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만 바라보다가
"이제 여름 방학이네? 벌써 우리가 만난 지도 반년이 넘게 흘렀다 얘들아."
어느덧 여름방학을 하루 앞둔 방학식 날이었다. 그동안 승구와 해원은 수업 시간 외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날 이후, 승구는 해원에게 조금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고, 아마 그건 해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건, 해원이 기말고사를 꽤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일이다. 이번에도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전교권에서도 거의 최상위권까지 성적을 끌어올렸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얼굴엔 어딘가 모를 슬픔이 담겨있었다. 언뜻 들려오는 말로는 해원은 방학 동안 기숙학원에서 지낼 예정이라고 했다. 승구는 그녀와 멀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오늘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해원과 시간을 같이 보내고자 다짐했다.
"한 학기 동안 수고 많았고! 그리고 선생님보고 싶다고 막 울거나 그러진 마라." 기찬이 장난스레 말했다.
"보고 싶을 것 같아요~!" 그러자 반 여자 아이들이 아양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어느새 기찬은 모든 학생들에게 인기만점인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거기엔 물론 그의 신비로운 외모도 크게 한몫했지만, 일단 그의 수업 방식이 독특하기도 했다. 그와의 첫 수업은 아마 평생 기억에 남으리라.
"너희는 국어라는 과목이 뭘 배우는 과목이라 생각하지?"
기찬이 수업 중 문득 반 아이들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도 중요하지. 문맥을 파악하고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도 중요하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문학은 도대체 왜 배우는 걸까? 시와 소설이 도대체 무엇에 도움이 된다고? 그렇지 않아?"
사실 승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장 이해할 순 없었다. 아마 문학이 아니었다면, 그는 국어라는 과목엔 아예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선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애초에 모든 과목이 그랬다. 그때 옆자리에 해원이가 불쑥 손을 들고 말했다.
"시와 소설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이유를 찾는 여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이해하고, 나 자신에 대입하며 해석해 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한정된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수많은 체험과 동기를 안겨주기 때문입니다."
"역시 우리 반장은 사유의 깊이가 남다르네. 고등학생치곤 정말 훌륭한 답변을 해 줬어. 다들 해원이에게 박수!"
짝짝짝
박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자, 기찬은 조곤 하지만 단단한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문학과 시는 말이야. 한 인간의 삶이 담겨있어. 사실 인간이란, 어느 시대에 어디서 태어났든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크게 다르지 않아. 특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문학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주어진 문제에 적절한 답을 찾아내기 위해 읽는 행위는 문학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교육이야. 비판적 사고를 지향하면서 정답을 강요하고, 그 정해놓은 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무슨 이유가 있든 들으려 하지 않고 묵살해 버리지. 학교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가르치고 있는 꼴이야.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는 시인과 작가를 단두대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찌르고 갈라 해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
승구는 그의 말을 듣자 놀랐다. 교사가 저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교육 철학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선생님은 시와 문학을 사랑한다. 그리고 감정은 인간의 목적이다. 그러니 이번 숙제는 아주 간단해. 오늘 너네가 느낀 감정들을 아주 솔직하게 A4 한 장분량으로 써보는 거야.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승구는 당시의 기억을 한 치도 빠트림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찬은 학생들의 노고를 누구보다도 잘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선생님이었다. 그와 상담을 하고 나면 모두가 만족해했다. 그렇게 그의 교육 철학은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왔고, 수업에서의 일관된 태도가 그에게 신뢰를 더 했다.
"혹시라도 방학 동안 상담이 필요한 애들은 교무실로 조용히 찾아와."
"네~."
"그럼 다들 몸 건강히 잘 지내고, 다음 학기 때 밝은 얼굴로 보자!"
기찬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아이들은 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승구는 슬쩍 눈치를 보다 곧바로 해원에게 물었다.
"너 어디가?"
"집에 가야지."
"오늘 시간 조금만 내주라."
"미안해. 나랑 같이 붙어 다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젠..."
