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좋아해.
건우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에 도착했다. 가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벤치에 앉아 노을을 구경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건우는 문득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왜 항상 저 옷차림으로 다니는지, 노숙자가 맞는지, 집은 있는지, 왜 공원에서만 나타나는 건지 등. 하지만 왠지 섣불리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저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어울리기도 했고, 차라리 인간을 알려고 드는 것보단 되려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많았다. 건우는 가볍게 숨을 뱉은 뒤, 그에게 다가갔다.
"저, 아저씨."
그가 고개를 젖혀 건우를 쳐다보았다.
"어? 왔구나!"
"시간이 좀 있어서 와 봤어요."
"좋다. 네 얘기 듣고 싶었거든."
그는 연한 미소를 머금고는 자신이 앉아 있던 벤치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리 와서 앉아 봐."
건우는 살며시 벤치에 엉덩이를 기대었다. 그러자 저물어가는 햇빛이 은은하게 그의 눈을 가려왔다. 하늘색과 주황색이 오묘하게 섞여 들어가는 경계선, 사이사이에 껴 있는 분홍빛을 띤 구름, 그 중앙엔 스르르 몸을 땅에 묻어가는 태양이 있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울 풍경이었다.
"노을 보기를 좋아해?"
"몰랐는데 좋아하는 것 같네요."
"아직 용기가 잘 안 나지?"
"네."
"네 감정을 들키는 게 두려울 수도, 고백했을 때의 그 결과가 두려울 수도 있겠지."
그는 두 손을 벤치에 짚고서 어깨를 한껏 뒤로 젖혔다. 건우는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수가 내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건지 아니면 그 고백으로 인해 다가올 후폭풍이 두려운 건지, 자신조차도 제대로 확신이 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어쩌면 지수는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태준이 같은 제삼자가 눈치챌 정도면 어느 정도 티가 나는 부분이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 뒷 이야기는? 아! 글도 보여줄 수 있어? 작가가 될 사람의 글은 어떨지 무지하게 궁금한데."
"그렇게 기대하실 필욘 없어요. 말 그대로 아직은 지망생일 뿐이니까."
건우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선 지퍼를 열곤 공책을 꺼냈다. 근데 막상 보여주려니 부끄러움이 확 몰려왔다. 안 그럴 줄 알았다. 그래도 작가가 되고 싶다면, 적어도 남에게 글을 보여주는 것에 큰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또한 큰 용기 없인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른 달라는 표정으로 건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건우는 찡그리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 대고는 이내 획 하고 그에게 공책을 주었다. 그렇게 공책을 받아 들자마자 그는 페이지를 열어젖히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읽어댔다.
"이게 그렇게나 재밌어요?"
"어."
그는 완전히 몰입한 채로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건우가 실수한 부분이나 주저했던 부분을 읽을 때면 어찌나 탄식을 해대던지, 건우는 괜히 민망스러워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이야~ 너 글 잘 쓰네!" 그가 건우에게 공책을 되돌려주며 말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글을 읽던 그였다. 건우는 자신의 글을 읽는 사람의 반응을 보며 쑥스러우면서도 왠지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요새 거울을 보며 사색하는 글도 좋았어. 자기 자신을 알기란 쉽지 않지?"
"그렇더라고요."
"어쩔 수 없어. 평생 모순이야. 우리는."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해진 건 네가 그 지수란 아이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마음이네."
"그건 확실해요."
"좋아. 그럼 남은 건?"
"실천이죠. 근데 이게 좀처럼 되질 않아요."
건우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는 건우의 어깨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인간관계에서의 타이밍이란 게 참 어려운 거야. 그치?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 보니 조금만 어긋나도 금세 오해가 생기고 멀어지기 십상이잖아.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게 있어. 우리는 애초에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마치 불 꺼진 방에서 코끼리를 더듬는 것과 같지. 그러니 굳이 자로 재려 들 필요는 없어. 결국 그 판단은 오만이나 편견으로 흐르기 마련이니까."
건우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모든 말과 행동에 은유를 갖다 붙여보아도 결국 그 판단은 오로지 자신의 감일 뿐이었다. 그것은 오해가 될 수도, 정해가 될 수도 있었다. 그걸 알 길은 역시 자신의 마음을 지수에게 확실히 표현하는 방법밖엔 없었다.
