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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4)

구름 떼가 몰려와도

by 사색가 연두


무슨 뜻인지 모를 말과 함께 서서히 그들에게로 다가오는 정체모를 한 남자. 곧이어 누추하고 독특한 옷가지며 아른거리는 백발이 눈에 띄자, 학교 뒷골목에서 이따금 마주쳤던 그 노숙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오른팔을 반쯤 접어 올리고선 아주 자연스레, 마치 그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은 마치 사신과도 같아 건우와 태준은 멍하니 쳐다만 볼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제 발로 찾아온 손님은 또 굉장히 오랜만이네." 그가 낮은 목소리 톤으로 말했다.


"아저씨 정체가 뭐죠?" 건우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인사도 없이 바로 정체를 묻다니 요새 학교에선 예의범절을 그렇게 가르치나 보지?"


다짜고짜 초면에 '어이~'라며 먼저 불러놓곤 예의를 따지는 적반하장식 태도에 건우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시야는 그가 쓰고 있던 벙거지에 의해 가려져 있었으나, 곧 그는 벙거지를 위로 쓰윽 올리곤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때 푸른빛을 띠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건우는 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다. 마치 신령스러운 무당의 집에 직접 발을 디딘 듯, 공원엔 섬뜩하면서도 묘한 설렘이 일렁였다. 건우는 정말로 그가 이곳의 신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엔 무슨 볼 일이 있어 찾아왔지?"


그는 그들이 타고 있던 그네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말했다.


"야, 네가 오자 했잖아.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답답한 마음에 건우가 태준에게 소리치며 말했다. 하지만 그넷줄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태준은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진짜였어." 태준이가 혼이 완전히 나간 투로 말했다. 하는 수 없이 건우는 그네에서 태준이를 끌고 내려왔다.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그렇게 건우가 태준이와 함께 빠져나갈 채비를 하자 그가 외투 속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이거. 키치 거지?"


건우는 깜짝 놀랐다. 그의 손엔 편지 봉투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그것도 노란 베이지색 배경에 작은 하트모양이 가득한... 자신이 지수에게 건네주려고 쓴 편지가 든 봉투였다. 건우는 그게 왜 아저씨 손에 있냐고 물었지만, 그는 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건우가 손을 뻗어 편지를 잡으려는 순간, 노숙자는 재빠르게 팔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는 곧바로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였다. 그러자 편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난치지 마시고, 그거 이리 주세요."


"너 혹시 좋아하는 애 있니?"


건우는 순간 뜨끔했다. 발끝부터 시작해 차오르는 수치심이 그의 얼굴을 붉게 만들었다.


"야 건우야." 태준이가 불쑥 건우의 팔을 잡으며 뜬금없이 말했다.


"이건 기회야. 이 분은 진짜 소원을 들어주는 요괴가 맞아."


경멸. 건우는 눈알을 뒤집은 채 한숨을 쉬었다. 저런 애가 어떻게 지금껏 연애를 숱하게 해 왔는지 그저 기이할 따름이었다. 도무지 곱씹어 보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젊고 어린 여자들이 이런 허풍 가득한 남자들에게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하기가 싫었다.


"하하. 소원을 들어주는 요괴라... 아쉽게도 소원을 들어줄 순 없어. 대신 고민은 들어주지."


"그러니까 제 고민을 왜 아무것도 모르는 아저씨한테 털어놔야 하냐고요. 잠깐만... 그런데 그 편지가 제 거라는 건 또 어떻게 아신 거죠?"


"이봐, 키치."


그는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건우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네 안에 무언가가 계속 소리치고 있잖아."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건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푸른빛을 머금은 보석 같은 눈동자는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그 순간엔 마치 시간이 멎은 듯, 벌레 우는 소리와 달빛이 비치는 은은한 경계 안에서 공원은 도시의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공원이라는 무대 위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반면 그의 손길에는 인간적인 따스한 온기가 있었다. 그 온기는 가슴 한가운데서부터 서서히 퍼져나가 건우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걱정 마. 키치가 쓴 편지는 절대 읽지 않았어. 그것만은 분명히 말해두지. 다만 누가 봐도 러브레터처럼 생겼잖아."