"아니. 그건 아니야."
"너 우리 엄마한테 다시는 나랑 같이 안 있겠다고 그렇게 말했다며."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네가 나 때문에 그런 취급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날 아빠한테까지 그 소리 들어갔으면 아마 학교에 전화까지 했을지도 몰라. 내가 그거 막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래도 지금은 시간 있잖아. 아직 부모님 두 분 다 일하고 계실 거 아니야. 그리고 너 방학 동안 기숙학원 갈 거라며."
"왜 그렇게 나랑 같이 있고 싶어 하는데?"
"... 됐고 일단 밥 먹으러 가자."
"오늘 엄마가 데려오신다고 했어."
승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설득시키기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이대로 그녀와 멀어지기 싫었다. 승구는 방학식날 반장들끼리 학교 내 모임이 있다며 거짓말을 치고 나오면 된다는 식으로 그녀를 어떻게든 끌어내 보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설득이 안 됐다.
"너 그럼 나랑 계속 이렇게 지낼 거냐?" 승구는 본의 아니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어쩔 수 없잖아." 해원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만족이 되는 건데 너네 부모님은? 너 이번에도 반에서 1등 하지 않았어? 이건 학대야."
"그런 식으로 말하진 마."
"너 요새 표정 숨기는 일이 많아졌어. 내가 그걸 모를 줄 알아? 선생님이 너한테 몇 번이나 상담 권유하셨다며. 근데 왜 그때마다 아닌 척, 괜찮은 척하고 그냥 넘어가는 건데?"
"부모님이 사실 선생님을 별로 안 좋아하셔."
"별... 하..."
사실 기찬은 학생들의 평과는 다르게 학부모들에게선 여러 번 지적을 받아온 선생이었다. 수업 시간 때 수업은 안 하고 딴짓한다, 교사가 행색이 왜 그러냐, 아이들에게 이상한 사상을 심어놓는다는 등 갖가지 이유로 학부모들의 불평을 듣는 그였다. 실제로 수업 중 야외활동이란 명분으로 뒷산에 오르는 일도 더러 있었고, 교과서에 담긴 페이지 중 일부가 맘에 안 든다며 찢도록 시킨 적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 한 번은 수업 중, 교장 선생님이 그를 따로 부른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는 이전 학교에서 쫓겨난 뒤 금호고로 온 것이라는 소문까지도 돌았다. 게다가 교사들조차 그를 곱게 보지 않는다는 건 학생들 사이에서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일단 나가자." 해원은 가방을 싸들고 교실 밖으로 향했다.
"오늘 진짜 어머니께서 데리러 오셔?"
승구의 질문에 해원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곧장 교실을 나섰다. 그는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운동장에 나오자, 정말로 해원의 어머니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승구는 일부러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차갑게 쏘아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할 길은 없었다. 잠시 뒤 해원은 어머니와 함께 주차장으로 사라졌고, 승구는 그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방학 중 어느 날이었다. 여름 방학을 시작한 지 한 달가량 되어가던 밤, 시곗바늘이 열 시를 가리킬 무렵, 그의 휴대폰에 반가운 알림음이 울렸다.
'뭐 해? 잠시 시간 돼?'
문자의 출처는 해원이었다. 승구는 곧장 시간이 된다며 답장을 보냈다. 그러더니 그녀가 잠시 뒷산 공원에 와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고, 그는 수락하고서 당장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달리던 승구는 문득 가슴 속에서 작은 낚시바늘처럼 걸리는 의문을 느꼈다. 이 시간대에 해원이 자신을 부를 이유가 과연 있을까? 그러나 그 생각은 달음질치는 발걸음의 속도에 금세 묻혀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하나, 해원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심장은 귀 바로 옆에서 북처럼 울려댔다. 두려움보다는 알 수 없는 설렘이 그를 몰아세웠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던 승구는 어느새 뒷산 입구 앞에 섰다.
