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선생님이 왜 여기에?
승구와 해원은 가끔 학교 뒤편 뒷산에 자리한 작은 공원을 찾곤 했다. 낮에는 제법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등산을 온 어르신들은 잠시 쉬어가며 목을 축였고, 무리를 지으며 뛰어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특히 주말에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학교나 학원을 마치고 난 저녁 무렵이 되면 공원은 한결 고요해졌다. 그래서 해원의 부모님이 집에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면, 승구와 해원은 그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둘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공원엔 아무도 없었다. 승구는 자연스레 그네 쪽으로 가 앉았다. 해원도 그를 따라 옆 그네에 올라타 앉았다. 해는 슬슬 저물어 가고 있었다. 구름 틈 사이로 나오는 노을빛에 하늘의 능선이 흐물거렸다.
"우리 여기 안 온 지 꽤 오래됐지?" 승구가 물었다.
"그러게. 오랜만에 온 것 같아. 이번 연도엔 처음일걸?"
"요새 네가 너무 바빠서 그렇잖아."
"뭐, 어쩔 수 없잖아."
"많이 힘드냐?"
"음..."
승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랐다.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지만, 좋아하는 마음에 그러기란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온통 성적 생각뿐인 거야?"
"다들 그렇지 않아?"
"난 별로."
"부러워. 주변에서 공부 가지고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
"울 엄마 아빤 그런 거 잘 신경 안 쓰시더라고. 물론 요즘엔 내가 정신 차리고 공부하는 모습 보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좋아하시긴 해."
"나도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음 얼마나 좋았을까..."
"넌 부모님이 미워?"
해원은 잠시 침묵을 이었다. 부모님 생각만 하면 마음이 많이 복잡해진 탓이었다.
"미워하기 싫은데... 자꾸 미워하게 돼."
야옹~
"어우 깜짝아!"
그 순간, 야생 고양이 한 마리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네 앞을 맴돌더니 해원의 다리 곁에 조용히 앉았다. 그 고양이는 검은 털을 두른 채, 어딘가 기묘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야생 고양이라기엔 털빛에 윤기가 날 정도로 매끄러웠고, 오히려 고풍스러운 기품마저 풍겼다. 녀석은 이내 얼굴을 해원의 다리에다 비벼댔다. 해원은 그런 녀석이 귀엽다며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얘 뭐지? 이렇게 살가운 야생 고양이는 처음 봐!"
승구는 고양이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렇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부럽다고. 그는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고양이는 손바닥을 내려치며 응수했다. 해원이는 배꼽을 잡으며 웃어댔다. 승구는 어이가 없었다.
"재수 없는 놈이네 이거."
"야 귀여운 애한테 왜 그래?" 해원이 노려보며 녀석의 편을 들어주었다.
"귀엽긴..."
"근데 넌 주인이 없니?" 해원이 녀석에게 물었다.
고양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이내 공원 한편으로 뛰어가선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냥 저렇게 가 버리는 거야?" 승구가 말했다.
"괜한 걸 물었나 봐."
"고양이가 사람 말을 어떻게 알아듣냐."
"감정을 주고받을 순 있잖아.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들은 사람 표정만 봐도 언뜻 눈치를 챈다니까."
"넌 개랑 고양이 중에서 뭘 더 좋아해?"
"나는 고양이! 까칠하고 도도한 매력이 너무 귀여워."
"난 개가 더 좋아. 절대 주인을 배신하는 일이 없잖아. 내가 자기 주인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만으로도 사랑을 주는 게 마음에 들어. 인간은 절대 그렇지 못하거든."
"나는 오히려 그래서 개가 너무 부담스러워. 삶의 목적이 오로지 주인인 거잖아."
"그럼 넌 삶의 목적이 뭐라 생각해?"
"뭐야, 이 너답지 않은 질문은?"
"내가 뭐 어때서."
어느새 해는 자취를 감추었고, 하늘은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공원이 서서히 그림자에 잠기자, 달빛은 더욱 또렷하게 번져갔다. 보름달이 유독 더 커 보이는 날이었다. 승구는 시간이 늦었다 싶어 슬슬 일어나 공원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너 안 가도 돼?" 미동도 없이 떡하니 앉아있는 해원을 보곤 승구가 물었다.
"나 조금만 더... 달이 너무 예뻐서."
"오늘 하늘이 이쁘긴 하네."
승구는 계속 곁에서 해원의 자리를 지켜주었다. 이곳에 더 있고 싶다는 해원의 말에 오히려 그는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을 더 늘릴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가 많이 힘들어 보였기에 걱정이 커진 것도 사실이었다. 달은 보란 듯이 가닿을 듯 아주 가깝고 크게 떠 있었다.
"넌 꼭 부모님 말만 듣고 살아야 해?"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나도 좀 가르쳐 주라."
