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능선을 두고
기찬은 방학식이 끝난 뒤, 남은 일들을 마무리하고 곧장 공원으로 향했다. 해가 다 져버린 밤의 공원, 그곳에서 해원은 홀로 그네에 앉아 울고 있었다.
"반장. 여기서 뭐 해?"
"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기찬의 목소리에 당황한 듯 부랴부랴 눈물을 닦아내며 표정을 감추었다. 기찬은 해원이 어떤 아이인지 잘 알고 있었고, 방학식이 끝난 뒤 교실에서 승구와 해원이 나눈 대화도 본의 아니게 모두 듣게 되었다. 사실 오늘 그녀의 부모가 교무실로 찾아왔었다. 이와 같은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부분 학부모들의 민원은 지나치게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기찬은 적어도 자기 반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에 대해선 자연스레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이제 집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선생님께 얘기해 줄 순 없을까? 오늘 부모님께서 학교에 찾아오셨던데."
"또 엄마가 뭐라 하시던가요?"
"해원이 잘 봐 달래."
"거짓말. 선생님도 거짓말 치시네요. 여기서 우리 엄마 소문 자자해요. 진상이라고."
기찬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오늘 있었던 내용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선생님. 자꾸 그러면 곤란하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요새 학부모 카페에서 말 많이 나오는 거 알고 계시죠?"
그녀는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꼰 채, 기찬을 아니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 잘 압니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이제 한창 공부해야 할 애들에게 도대체 뭘 가르치고 계신 거죠?"
"아시다시피 저는 국어 교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선생님이기도 합니다. 단지 학업만 가르..."
"됐고요. 그리고 그 남자애. 오늘도 보니까 해원이랑 같이 나오던 것 같던데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 않나요? 그런 애랑 해원이랑 붙여놓지 말라고."
"어머님. 학생들에게서 교우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급을 나누고 갈라놓는 건 선생님으로서 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승구 그 아이. 절대 나쁜 아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녀는 기가 찬 듯 콧방귀를 뀌고, 곧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이어서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말이 안 통하시네요. 이번 학기에 한두 번도 얘기한 것도 아니고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해원이 전학 준비할게요."
"어머님... 해원이 지금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그 상태로 전학 가게 되면 아마 적응 잘 못할 겁니다."
"해원이가 힘들어하는 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우리 애 그렇게 약한 애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세 번이나 전학을 거쳐왔는데도 잘 적응해 온 아이예요."
"하지만 해원이는 지금 반장이기도 합니다. 담임으로서 말씀드리건대, 전학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성적도 많이 올랐고요. 어머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그럼 제 말 들어주시던가요."
기찬은 어찌할 방법을 몰랐다. 당시 그는 초임 교사였고, 이런 상황을 유연하게 풀어낼 경험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그래도 초임 교사 앞길을 막고 싶진 않으니까 이 정도로 그치는 겁니다. 하지만 다른 학부모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어요. 맘 같아선 선생님을 교체하라고 요구하고 싶지만, 제가 참는 거라고요. 잘 알고 계시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딱히 별말씀 없으셨어. 정말이야."
"저 전학 가기 싫어요."
아무래도 해원은 대충 엄마가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아는 듯했다. 기찬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며 해원을 안심시켰지만, 내심 그도 확신할 순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학부모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교육 철학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승구를 일부러 해원과 떨어트리기 위해 격리시키는 일은 그러했다. 그런 일은 그의 가치관엔 맞지 않았다.
"전학 갈 때마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엄만 아무것도 모르세요.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바람에 제대로 친구를 사귀어 본 적도 없고... 이번에도 반장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만 했는데요. 사실 저는 반장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요."
"괜찮아. 해원이 잘하고 있는데 왜? 그리고 선생님이 잘 얘기해 드렸으니까 앞으로 전학 갈 일은 없을 거야."
"정말 믿어도 되는 거죠."
"응."
"근데 선생님은 이곳엔 무슨 일이세요? 제가 여기 올 줄 알고 오신 건 아니죠?"
"하하, 알았을 리가 있나. 내가 신도 아니고. 그냥 저번처럼 어쩌다 보니 네가 여기 있더라."
"근데 되게 자연스럽게 찾아오셔서... 저번에도 느꼈지만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아서요. 특히 여기서는 더욱 그래 보여요. 마치 해리포터 세계관에서 날아온 마법사 같아요."