헉... 헉...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승구는 계단 난간을 붙잡고 잠시 몸을 기대었으나, 10초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에 이르렀고, 그곳엔 그네에 홀로 앉은 해원이 달빛 아래 고요히 시선을 고정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그녀에게 무언가 일이 있었던 듯했다. 승구는 다짜고짜 숨도 고르기 전에 해원에게 물었다.
헉... 헉...
"야 서해원. 뭐야, 갑자기 왜 불렀어?"
"뛰어왔어?"
"어."
승구는 그네에 몸을 내던지듯 앉아 그제야 헐떡이던 숨을 겨우 추슬렀다. 그러나 해원은 가만히 하늘만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승구가 물었다.
"뭐야. 왜 불렀냐고. 너 근데 기숙학원에 들어갔다 하지 않았어?"
"갔었지."
"그런데 벌써 끝난 거야? 아직 8월인데?"
"오늘 아침에 그냥 뛰쳐나왔어."
승구는 놀라 되물었지만, 해원은 덤덤한 표정으로 계속 하늘만을 주시했다. 달이 깊게 차오른 밤이었다. 별들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너 무슨 일 있지?" 해원에게 조금 싸한 느낌을 받은 승구는 진지한 어투로 묻기 시작했다.
"무슨 일 있긴... 그냥 네 생각나더라고. 아, 그리고 전에 한 번 선생님도 뵀었어."
"우리 담임쌤을? 언제?"
"우리 방학식 했던 날. 사실 그날에도 밤에 몰래 집을 나온 적 있었거든. 그때 봤었는데... 아 맞다! 저번에 우리가 봤던 그 검은색 고양이 있잖아. 오늘 아침 학원에서 몰래 나오니까 그 애가 떡하니 서 있는 거야! 근데 걔가 여기로 나를 끌고 오더라니까? 그냥 가만히 따라만 왔더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여기로 와 있는 거 있지."
해원의 이야기는 두서없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선생님이랑 무슨 얘기했냐고? 아니 잠시만. 아침이라고? 그럼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건데?"
"어, 맞아 아침."
"오늘 왜 이러는데. 너 제정신 아닌 거 같아 보여."
"그냥 한 번쯤은 일탈해 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네가 전에 자주 했던 거. 나는 하면 안 돼?"
"너답지 않으니까 그러지."
"나 다운게 뭘까..."
"집엔 어떻게 들어가게. 부모님은 아셔?"
"모르지. 아마 지금쯤엔 학원에서 연락갔을걸? 그냥 옆에 있어만 주라. 그러라고 부른 거야. 그리고 오늘은 내 인생에 있어 최고로 나쁜 일탈을 저지른 날이 될 거야.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을 망치고 싶지 않아."
승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해원의 얼굴은 무언가 상실한 사람처럼 공허해 보였다.
"그나저나 아침이랑 낮 시간대는 여기 사람 많이 오더라. 낮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초등학생정도로 보이는 여자 애 두 명이 벤치에 앉아 있는 거야. 한 애는 막 서럽게 울고 있고, 다른 한 애는 그 애를 달래주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다가가선 왜 울고 있냐 물어봤거든? 글쎄 자기 오빠랑 싸웠는데 엄마가 자기편 안 들어줬다고 그러는 거 있지. 왠진 모르겠는데 내 생각이 나더라고. 나도 항상 언니보다 뒷전이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아침에 여기서 네잎클로버를 하나 땄었는데, 걔한테 뚝 그치라고 그걸 줬어. 근데 애가 정말 해맑게 웃는 거야. 처음 본대 네잎클로버를. 정말 순수하지 않아?"
"나도 본 적 없는데 네잎클로버."
"그래서 네가 좀 애 같은 면이 있는 건가?"
"그게 뭔 소리야."
"행운이란게 과연 있을까?"