건우는 그의 말을 딱히 부정할 수 없었다. 아마 다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그는 외투 속에서 편지봉투를 꺼내어 건우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잔잔한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들려줄래? 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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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는 그간에 품고 있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태준이에게도 이만큼이나 자세히 말해 준 적은 없었기에 둘은 건우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건우가 워낙 말주변이 없는지라 중간중간 이야기 흐름이 늘어지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남의 사랑 이야기만큼 재밌는 게 어딨으랴. 건우는 그에게 완전히 경계심을 푼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계속 이야기하다 보니 그의 반응이 재밌어 저도 모르게 친밀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야기를 듣는 그의 모습은 같은 또래 남자 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고민이라는 거지?" 노숙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건우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


"그렇죠."


"이거 이거, 너무 재밌는데?"


"전 나름 진지하다고요."


"선생님. 이 친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태준이가 그에게 물었다.


"아주 좋은 선물이 하나 있지."


그는 외투 속에 손을 짚어 넣고서 무언가를 주섬주섬거렸다. 그러자 이내 천주머니 하나와 오래된 공책 하나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도대체 저 옷 속엔 뭐가 그렇게 많이 들어있는 걸까, 건우는 그가 문득 신기하면서도 궁금해졌다.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그가 요괴는커녕 영락없는 인간임엔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다른 세상에서 온 듯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자 받아." 그는 천주머니 하나와 공책 하나를 건우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특별히 나와 마주친 키치들에게만 주는 선물이야."


건우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받아 들었다. 먼저 천주머니부터 풀었다. 그러자 천주머니 안에는 낡고 바랜 손거울 하나가 들어 있었다. 공책도 문구점 같은 곳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오래된 양장 노트였다. 공책을 한 번 스르륵 넘겨보자 헌 종이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이걸 왜 주는 거예요?"


"너 글 쓴다고 했지?"


"네."


"그럼 나름 사유하는 시간이 많았을 텐데,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해?"


"사실 잘 모르겠어요.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가도 알 것도 같은."


"맞아. 우리는 정말 알게 모르게 수많은 모순으로 뒤덮여 있어. 그럼에도 일순간 너 자신을 진정으로 마주할 때가 가끔씩 오곤 하지. 이 노트엔 오늘 하루 네가 느꼈던 감정을 하나하나씩 꺼내어 보는 거야. 그리고 거울을 보면 찰나의 순간에 너의 다양한 얼굴들이 보일 거고, 그때 한 번 솔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도록 해 봐. 물론 말처럼 쉽진 않겠지만."


"이거... 굉장히 심오하네요." 태준이가 불쑥 끼어들며 건우의 손에 쥐어져 있던 거울을 낚아챘다. 그러고 자신의 얼굴을 그 거울을 통해 샅샅이 살펴보았다.


"근데 제 건 없어요?"


"다음에 오면 키치도 줄게."


"근데 왜 저희를 키치라 부르는 거죠?"


"음... 저 달이 보여?"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달은 구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이곳에 온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건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오늘은 달이 얼굴을 숨겼어. 네가 그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져 얼굴을 감추는 것과 같이. 그런데 실은 우리 모두 자신의 얼굴을 어느 정도 숨기면서 살아가. 어쩔 수 없잖아? 알다가도 모르겠고, 모르겠다가도 알 것도 같은. 그래서 키치일 수밖에 없는 거야. 너희도, 나도."