"해도 결국 저물고 말아. 그런데 결국엔 또다시 뜨잖아? 네 마음도 똑같겠지. 지금은 저물고 있다가도 막상 그 아일 보면 다시 뜰 거 아니야.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그 아이가 너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나는 모르지만 말이야. 네가 가진 사랑은 너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거거든. 슬픔, 기쁨, 분노는 인간이라면 모두 다 느끼지만 그 모양과 형태와 그림은 다 달라. 인간이 기계와 같을 수가 없다는 증거지. 그러니까 그 어떠한 감정이든 모두 다 소중한 거야. 오늘 지는 해는 오늘 밖에 못 보는 거니까."
따악!
까악- 까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산 뒤편에서 까마귀 떼가 요란히 날아오르며 울음을 흘려댔다. 까마귀들은 곧 저무는 태양의 결을 따라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흩어졌다. 건우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풍경이 열리는 언덕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부글거리며 가라앉는 태양의 능선 앞으로 구름이 덮쳐 들어왔다. 빛은 숨겨지고, 순간 공원은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졌다.
그때, 그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탁 내려앉았다. 돌아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그가 곁에 와 서 있었다. 그러자 구름 사이로 금빛 실오라기가 흘러내리듯 빛이 새어 나왔다. 곧 완전히 걷히며 드러난 햇살은 건우의 두 눈 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고백을 향해 내딛지 못하던 발걸음이, 마치 빛을 따라 흔들리듯 마음속에서 조용히 움트고 있었다.
"오늘 지는 해가 사랑스럽네요."
터벅터벅
드르륵-
다음 날 아침이었다. 건우는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지수는 아직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어젯밤, 그녀에게 건넬 편지를 다시 뜯어고쳤다. 오늘은 그녀에게 기필코 전해주리라 다짐했다.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실 창문 밖으로 지수의 얼굴이 스쳐 보였다. 드디어 그녀가 온 것이다. 건우는 많은 생각을 거치지 않기로 했다. 한쪽에선 태준이가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젯밤 같이 전화로 얘기를 나누기도 했기에, 오늘 그의 친구가 어떤 다짐을 하고 있는지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르륵-
이내 그녀가 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야. 한지수!"
"오~"
갑자기 교실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지수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학급 반장인 영훈이란 아이였다. 그는 공부는 물론이고 그림이면 그림, 악기면 악기, 심지어 체육도 잘하는 전형적인 엄친아 기질이 타고난 애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지수를 부르더니 주변 아이들의 호응이 터지고 만 것이다. 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필 뿐이었다.
"잠시 따라와 줄 수 있어?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우오~~!"
건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피가 솟아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지수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건우는 온몸이 떨려왔다. 그는 의자 테두리를 있는 힘껏 꼭 쥐었다. 영훈이를 따라 복도에 나가는 지수의 모습을 쳐다만 볼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갑자기 둘의 분위기를 말리기엔 타이밍이 너무나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눈에서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자, 건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하아...
솔직히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몰래라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둘의 모습을 도저히 눈뜨곤 못 볼 것 같았다. 화가 났다. 건우는 세숫대야에 얼굴을 대고 거침없이 물을 퍼부어댔다. 그때였다.
"이 빙시야."
태준이었다.
"하... 나가."
"야이 친구야. 괜찮아, 아직 확정이 난 건 아니잖아?"
"지수 표정 못 봤냐? 얼굴 빨개져가지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나갔다고!"
"하긴, 김영훈 걔라면 남자가 봐도 아주 열받게 잘나긴 했지. 착하지, 공부 잘하지, 악기 잘 다루지, 축구도 잘하..."
"좀 닥쳐 그냥."
"친구야." 그가 건우의 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근데 여자애들이 보면 은근히 취향이 복잡 미묘하거든. 뭐랄까... 우리같이 얼굴 이쁘고, 몸매 좋고, 뭐 그런 단순한 남자 애들이랑은 좀 달라. 특히 지수같이 명철한 여자애들이 더 그래. 뭔가 모를 그런 독특한 자기만의 포인트가 있어."