"있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걸 기대하기엔 인생은 너무 괴롭지 않아? 아이들은 모든게 새로워. 그래서 네잎클로버를 기대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걸 쫓는 것이 사실은 아무 의미없는 행위인걸 알면... 그리고 그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로, 사실은 인생이 그런 걸로 가득채워져 있다는 걸 알면... 그땐 도대체 어떻게 나를 지켜줘야만 해?"
승구는 해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는 순간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망가진다는 것을 보는 건,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몰라준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원아, 같이 들어갈까?"
"그리고 나 아까 울었어. 어떤 한 여자애가 아빠랑 같이 여기에 놀러 온 거야. 그런데 부럽더라. 아빠가 목마 태워주고, 확 안아주고... 나도 어렸을 땐 그랬던 적이 있었겠지? 그걸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고. 그 애가 탁구를 좋아하나 봐. 막 우리 딸은 멋진 탁구 선수가 될 거라며 아빠가 딸을 높이 치켜세우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어. 그래서..."
해원은 승구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갑자기 오늘의 일을 쉴 새 없이 털어놓기 시작했다. 승구는 그저 묵묵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속에는 오래 쌓여온 것들이 묻어 있는 듯했다. 이상한 낌새가 물씬 풍겨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표정 속에서 눈빛은 딱딱하게 유리알처럼 얼어있었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낯선 기운. 그날의 밤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했고, 풀벌레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으며 밤바람은 여름답지 않게 여느 때보다 차가웠다. 모든 게 평범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이질적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밤하늘 위엔 여전히 원만한 달이 눈부실 만큼 찬란히 걸려 있었다. 둘은 천천히 공원을 내려와 각자의 길 앞에 섰다. 마지막 순간까지 해원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승구의 눈에는 그것이 억지로 짜낸 미소라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이상하게도 그 억지 웃음 뒤에는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기색 또한 깃들어 있었다. 그 이질적인 두 표정이 승구의 가슴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발걸음을 떼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차마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해원의 뒷모습. 그렇게 그 밤은,
그녀와의 마지막 밤으로 기록되었다.
"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네 탓도 아닌 걸 왜 아직도 품고 있어."
"그날 이후로 저는 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요. 제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보살펴줘야 했었어. 사실 알고 있었음에도 해원이 내게 먼저 다가와주길 바랐던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
"해원이와 둘이서 따로 만난 적 있으시죠?"
"밤에 혼자 울면서 공원에 앉아 있더라고."
"그때 무슨 얘기 하셨어요?"
"애써 괜찮은 척 웃어넘기려는 해원이를 보니까... 내가 괜히 오지랖을 부릴 수 없었어."
"억울하시진 않으세요?"
"물론 그날 이후로 난 교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결국엔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됐지.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괜찮아."
"어떻게 그게 괜찮을 수가 있어요? 나는 학교가 정말 미웠어요. 모든 책임을 선생님께 돌렸죠. 사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저... 선생님이 잡혀간 날 이후로 학교 그만둔 건 아시죠?"
"왜 그랬어. 그리고 왜 다시 여기로 왔어."
"저는 그 당시 선생님을 보며 나도 좋은 선생님이 되고자 했어요."
"금호고로 돌아온 이유가 뭐냔 말이야."
"다신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해서요. 그러는 선생님은 왜 다시 이곳으로 온 거죠?"
"미련이 남았나 보지."
"근데 이곳에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긴 해요?"
"자신을 알고 싶어 방황하는 아이, 꿈이 무르익어 가는 아이, 사랑을 실천하고 싶은 아이 등등..."
"제가 여기로 첫 부임 왔을 때, 학생들 사이에서 재밌는 소문이 퍼져있는 거예요. 후문 쪽 뒷골목에 어느 노숙자가 있는데 절대 그를 밤에 마주치면 안 된다, 학생들을 잡아들이는 요괴다 뭐 이런... 근데 알고 보니 그게 선생님이더라고요. 흰 백발에 옷차림만 보고서도 전 단번에 알 수 있었죠. 제가 왔을 때 깜짝 놀라셨죠?"
"제자를 어떻게 잊겠어."