그는 잠깐의 침묵을 두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솔직한 내 얼굴을 언제나 숨기면서만은 살 순 없어. 왜냐면 삶은 언젠간 끝이 오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선택은 그 누구도 아닌 너한테 달려있지. 그러니까 후회라는 건 사실 그리 무서운 것이 못 돼. 사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는 과거를 채우는 수많은 장면들이 될 테니까. 물론 난 너의 고민을 직접 해결해 줄 순 없어. 어떠한 충고나 조언을 해준들 그건 너만 갖고 있는 경험이니까 현명한 것들이 될 수 없지. 쉽지 않은 거 알아. 무엇이든 마음먹고 하려 할 때면 수많은 구름들이 몰려와 나를 가리게끔 만들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은 또 환하게 얼굴을 비추는 때가 오는 법이거든. 그 찰나를 위해."


건우는 그의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 들었다. 한 마디 한 마디 정성스레 눌러 담으며, 마치 시를 낭송하는 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읊어대는 그가 순간 멋있어 보였다. 내심 말을 청산유수처럼 뽐내는 그를 닮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태준이 또한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푹 빠져 듣고 있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시간 되면 다음에 또 와. 그땐 좀 더 재밌는 이야기를 기대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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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는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생각에 잠겨 오늘 하루를 곱씹었다. 아침 등굣길에는 고양이에게 편지 봉투를 빼앗기는 황당한 일을 겪었고, 국어 시간에는 지수를 향해 쓴 시로 그녀의 칭찬까지 들었다. 물론 지수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고백임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건우에겐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이어 태준이를 따라간 학교 뒷산 공원에서는 정체 모를 노숙자를 마주쳤고, 놀랍게도 그가 건우의 편지 봉투를 들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오늘 하루는 정말 뜻밖의 일들로 가득 차 있단 걸 알았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뒤,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가방을 풀어헤치고 그에게 받았던 양장 노트를 꺼냈다. 그러자 헌 책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 향기는 마치 달콤한 버터 향처럼 콧구멍에 부드럽게 스며들어왔다. 그는 기분 좋게 펜을 하나 집어 들고서는 거침없이 글을 적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소설 속 이야기처럼 믿기기 힘든 일들과, 그리고 애틋한 청소년기의 짝사랑까지.

뭐, 내가 과도한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확실한 건 나는 지금,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

처음엔 조금 의구심이 들긴 했다. 내가 정말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하며.

하지만 하루 종일 온통 그녀 생각뿐인 나를 보며,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밤에 잠들기 전까지, 그 아이가 내 머릿속에서 헤엄친다.

문제는 서로 간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질 않는다.

아직도 그녀와 짝꿍이 된 이래로 수업 시간에 잠깐 이야기 나누는 걸 제외하곤 별다른 진전이 없다.

그 애의 전화번호도 가지고 있다. 어쩌다가 주고받게 되었다.

하지만 있어봤자 뭐 하나... 문자 하나 보내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바보처럼 굴게 되는 걸까.

오늘은 그녀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애에게 말을 뗀 순간... 나는 또 얼어붙고 말았다.

아저씨가 했던 말처럼,

내가 무언가를 마음먹고 하게 될 때면 떼구름이 몰려와 나의 얼굴을 흐리게 만든다.

가끔 내가 지나치게 무겁게만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그녀에게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는 건, 그것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이 있어서 일까?

태준이를 보면 꼭 이게 정답은 아닌 것 같다는, 그런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물론 그 녀석도 나름의 고민을 들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애와 가까워질 방법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니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뭐가 문제이고, 뭐가 해결책인지를.



건우는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글을 적고 보니, 사실 문제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문제들이 밀려오지만, 정작 그 해답은 대부분 이미 스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언제나 두려울 뿐이고, 그래서 용기란 언제나 필요로 하는 법이기에 어렵게 느껴질 뿐이었다. 건우 또한 그걸 알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고백한다 해도 결과가 반드시 좋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걸. 그 결과가 두렵다는 걸.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 그녀의 세계를 품고 싶다는 욕망은 결코 죄악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무서운 건,


시간은 언제나 흐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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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 뒤, 학교를 마친 건우는 고민 끝에 뒷산에 있는 공원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간 공원에 갈지 말지 수많은 고민의 과정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지수만 보면 좀처럼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고, 거울도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 실천과 행동은 마음먹기와는 아예 다른 영역이었다.