"아냐, 이건 가망이 없어."
"물론 영훈이 같은 애들이 보편적으로 인기가 많긴 하지. 근데 그런 애들한테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애들이 진짜 있다니까?"
하지만 태준이의 그 어떤 말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건우는 이미 마음을 접기 직전이었다. 그는 물에 젖은 얼굴을 교복 소매로 대충 닦아내고서 화장실을 나왔다. 태준이는 팔짱을 끼며 그런 그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편으론 저렇게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특별해 보이기도 했다. 질투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일까. 건우는 그렇게 온갖 상념과 함께 가슴이 쓰라려 왔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건우의 시선은 곧장 지수를 향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영훈이 녀석도 별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리에 앉아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과연 지수가 영훈이 녀석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정말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 사이에서 특별한 기류가 감지되지 않자, 건우는 문득 태준이가 아까 화장실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는 거의 놓아버렸던 희미한 가능성을 다시 부여잡았다. 사실 당장에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혹여 실례가 될까 두려워, 건우는 일단 적절한 순간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연기는 단순히 그 인물을 흉내 내는 데 그치지 않아. 나는 그것을 그 인물의 삶을 직접 살아보는 행위라고 생각해. 그래서 배우라는 직업은 가장 덧없는 직업일지도 몰라. 오직 짧은 순간을 위해 삶을 소모해야 하거든. 결국에는 무대 위에서든 밖에서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으니까."
오늘의 마지막 수업은 국어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인 승구는 연극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래저래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건우는 하루 종일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에 도저히 마음이 쉽게 놓이지 않았다.
"그럼 교과서 161페이지에 나온 여러 내용의 스크립트를 짝꿍과 함께 읽어보자."
짝꿍이란 단어에 건우는 곧장 반응했다. 요새 도통 수업 시간 중 지수와 함께 활동하는 일이 없었기에 그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승부수를 던지기에 가장 알맞은 순간일지도 몰랐다.
"연기라... 조금 쑥스러운데. 내가 A를 맡는 게 낫겠지? A가 여자, B가 남자니깐."
"그래. 그게 낫겠다."
건우 또한 쑥스러웠지만, 내용이랄 것 없이 교과서에 짤막하게 실린 두 세줄의 대사뿐이었는지라 크게 부담은 없었다. 둘은 그렇게 어색하게 연기를 이어나갔다. 연기가 끝나자 지수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내가 연극 동아리에 들까 생각했었거든. 근데 지금 보니까 가면 안 될 것 같아."
"갑자기 웬 연극?"
"재밌어 보여서? 그리고 멋있잖아! 이번에 선생님 말씀 듣고 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단 한순간을 살아내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직업이자 가장 명예가 덧없는 직업이 배우라고. 왜~ 배우들 보면 정말 그 인물에 감정이입을 해서 오래도록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잖아. 본인의 삶을 기꺼이 다른 인물에게 내어주는 행위! 얼마나 멋있어!."
지수는 이내 건우에게 물었다.
"너는 혹시 동아리 든 거 없어?"
"난 소설 창작 동아리를 하나 만들까 해. 이 학교엔 아직 그런 동아리가 없더라고."
"우와~ 멋있다! 재밌겠는데? 만약 만들면 나도 들어가도 돼?"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건우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자신이 만들고자 하던 창작 동아리에 지수가 저렇게나 관심을 보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뭐, 관심이 있다면야 안 될 건 없지. 근데 지수야..."
그는 어쩌면 지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응?"
"혹시 오늘 아침에... 그 뭐냐... 무슨 일 있었어? 조금 시끄러워 보이던데."
그러자 마치 둘 사이에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건우 이 말을 뱉은 순간 온갖 생각이 쓰나미같이 몰려왔다. 괜히 물어본 건가 싶었던 찰나, 지수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침묵을 깨었다.
"별 일... 없었는데."
"아... 그렇구나."
"왜?"
"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뭐, 딱히 신경 안 써도 돼. 말하기도 좀 그렇고."