"선생님은 그때 저를 키치라 부르셨죠."
"그렇게 되어 있었어. 늘 그랬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여전히 그렇죠. 사실 교사 일을 하면서... 마음이 꺾일 때가 많아요. 학생들에게 올바른 교육 철학을 가지고 수업을 하기보단 대학 진학률에만 목메는 성과주의 교사들,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과잉보호를 일삼는 학부모들, 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일삼는 윗사람들과 정부의 꼭두각시일 뿐인 교육부. 그리고 아이들을 생산성과 효율이라는 단어에 욱여넣고서 그것을 더러 인재라고 부르는 국가까지. 여기서 일개 교사일 뿐인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지난 십여 년 동안 바뀐 게 하나도 없어요."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마. 이 세상에 주인공이란 건 없어. 네 삶의 주인공만 있을 뿐이지."
"환경이 사람을 바꾸잖아요."
"또 생각이 결국 환경을 바꾸는 법이지. 미래의 교사는 특히나 더욱더 중요한 직업이 될 거야. 앞으로도 단순히 학생들에게 학업을 가르치는 것만이 교사의 일이라 생각한다면, 그 교사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될 거다. 교사와 선생님의 차이는 그래.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삶과 사랑, 존재를 가르치는 스승이야. 이것은 이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무섭고 지독한 현실의 문제가 될 거다."
"전 아이들이 불쌍해요."
"성인이 되려면 자연스레 거쳐가야 되는 것일 뿐이야. 실패와 좌절, 그리고 부조리와 불합리. 그 안에서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가 결국은 인간 삶의 이유이자 과제지. 꿈을 꿨던 아이가 꿈이 허상이란 걸 알고,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나 무르익은 채로 현실을 만들어가도록..."
"선생님은 아이들이 꿈을 꾸지 않기를 바라나요?"
"아니. 아이들은 꿈을 꾸는 게 좋아. 그리고 적어도 그 시기만큼은 어른들이 그 꿈을 지지해줘야 해. 건강한 아이들은 존중과 존경을 먹고 자라거든. 하지만 그 꿈이 실은 삶의 목적이 될 순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가 중요해. 성인이 되면 누구나 좌절을 맛보게 돼. 물론 극히 일부는 꿈을 이루겠지만, 그래도 결국엔 수많은 실패를 맛볼 수 밖에 없어. 또 아이러니하게도 그 너머에서 권태를 발견하는 게 인간이야. 그러니 인생에 있어 성공이라는 단어는 없어. 결국엔 그 모든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이 전혀 달라진다는 거지. 우린 정상이 없는 산을 오르는 중인거야."
"달이 높게 뜨네요. 달을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가 중요하단 말이시죠?"
"넌 잘하고 있어."
"한동안 이곳엔 발도 못들였었어요. 그런데 교사가 되고 난 뒤, 처음으로 다시 와 봤죠... 그런데 계단을 오르는 도중 해원이가 보이더라고요. 정신이 나가 그대로 쓰러져버렸지 뭐예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거죠. 그 이후로 오랜만에 해원일 찾아가 봤어요."
"보내줘 이제."
"그래야죠."
"너에게도 아직 얼마나 많은 시기가 기다리고 있는데. 해원이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에 찾아온 걸 거야."
따악-!
"여전히 손가락을 튕구시네요."
"재밌잖아."
"그런데 그들이 만약 여길 찾는다면... 그땐 어쩌시게요."
"그거야 모르지. 오늘 보는 달은 오늘 밖에 보지 못하니까."
"저... 아저씨."
"깜짝이야. 어? 유진이네. 오랜만이야."
"근데 오늘 반딧불이 왜 이렇게 많아요? 너무 이뻐요!"
"사랑을 찾는 날인가 봐."
"저... 안녕하세요."
"안녕. 우리 학교 학생이네?"
"내 제자 중 한 명이야. 왠지... 닮았지?"
"닮았으면서도, 어딘가 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