지 말고." 그가 큰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으며 들어왔다.


그의 수업방식은 조금 독특했다. 대부분의 학교 수업이라면 그저 앉아서 교과서를 펴고, 교사들의 필기를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수업에서의 학생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도모했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작품을 이해하도록 했다. 사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건우는 그의 수업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


그는 잠시 침묵을 두고 말을 이었다.


"너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니?"


대답은 조용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이번에 다룰 시는 장석남 시인의 <배를 매며>라는 시야.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상황을 정말 아름답게 그려낸 시지. 그런데 오늘은 이 시를 읊기 전에 앞서 너희들이 시를 한 번 써 볼 시간을 가질 거야. 그것도 사랑이라는 주제로."


학생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랑에 대한 시를 쓰라니...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학생들에게 종이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사랑은 인간의 삶을 채워나가는 궁극적인 행위이자 실천이다. 아마 너네도 고등학생쯤 됐으니 연애든 짝사랑이든 다 해 봤을 거라 생각해. 안 그럴 수가 없거든. 그러니 충분히 써낼 수 있어. 잘 쓸 필요도 없고, 수행평가에도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 부담 없이 마음껏 표현하도록 해. 그리고 앞에 나와서 자신의 시를 낭송하고 싶은 용기 있는 자는 손을 번쩍 들도록."


건우는 종이를 받아 들자마자 옆에 있는 지수를 슬쩍 보았다. 지수는 연필만 두드릴 뿐 글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반면에 건우는 이러한 과제쯤이야 5분도 안 되어 끝낼 수 있었다. 평소에 지수에 관한 글이라면 줄곧 써 왔기 때문이다. 교실은 조용했다. 다른 친구들 또한 펜으로 종이를 두드리며 고민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그 어느 때보다도 수업에 몰입하고 있었다. 화창한 햇빛이 교실을 맑게 물들였다. 그 찰나의 풍경은 건우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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