소녀의 애매한 대답은 소년을 더욱 본능에 이끌리도록 만들었다. 결국 건우는 에라 모르겠단 식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혹시 오늘 학교 마치고 시간 되면 같이..."
탁! 탁!
"자자, 주목!"
하지만 담임 선생님이 교탁을 치며 크게 주목을 외치는 바람에 건우는 도중에 말을 끊고 말았다. 정말 저주받은 타이밍이 따로 없었다. 순간, 건우는 마치 온 세상이 자신과 지수의 맺음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불합리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결국 지수의 시선은 자연스레 선생님을 향해갔고, 그렇게 건우 또한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찝찝한 기분을 안은 채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띵동~ 띵동~
하교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 이후로 건우와 지수는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건우는 지수가 자신에게 말을 먼저 걸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잘라먹을 수밖에 없던 그 말에 대해 먼저 물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수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건우는 괜히 기가 죽어, 오늘은 때가 아니라며 그냥 집으로 가려던 순간이었다.
"박건우."
"응?"
"오늘 끝나고 무슨 일 있어?"
지수가 말을 먼저 꺼냈다. 건우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듯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러자 이내 마음을 다 잡았다. 이렇게 다가오는 기회를 더 이상 날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네가 말하다 말았잖아. 학교 마치고 뭐 말하려던 거 아니었어?"
"아니 그냥, 네가 내가 만들 소설 창작 동아리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 같이 운영할 사람을 사실 찾고 있었거든. 그래서 어디 카페 같은 곳에 가서 얘기나 좀 나눌까 해서 말했던 건데..."
"좋아!"
건우는 두 귀를 의심했다. 지수가 이렇게나 흔쾌히 허락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건우는 자연스레 피어나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그때 태준이가 끼어들었다.
"야, 박건우! 오늘은 시간 좀 비는데 뒷산에 갈래?"
"나? 오늘은 안 돼. 약속 있어."
건우의 말을 듣자마자 태준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눈치껏 건우가 지수와 약속을 잡았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거리며 건우의 어깨를 한 번 툭치고는 잘해보라는 듯 윙크를 날렸다.
"아~ 어쩔 수 없이 오늘은 혼자 가야겠네."
"다음에 같이 가."
"짜식. 남자 다 됐네." 태준이가 건우의 귀에다 속삭이며 말했다. 그러자 건우는 빨리 자리에서 빠지라며 손등을 날렸고, 태준이는 알았다는 표정을 짓고서 곧장 교실 문을 나섰다.
"뒷산은 학교 뒷산을 말하는 거야? 거기엔 왜 가?" 그때 지수가 불쑥 튀어나와 말했다.
"가끔 할 거 없을 때 가곤 해. 별 것 아니야."
"거기 되게 무서운 소문이 도는 곳 아니야? 어렸을 적에 한두 번 정도 가 본 적 있었는데, 당시에 어떤 여학생이 자살해서 엄청 난리 났었어. 그 사람이 근데 우리 금호고 학생이었다잖아. 어쨌든 난 그 이후론 한 번도 가 본 적 없어. 그리고 학교 뒤편에 그 노숙자 알지? 요샌 잘 안 보이던데 그 사람이 막 학생들 잡아다가 끌고 간다는 곳이 저곳이잖아."
"글쎄, 나중에 한 번 같이 가 볼래?"
"으~ 난 무서워." 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지수와 건우는 학교 근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카페로 향했다. 혹여나 아는 사람들이 단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게 되면 골치 아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건우는 막상 지수와 단 둘이 카페에 오게 되자, 무슨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곧장 동아리 이야기를 꺼내기엔 너무 서두른 것 같아 보였고, 그렇다고 일상적인 이야기 또한 잘 나누지 않는 성격인지라 여자 아이들의 관심사에 대해선 아는 것 하나 없었다. 심지어 동아리 얘기는 급조해서 만들어낸 핑계에 불과했다.
커피를 시키고 난 뒤, 둘은 테이블에 앉았다. 어색한 기류가 둘을 집어삼켰다. 건우는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애를 썼지만, 테이블 아래 그의 다리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그래서 할 얘긴 뭐야?" 결국 지수가 먼저 말을 던졌다.
