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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구(1)

특이한 선생님이 나타났다!

by 사색가 연두

지금으로부터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금호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사랑하는 여자아이도 있었고 존경하는 스승님도 계셨다. 그 시절은 대한민국 전체가 학구열에 들끓던 때였다. 모두가 대학을 향해 달려가던 그 열기 속에서, 타인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냉혹한 질서가 우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 질서는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회의 이치였다.


살아가는 방법이란 게 따로 있을까. 나는 정답을 몰랐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세상은 넓고, 인생은 짧다. 언뜻 뻔하고 식상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것만큼 곱씹을수록 인생을 가장 정확히 표현해 주는 말은 없었다. 이 말은 내 안의 모든 부조리한 감정에 작은 용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세상엔 정해진 정답이 없음을 알고 오히려 허무해지기보단 편안해졌으며, 굳이 들어도 되지 않을 짐들을 많이 덜어 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어찌 내 바람대로만 흘러가던가. 틈만 나면 언제나 시련을 주기 마련이고, 그렇게 버티지 못하고 떠난 사랑이...


나는 아직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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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서해원. 네가 왜 여기 있냐?"


"어? 뭐야."


"아, 이런 애랑 또 같은 반이야? 올해도 고생길이 훤하다, 훤해. 신은 어찌 나에게 이런 시련만 주시는지."


그러자 해원은 승구의 뒤통수를 탁 쳤다. 승구는 바로 눈알을 부라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녀를 당해낼 순 없었다. 사실 승구는 해원을 좋아하고 있었고, 내심 이번에도 같은 반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대들고 난리야. 난 뭐 좋은 줄 아냐? 아으~ 귀찮아." 해원이 투정을 부렸다.


"됐고. 이거나 먹어라." 승구는 괜히 캐러멜 하나를 툭 던지며 말했다.


올해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온 둘은 작년에도 같은 반이었다. 해원은 처음엔 승구에게 든든한 멘토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말과 웃음, 그리고 사소한 배려 하나하나가 그의 마음속에 작은 싹처럼 트더니 결국 감정이라는 꽃으로 자라났다. 이외에도 둘은 유독 접점이 많았는데, 물론 그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었다. 승구가 의도적으로 그녀와 접점을 만들고자 애쓴 결과이기도 했다. 공부도 딱히 성실히 하지 않았던 그가 그녀와 같은 학원에 등록하기도 했고, 심지어 같은 동아리에도 지원하는 등 어떻게든 만남을 늘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그였다. 다만 문제는, 정작 해원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승구는 아직까지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승구는 자연스레 해원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승구가 건네준 캐러멜을 입에 물고 있었다. 승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몰래 미소를 감췄다.


쾅!


"안녕~!"


그때, 누군가 교실 문을 활짝 열며 환하게 인사하고 들어왔다. 그런데 들어온 사람의 생김새가 심상치 않았다. 하얀 백발에 빈티지한 옷차림,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그의 푸른 눈동자였다. 처음엔 외부에서 초청해 온 강사인 줄 알았다. 전혀 교사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행색이었다. 그런 그의 독특한 외모 때문인지, 승구를 포함한 교실 안 모든 학생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이번에 너희 2학년 3반의 담임을 맡게 된 사람이야. 이 학교엔 올해 처음 부임받게 된 선생님이니 잘 부탁해."


그는 교실 전체를 쓱 훑어보았다. 그가 교탁에 서 있는 모습은 어쩐지 위화감마저 들었다. 눈을 한시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미 공간의 공기를 사로잡는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승구는 옆에 앉아있던 해원이를 슬쩍 훔쳐보았다. 그녀는 완전히 그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승구는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도 저 사람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날아온 드라마 속 주인공 같았다.


"내가 좀 특이하게 생겼지?"


그의 물음엔 정적만이 대답이었다. 그러자 그는 이내 분필을 쥐고 칠판에다 글씨를 적었다. '이기찬'. 그의 이름이었다.


"선생님 이름은 이기찬이라고 한다. 보다시피 난 백색증이라는 희귀 질환을 안고 태어났어. 머리가 하얗고, 눈 색깔도 파랗지. 그리고 햇빛을 받으면 쉽게 화상을 입기 때문에 낮엔 돌아다니기가 조금 힘들어. 아이러니하게도 기찬이란 이름은 빛나는 근본, 찬란한 빛을 발하는 바탕이라는 의미로 지어졌는데 말이야. 이름과는 다르게 나는 햇살에 가장 연약하고, 세상의 시선에 매번 물러서기 바빴지."