"음. 난 어릴 때부터 워낙 말을 안 듣고 자라서 뭐라 할 말이 없네."
"나도 차라리 그렇게 할걸 그랬어.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게 당연한 도리인 줄 알았거든. 근데 이제 와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은 것 같아."
저벅저벅
그때였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발소리가 수풀 사이로 고요를 가르자 둘은 동시에 몸을 움찔하며 옆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발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들이 아주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안녕!"
"어? 선생님?"
그들의 담임 선생님인 기찬이었다. 어두운 한밤중이었음에도 하얗게 센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보자 단번에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학교 안에서와는 다르게 그의 분위기는 어딘가 사뭇 달라 보였다. 생김새도, 목소리도, 특징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공원 속의 그는 묘하게 신비로운 마술사를 연상케 했다.
"너네 이 시간까지 여기서 뭐 해? 아직 집에 안 들어갔어?"
"선생님이야말로 여긴 왜?" 해원이 놀라 물었다. 승구 또한 예상치도 못한 등장에 벙찐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래서 돌아다니다 이런 곳도 있구나 싶어 한번 들러봤는데, 웬걸? 내 제자들이 여기 있지 뭐야."
기찬은 그들 앞에서 그대로 흙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러더니 이내 뒤로 돌아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유독 밤하늘이 아름답긴 했다. 달이 크고, 곁엔 소금 같은 별들이 그림을 그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서울에서 이런 풍경을 보기란 정말 드물었다.
"이야~ 오늘 밤하늘이 너무 이쁘지 않아? 얼마 만에 보는 별들이야 이게." 기찬이 감탄하며 말했다.
"근데 선생님은 왜 아직까지 집에 안 가시고 계셨어요." 승구가 불쑥 물었다.
"그놈의 야근 때문에."
"교사들도 야근을 해요?"
"당연하지. 게다가 난 이 학교에 처음 부임했으니까 이것저것 챙길 일이 많아요."
"근데 선생님은 왜 국어 교사가 되셨어요?" 이번엔 해원이 불쑥 물었다.
"너희들에게 시를 소개해주기 위해."
"멋져요!"
"근데 반장은 요새 고민이 많아 보이던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말 안 듣는 애들이 있다거나, 할 일이 너무 부담된다거나. 아니면 승구가 괴롭힌다거나."
"제가 뭘 괴롭혀요."
"선생님들 사이에서 너 소문이 자자하더라. 그렇게 말 안 듣던 놈이 그래도 지금은 애가 아주 개과천선됐다고."
승구는 부끄러워 시선을 피했다. 해원은 옆에서 쿡쿡 웃고 있었다.
"너는 정말 나 덕분에 사람 된 줄 알아." 그녀가 생색내듯 승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승구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었다.
"반장 하면서 힘든 점은 딱히 없어요. 말을 안 듣는 애들도 없고요. 그냥..."
해원이 머뭇거리자, 그는 갑자기 옆에 두었던 가방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저번 시간 때 알려줬던 시 기억나?"
"네.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 맞죠?"
"그래, 맞아. 나그네는 단순히 떠도는 여행자가 아니야. 인생이라는 길 위를 걸어가는 한 인간이지. 그렇다면 우리는 나그네와 다를까? 아니, 같아. 지금도 저 하늘을 봐. 구름은 힘겹지 않게 달빛을 향해 흘러가고 있잖아. 얼마나 고요하고도 아름다워. 그러니 힘을 조금 내려놓고, 구름에 달 가듯 흘러가는 사람. 그가 바로 진정 살아갈 줄 아는 나그네 아니겠어?"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우린 할 게 많고, 세상이 그렇게 내버려 두질 않는데."
휘잉-
그 순간 세찬 바람이 그들 뚫고 지나갔다. 흩날리는 나뭇잎이 따귀를 때리고 모래알이 눈알에 들어갈 정도로 불어댔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자 그는 해원에게 용지 하나를 주며 말했다. 그가 필사한 '나그네'라는 시였다. 글씨 뒷 배경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왼쪽 윗 모서리에 달이 그려져 있었고 아래엔 구름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구름 위에 한 사내가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림 솜씨가 꽤 좋아 보였다.