태준이는 주말 동안 그곳에 한 번 가본 듯했다. 어느새 그도 똑같은 거울과 공책을 가지고 있더랬다.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심지어 그는 이번에 새로운 여자친구도 생겼다.


"그냥... 이번에 알게 된 앤 데 괜찮아. 착하고, 성실하고, 뭐, 외모는 그다지 이상형까진 아니지만... 사실 이상형이란 것 자체가 크게 의미가 없는 거거든. 사람한테서 이상을 바라는 건 되려 그 상대방에게 실례인 법이야. 그래서 이번엔 나름 외면보단 내면을 보고 사귀어 보기로 했어. 물론 내면이란 것 자체가 오로지 믿음으로만 이뤄지는 거기에 언제든지 깨질 수도 있는 거지만."


"넌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생각하고 만나냐?"


"영원을 꿈꾸는 게 그렇게 낭만적인 건진 난 잘 모르겠더라고."


하여튼 희한한 구석이 있는 애였다. 동시에 약간 걱정이 일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태준이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살림을 꾸린다는 일이 상상이 되질 않았다. 물론 쓸데없는 오지랖이라 직접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어쨌든 건우는 곧바로 뒷산에 도착해 공원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오늘은 태준이가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이유로 빠지게 되어 건우는 홀로 공원까지 가야만 했다. 이곳의 입구는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뒤, 망설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날이 어두워지면 더욱 가기 싫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끼익- 끼익-


조심스레 계단을 밟고 올라선 건우는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살폈다. 계단 양 옆으론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어,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건우는 걸음의 속도를 조금 올렸다. 그때였다.


"저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려보니 어느 여학생 한 명이 계단 위에 서 있었다. 건우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안녕?"


누군지 모를 한 여학생이 아주 자연스레 인사를 건네며 건우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언뜻 교복을 보고선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걸 눈치챘다. 색이 많이 바래진 것 같긴 했어도, 어쨌든 그녀도 금호고 학생이란 사실에 건우는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너 신입생이구나. 귀여워!"


"네?"


명찰을 확인해 보니 그녀는 고등학교 삼 학년인 학교 선배였다. 이름은 '서해원'이라 쓰여 있었다.


"저번에도 어떤 일학년 남자애를 봤었는데 이번엔 못 보던 얼굴이네?"


건우는 그 남학생이 태준이를 말하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혹시 누구세요?"


"나? 사랑하는 선생님의 제자라고 해 둘까?"


애매모호한 그녀의 답변에도 건우는 왠지 더 캐묻고 싶지 않았다.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그녀의 심보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선생님 요새 학생들이 많아져서 기분 좋으시겠네. 너도 이번이 처음은 아닐 거 아니야. 그치?"


"선생님이라면, 혹시 그 노숙자 아저씨를 말하는 건가요?"


그 순간, 그녀의 얼굴엔 장난스럽던 입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공은 차갑게 내려앉은 유리알처럼 굳어졌다. 건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숨조차 삼키기 힘든 침묵이 길게 늘어지자, 건우는 발걸음을 돌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날 채비를 했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어둠을 파고 들었다.


"우리 선생님 잘 부탁해. 겉으론 유해보이고 여유로운 사람처럼 보여도 실은 불쌍한 사람이니까. 물론 너에게 어떠한 책임을 지려는 건 아니야. 그냥...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여도 좋은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녀의 목소리엔 여름 한가운데서도 서리가 피어오를 듯한 한기가 배어 있었다. 건우는 무슨 말을 내놓아야 할지 알 수 없어 입술만 달싹이며 서 있었다. 그때 그녀가 먼저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네더니, 곧바로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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