그는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희들 앞에 이렇게 당당히 서 있잖아? 그러니 세상이 말하는 정상의 범주란 사실 허상에 불과해. 사람은 결국 저마다 모두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거든. 나는 그렇게 햇빛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처럼 너희에게 빛을 나누어 주고 싶은 바람이 있다. 너네도 잘 따라와 줄 수 있겠지?"


"네~." 교실 안 학생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솔직히 다른 교사가 했다면 오글거렸을 말들이었지만, 그의 입에서는 이상하게도 한 편의 시처럼 흘러나오는 듯했다. 승구는 그런 그가 멋있어 보였다. 누군가를 닮고 싶다는 마음, 그것은 승구가 지금껏 살아오며 처음 느껴보는 오묘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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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번 담임 어떤 것 같냐?" 승구가 물었다.


"진짜 좋아! 엄청 멋있지 않냐?"


둘은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승구가 건넨 질문에 해원의 반응은 예상대로 역시나 최고였다. 승구는 또 괜한 질투심이 마음에 일었다.


"글쎼 난 별로. 조금 싸하단 말이지."


"엥? 뭐가?"


"그냥 있어. 약간 사짜 같은 기질이 보여. 여자들은 잘 몰라."


사실 승구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해원의 반응을 보니, 왠지 그를 좋아하기가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너 자꾸 남자들의 그런 번지르르한 멘트에 속아 넘어가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이고~ 너나 잘 해세요. 잔소리가 아주 우리 아빠 납셨네." 해원이 비꼬듯 말했다.


"야, 선생님이 우릴 속여서 뭐 하냐?"


"혹시 모르잖아. 학생들 홀려가지고 막 뭐... 어떻게 한다던지."


"소설 쓰고 앉았네. 솔직히 말하면 너도 멋있다고 생각했지? 그렇지?"


"뭐, 뭔 소리야. 그렇게 말 많은 남잔 같은 남자가 보기엔 별로야."


"너만 할까요. 쯧쯧... 야, 생각을 해 봐. 담당 과목이 국어에다 말은 어찌 그렇게 이쁘게 잘하시는지, 외모는 또 어디 다른 별에서 온 사람 같잖아. 완전 드라마야. 여자들이 안 좋아할 수가 있겠냐고."


"그러니까 문제라고.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겠냐고. 너 선생님 좋아하냐?"


"응!"


승구는 당황했다. 해원이 정말 진심으로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난 이제 그만 간다." 해원이 말했다. 둘은 어느새 집으로 가는 길로 방향을 나누어야만 했다. 승구는 이대로 헤어지긴 찝찝했다.


"뭐라도 같이 먹고 가."


"아냐. 또 엄마, 아빠 잔소리 듣기 싫어. 요새 더 심해져서 진짜로 버티기 힘들다고."


해원이는 엄격한 집안의 장녀였다. 부모는 성적에 대한 욕심이 유별히 강했지만, 해원의 성적은 언제나 그들의 기대에 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늘 압박에 시달렸고, 때로는 승구 앞에서조차 눈물을 터뜨린 적도 두어 번 있었다. 승구는 그런 해원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쉽게 붙잡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의 부모는 해원이 자신과 같은 남자아이와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아주 질색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곤 했다. 저런 공부도 안 하는 양아치 같은 남자애와는 절대 어울리지 말라는 그녀 어머니의 말을, 승구는 본의 아니게 듣고만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원을 좋아하기 전까지의 승구는 허구한 날 싸움질만 일삼았고 연필에는 손도 대지 않던 아이였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시작했다. 해원이 다니는 학원에 등록한 것도, 물론 그녀를 좋아해서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동시에 그녀의 부모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자격을 얻고 싶던 그였다.


그러나 뒤늦게 붙잡은 연필은 무겁기만 했고, 이미 달려가고 있는 또래들을 따라잡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랐다. 학원에서도 수준이 달라 해원과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게 될 순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렇게 집으로 가는 길에 둘이서 같이 걷게 된 것만으로도 그는 족했다.


"잘 가."


승구는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다. 해원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응답하더니 곧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승구는 그녀의 뒷모습을 말없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녀는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승구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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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정말 밝고, 명량한 아이다. 언제나 먼저 손을 건네주고, 편견 없이 다가가 주는 아이. 항상 밝은 얼굴로 분위기를 밝혀주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아이. 승구는 그런 해원이의 모습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작년 처음 해원이와 짝꿍을 맺었을 때, 공부도 안 하고 허구한 날 사고만 치던 자신에게 해원이는 멘토가 되어주었다. 물론 당시 담임교사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불평 하나 없이 승구의 숙제를 도와주기도 했고 필요한 정보도 곧잘 알려주었다. 덕분에 승구는 학교 생활에 점차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 연필을 쥐기 시작했다. 해원이는 그런 영향력을 줄줄 아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그림자가 있었다. 승구는 해원이와 친해지면서 점차 그녀의 고민과 근심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요즘 들어 그에게 하소연을 늘어놓는 일이 잦아졌다. 그녀의 부모님은 늘 해원의 성적표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의대에 진학한 자신의 친언니와 비교하기 일쑤였다. 매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의 언니와는 다르게 해원의 성적은 최상위권으로 가기엔 턱 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높아진 기준에 대응하기란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승구가 보기엔 충분히 좋은 성적임에도 만족의 관점은 누구냐에 따라 다른 법이었다. 그녀에게 잘했다느니 하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될 수 없었다.