"세상은 애초에 우릴 가진 적이 없어. 그저 각자의 길만 있을 뿐이야. 삶 자체가 여정이자 끝없는 계단인 셈이지. 너희는 앞으로 수많은 시기를 맞이할 거다. 그리고 매 시기마다 늘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시작점이 있을 것이고, 늘 아쉬움과 후회로 가득한 이별 또한 준비해야 해. 그런데 걷다 보면 언젠가는 지치기 마련인 게 인간이야. 오히려 힘을 줄수록 넘어지고 다치기 일쑤지. 그냥 천천히 걸어 나가는 거야. 지금의 시기 끝에 뭐가 있을 진 아무도 몰라. 나? 부모님? 그 주변의 훌륭한 사람들? 알 수 없어. 그런데 결국 우리 삶의 끝은 죽음뿐이야. 그렇다면 이보다 더 두려울게 뭐가 있어? 우린 모든 순간이 딱 한 번밖에 오질 않아. 오늘 보는 달은 오늘 밖에 볼 수 없어. 인생에 있어 특별한 시기나 중요한 시기나 그런 건 사실 없다는 거야."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 학기의 막바지까지 다다랐다. 해원은 결국 학원을 끊고 과외를 받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승구는 해원과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 아쉬웠다. 둘이서 같이 걷는 밤의 거리가 그리웠다. 하지만 해원은 이제 학교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집으로 향해야만 했다. 결국 그녀와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학교에서 뿐이었다.
이제 남은 거라곤 곧 치르게 될 기말고사 하나였다. 다행히도 해원은 저번 중간고사와 이번 6월 모의고사에서 꽤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아낸 듯했다. 두 시험 모두 반에서 1등을 했고, 전교에서도 문과 전체 학생 중 5등 안에 드는 성적을 받아낸 그녀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는 기분이 좀처럼 좋아 보이진 않았다. 승구가 보기엔 그랬다. 학교 생활은 늘 하던 대로 변함없이 밝은 모습을 보이며 다녔지만, 그는 이제 그녀의 감춘 얼굴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해원은 지금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때 담임 선생님인 기찬이 말했다. 종례 시간이었다.
"이제 곧 기말고사잖아 그렇지?"
"네." 반 아이들 모두가 대답했다.
"어때 고등학교 생활이?"
이번엔 대답이 없었다.
"아마 힘들 거야. 선생님도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수험 생활 또한 많이 겪어본 사람으로서 그 기간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지 아주 잘 알아. 때로는 부정적인 생각까지 들 때도 있잖아. 안 그래?"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너네는 대학을 왜 가려하지?"
이에 대한 답은 뻔했다. '당연히 가야죠. 남들도 다 가잖아요. 안 가는 것보단 낫잖아요.' 등의 비슷한 이유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승구도 그 질문에 대해 곱씹으며 생각해 보았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단지 해원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고,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덧 성적은 작년에 비해 눈에 띄게 올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모든 목표가 정말 그녀만을 향하는 것이 옳은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그때 기찬이 말을 이었다.
"공부라는 것은 절대 학업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 대학에서만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내가 지금 고등학교 교사로서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게 이상하게 보일진 모르지만... 적어도 너네들의 선생님으로선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 이번 학기 다들 나한테 한 번씩은 상담을 받아왔잖아? 그런데 아직까지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모르는 애들이 대부분이거든. 괜찮아. 그건 아무 문제가 안 돼. 너네 나이 때는 그게 정상이야."
어느덧 교실 안 분위기는 편안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곱씹고 있었다. 그에겐 분명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힘이 있었다.
"분명히 여기서 교육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있는 아이들도 있을 거야. 어쩌면 모두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너네들과의 첫 수업에서 내가 교과서에 실린 두 페이지를 찢으라고 시켰던 것 기억나? 나 또한 불만이 있는 게 사실이야. 그럼에도 칠판 앞에 이렇게 서 있잖아? 마찬가지로 지금 너희들더러 공부를 하지 말고, 대학을 가지 말라며 무책임하게 이야기할 순 없는 거거든. 좋아하는 거 해라, 잘하는 거 해라... 좋아, 아주 좋은 말이지. 그런데 그건 하루이틀 만에 찾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오히려 평생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 근데 말이야,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앞으로 남은 삶의 길을 불행 속에서만 걸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너희는 앞으로의 여정이라는 이름의 삶을 어떻게 걸어 나가야 할까? 반장! 어떻게 생각해?"
"저..."
해원은 머뭇거리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승구가 옆에서 거들어 주었다.
"태어난 김에 그냥 사는 겁니다!"
그러자 반 아이들 모두가 웃었다.
"오늘 학원 안 가?" 종례가 끝난 뒤, 하굣길을 걸으며 해원이 물었다.
"그런 셈이지." 승구가 대답했다.
"헐."
해원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린 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승구를 쳐다보았다. 한편으론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 보여도 은근히 냉철한 구석이 있는 승구가 멋있기도, 부럽기도 했다.
"끊은 거야?"
"아니. 그냥 안 가. 아마 기말 끝나고 나서 끊을 것 같다."
"너를 닮고 싶어."
"내가 좀 멋있긴 해."