"어? 아... 그게... 너는 내가 만들 동아리에 일단 관심이 있다는 거지?"
"응! 있어. 근데 그 동아리를 내가 운영할 수 있을까? 나는 소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글을 잘 쓰지도 않아. 지금껏 한 번도 내가 직접 소설을 써보리라 생각한 적도 없고."
"괜찮아. 나랑 같이하면 문제없어. 어차피 내가 다 할 테니까. 애초에 작은 모임 형식으로 진행할 계획이라 사실 운영이랄 것도 없어."
"그럼 굳이 왜 같이 운영하자는 거야?"
"혼자면 외롭잖아."
"그게 뭐야 풋!" 지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자 건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순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센스가 전혀 없는 자신이 도리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너 연애 안 해 봤지."
건우는 삼키려던 핫초코를 순간 내뱉을 뻔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한 마디였다. 그런데 지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기 자신이 딱 봐도 그런 티가 난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괜찮아. 나도 아직 안 해 봤어."
이건 좀 의외였다. 학교에서 꽤나 인기가 많던 지수였기에 건우 입장에선 조금 납득하기 힘들었다. 아마 영훈이와 아침에 있었던 일도, 그녀는 그에게 고백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건우는 아직, 그 결과가 어떤지에 대해선 그녀에게 확실한 답을 듣지 못했다.
"있잖아..." 소년은 조금 뜸 들였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에 영훈이가 너한테 고백했던 거 맞지?"
이번엔 소녀가 잠시 뜸 들였다.
"응. 맞아."
"사귀어?"
"아니."
소년은 대충 감으로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막상 소녀의 입에서 확실한 답이 나오니 속으로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영훈이가 맘에 안 들어? 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리고 잘생겼잖아."
"그게 나랑 뭔 상관이야?"
생각해 보니, 상대가 어떻든 간에 자신에게 상대를 향할 마음이 없다면 뭐든 알 바가 아니었다. 문득 건우는 진심으로 태준이가 존경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지수는 정말 영훈이에게 단 하나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근데 그게 너랑은 또 무슨 상관인데?" 소녀가 장난 어린 어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소년은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졌다. 카페 안엔 오직 둘만이 놓여있는 것 같았다. 그 안의 온도, 냄새, 창 밖의 풍경, 조명 그리고 지수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온 감각으로 체감하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이란, 그날의 상대와 장소,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공기까지도 함께 얽혀 이루어지는 하나의 상황이다. 그 기류를 읽는 기술이다. 결국엔 실천과 행동뿐이고,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소년은 오직 지금뿐이라는 생각으로 두껍게만 쌓여있던 알을 깨고 나왔다.
"너를 좋아해."
"선생님."
고요한 달빛아래 적막한 공원. 그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듯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 그였다. 그동안 일이 바쁘기도 했거니와, 솔직히 괜히 복잡한 상황에 연루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스승이자, 은사와도 같은 사람이었기에 그저 외면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물론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계가 있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했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그녀와, 존경했던 그를 위해 어떻게든 이 학교에 남아있고자 다짐했던 그였다.
"오랜만이네. 승구."
"요샌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승구가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여전히 도망자 신세지."
"선생님은 아무 잘못 없으셨어요. 이건 부조리합니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생각이세요?"
"원래 삶이 부조리로 가득한 걸 새삼스레 왜 그래? 난 절대 돌아갈 일 없어."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억울하시잖아요. 이 사장님은 한 번 뵈셨어요?"
"아니. 그런데 이번에 사람 보냈더라. 나 잡아 오라고. 그래서 요새 뒷골목엔 가지도 못하고 여기서만 이러고 있잖아. 근데 이젠 이곳도 그리 안전하진 못할지도 몰라. 이미 소문이 난 이상 내가 어디 있든 그들이 날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지."
"저 솔직히 힘들어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어 나는. 넌 그냥 애들한테 좋은 선생님이 되려고만 하면 돼."
"그것조차도 쉽지 않아요. 교사라는 직종이 이렇게나 힘이 들 줄은 몰랐습니다."
"더럽지? 이쪽 바닥도."
"네."
"그래서 여기에 온 용건은?"
"그냥 얘기 나누고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