"파이팅!"


오늘은 3월 모의고사가 있는 날, 승구는 해원이를 향해 작은 응원을 보냈다. 그녀는 많이 긴장한 듯 보였다. 승구는 진심으로 그녀가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랐다. 그리고 승구 자신도 이번엔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기를 기대했다. 나름 겨울 방학 때 열심히 공부한 그였다.


띵동~ 띵동~


마지막 탐구 과목을 마치고 난 뒤, 승구는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는 생각에 개운하게 기지개를 켰다. 다만 속으론 이번에도 역시나 결과를 기대하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해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왠지 그녀의 표정이 좋지 못해 보였다.


"자~ 다들 오늘 시험 치느라 수고 많았어! 내일 국어시간 때 필요한 것들 뭔지 다들 알지? 준비물 잘 챙겨 오고, 그리고 반장인 해원이도 애들한테 잘 공지해 주고. 그럼 다들 집으로 빨리 가서 쉬어!"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승구는 곧장 해원에게로 다가갔다.


"가자."


"응..."


역시나 예상대로 그녀의 기분은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시험을 잘 보지 못한 듯했다.


"야, 아직 결과도 안 나왔어. 벌써 왜 그래." 승구가 걱정스레 말했다.


"못 푼 문제가 한 두 문제가 아니었어. 나 어떡해?" 해원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툭 건들면 바로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그런 울상을 짓는 해원을 보자 승구는 괜히 마음이 먹먹해졌다. 점점 웃음기가 없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일어나. 맛있는 거 사줄게."


그렇게 둘은 학교 근처 떡볶이 집으로 향했다. 떡볶이는 해원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오늘은 시험 치는 날이라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됐기에, 둘은 여유롭게 시간을 두고 먹을 수 있었다.


"하..."


"왜 자꾸 한숨 쉬어. 부모님 때문에?"


"응."


승구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어떤 위로도 해원에겐 귀에 닿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 이번에도 성적이 잘 안 나오면 학원 끊고 과외받아야 할 수도 있어."


승구는 떡볶이를 먹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학원에 다니지 않을 경우, 학원을 마치고 단둘이 걸을 수 있던 그 소중한 시간이 없어질 것이었다. 그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잘 나올 거야. 그러니까 일단 먹어." 승구가 떡볶이를 씹으며 말했다.


"너는 좋아?"


"뭐가?"


"내가 학원 끊으면 넌 좋냐고."


"싫어."


승구는 해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동공이 떨고 있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지금 많이 먹어 두라고. 과외받으면 내가 옆에 있어줄 수가 없잖아. 그리고 원래 감이 좋지 않았던 시험이 의외로 결과는 또 잘 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러니까 난 걱정 안 해."


"너라도 옆에 있어서 다행이야."


"너는 근데 왜 친구가 많은 것 같으면서도 별로 없냐?"


"항상 부모님에게 끌려 다녔거든. 중학교 때까진 학교 마치자마자 바로 데리러 와선 학원에 보내셨어. 그런데 고등학교 올라오고 나서 두 분 다 일이 더 바빠지셔서 난 오히려 좋아. 조금은 숨통이 트이거든. 어찌 됐든 나는 딱히 친구들이랑 제대로 놀아본 적도 없고, 별 그렇다 할 추억도 많이 없어. 그런데도 성적이 이 모양이니 그냥 자괴감만 들고..."


"상위권이면 잘하는 거지 뭐 이리 욕심이 많아."


"최상위권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야."


"이래서 문제야 문제. 사람들은 오로지 같은 곳만 바라보고선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인생 패배자니 뭐니 그런 소리만 해대니까 문제라고."


"너는 딱히 걱정되는 게 없냐?"


"그냥 태어난 김에 살아가는 거지. 인생 뭐 있어?"


"너의 그런 마인드가 부럽다."


"너 오늘 집에 언제까지 들어가야 되는데."


"몰라. 들어가기 싫어."


"그럼 공원이나 가자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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