해원은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 곧바로 한숨을 쉬며 시선을 돌렸다. 승구는 재수 없는 콧방귀를 뀌곤 해원을 바라보았다. 사실 해원이 아니면 승구는 더 이상 학원에 갈 이유가 없었다. 원래라면 그랬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공부까지 그만둘 순 없었다. 단지 오늘은 그녀와 오랜만에 둘이서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너 성적 많이 올렸잖아. 근데도 불안해?" 승구가 물었다. 그동안 계속 해원이 신경 쓰였던 그였다.
"만족이 안 돼."
"네가 만족을 못하는 거야, 너네 부모님이 만족을 못하는 거야?"
"이젠 모르겠어 나도."
"오늘도 과외받으러 가?"
"아니. 오늘은 과외 선생님이 일 있으셔서 주말에 대신 오시기로 했어."
"야, 공원 갈래?"
"안돼. 오늘 부모님 일찍 오신다고 하셨어."
"잠깐이라도 있자. 부모님한텐 상담받는다고 해."
그러자 해원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저 무심히 던진 말이었는데, 의외로 분위기가 매끄럽게 흘러가자 승구는 속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하지만 해원은 곧바로 고개를 휘저으며 안 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승구는 김이 확 빠진 주전자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해원이 힘없이 툭 던진 한 마디에 승구는 괜스레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녀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 네가 미안할 필욘 전혀 없어. 나중에 언제든 가면 되지! 방학도 있잖아!"
"그래 맞아. 나중에 가면 되지!" 해원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오늘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 있잖아. 종례 시간 때. 그때 나도 곰곰이 생각을 해 봤거든. 나는 솔직히 공부를 너 덕분에 시작하게 된 건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건 아니었더라고. 너도 부모님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
"근데 공부 말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잘하는 것도 모르겠고, 좋아하는 것도 모르는데."
"사실 나도 크게 다를 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널 만나기 전까진 정말 아무 생각없이 살았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문득 드는 생각이..."
"뭔데?"
"나도 선생님이나 한 번 해볼까 싶더라."
"네가? 풋!" 해원이 크게 웃어 젖자, 승구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며 쑥스러움이 몰려왔다.
"나 진지하다고."
"너무 안 어울리는데? 과목은 어떤 걸로 하게?"
"국어."
과목을 듣자 해원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에 국어는 물론이고 책과 글자와도 거리가 멀었던 승구였기에 해원의 반응이 아예 이해가 안 갈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승구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괘씸했다.
"나는 너 응원해 주는데 진짜 너무하네."
"아냐 아냐. 잘해 봐. 사람 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그러면 너는 뭐가 되고 싶은데?"
"나?"
해원은 이내 말이 뚝 끊겼다. 사실 그녀는 장래희망이 의사였다고 말한 바가 있지만, 승구는 그녀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성적도 물론이거니와 자신 그녀 스스로도 의사를 딱히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사실 어렸을 적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어."
"오~ 멋있는데? 그럼 그거 하면 되겠네."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잖아."
"꼭 무거워야 될 필요는 없잖아?"
"그냥 어렸을 적 꿈일 뿐이야. 지금은 솔직히 모르겠어."
그렇게 둘은 말없이 걷다가 어느덧 해원의 집까지 도착했다. 문제는 해원의 집 앞에 그녀의 엄마가 서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그녀가 퇴근하고서 집에 오는 시간 때에 딱 맞춰 도착한 모양이었다. 해원은 엄마를 보자마자 곧장 승구의 팔목을 잡고선 빨리 돌아가라는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너 거기 남자애! 잠시 이리 와 봐." 그녀의 엄마가 말했다. 차갑고 냉기 섞인 목소리에 승구는 순간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참에 단단히 말해둬야겠다. 너 왜 자꾸 우리 해원이와 붙어 다니니?"
"그냥 가는 길이 같았을 뿐이에요."
"혹시 우리 딸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
"생각지도 말아. 너네가 지금 연애하고 그럴 시기가 아닌 건 알잖아? 그 정도 주제 파악은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엄마 그냥 들어가요. 얘 나랑 아무 상관없는 애예요." 해원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하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해원을 향해 혀를 끌끌 차 댔다.
"너는 빨리 집에 들어가 있어. 엄마 정말 화날라 그래."
해원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승구를 슬쩍 흘겨보고선 집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자 승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화를 낼 순 없었다. 괜히 그랬다간 해원이만 더 골치 아파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승구는 최대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해원이는 아무런 잘못 없어요. 그냥 반장한테 도움받을 것이 좀 있어 제가 눈치 없이 따라온 탓입니다. 앞으로는 같이 안 다닐게요."
"그러길 바란다." 이 말 한마디와 함께 어떠한 눈길도 없이 그녀는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하아-
승구는 착잡한 마음을 쓸어내리려 가슴을 두어 번 크게 쳐댄 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