그는 해원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호탕하게 웃어댔다.
"이런이런 정체를 들켜버렸네. 마술하나 보여줘?"
따악-!
휘이이잉~!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파동처럼 흔들렸다. 곧이어 불어온 바람은 그들의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휘감으며 흔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지나간 타이밍에 맞춰 그는 해원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러자 그의 손가락 사이로 갑자기 네잎클로버 한 송이가 툭 튀어나왔다.
"자, 여기."
"우와!"
그 위엔 반딧불 하나가 별처럼 은은히 깜박이고 있었다. 해원은 그것을 두 손에 받아 쥐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숨어 있던 빛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그녀 주위를 밝혀주었다. 수많은 반딧불이 그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맴돌았고, 마치 그녀만을 위해 켜진 작은 등불처럼 주위를 감싸 안았다. 공원 가장자리에서는 귀뚜라미의 울음이 끊임없이 이어져 은은한 반주의 선율을 만들었고, 머리 위에 걸린 달빛은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한껏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감사해요."
"이제 내려가자. 너무 늦었다."
"근데 선생님은..."
"서해원!"
뒷산 입구로 내려오던 그때였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마자 어디선가 확 내리꽂는 톤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그들의 귀를 울렸다. 차갑고도 냉정한 울림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서늘했고, 해원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듯 몸이 굳어버렸다. 기찬 역시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해원의 엄마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있는 힘껏 주무른 표정을 짓고서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하니?"
"어, 엄마가 여기엔 어떻게..."
"저기... 어머님 그게 아니라요."
"이 봐요!!"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는 온 동네에 꽹과리 울리듯 퍼져 나갔다.
"여기서 우리 애 데리고 뭘 한 거죠?"
"우연히 공원에서 만났을 뿐입니다. 절대..."
"됐고!! 서해원, 이 새벽에 도대체 뭐 하고 싸돌아다니는 거니? 내가 혹시나 몰라서 네 휴대폰에 위치 추적 어플 달아놨다. 그랬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온 동네방네 경찰서 부르고서 돌아다닐 뻔했어. 너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이번이 처음이에요."
"내가 그걸 어떻게 믿니? 너 이런 식으로 그 남자애랑도 몰래 만나고 그랬던 거 뻔히 다 보여. 그리고 선생님은 이제 알아서 하세요. 더는 못 봐줍니다. 이거 소문내면 당신 인생은 완전 끝장인 거야. 알아? 어디 우리 애를 이런 곳에 불러다가! 어!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그녀는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이성을 잃고 언성을 높여 갔다. 흥분을 가누지 못하는 듯했다. 상황만 놓고 보면 충분히 오해할 만했지만, 억울하기 짝이 없던 기찬은 연신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달래기에 급급했다.
"엄마! 선생님이랑은 정말 우연히 만난 거라고요. 제발 그만 좀 해요 이제!"
"이년이 어디다 대고 큰 소리야!"
"어머니!"
해원의 뺨에 울린 소리가 공기를 가르자, 기찬은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팔목을 잽싸게 움켜쥐었다. 그의 시선이 창끝처럼 날카롭게 얼굴을 파고들자, 그녀는 그 압도적인 눈빛 앞에서 시선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순간 깊고 푸른 소용돌이 같은 눈빛에 사로잡힌 그녀는 이내 손목을 세차게 뿌리친 뒤, 해원을 등진 채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너 뭐 해! 빨리 따라와! 뭐 저런 기분 나쁜 사람이 다 있니. 두고 봐. 당신, 이제 교사 생활 못할 줄 알아. 우리 남편이 무슨 일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 당신 몸성히 못 지낼 거야."
"얼른 가 봐." 기찬은 괜찮다는 듯 옆에서 울고 있는 해원을 달래며 말했다.
"죄송해요." 해원은 가녀리고 눈물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 괜찮으니까 어서."
그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러나 힘없이 멀어져 가는 해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흔들리자, 마음은 끝내 가눌 길 없는 착잡함에 잠겼다. 앞으로의 교사 생활이 평탄치 않으리라는 건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설령 더는 교단에 설 수 없게 된다 해도 감수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제쳐두고 바랬던 건 해원이 행복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해원은 그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 순간이, 기어이 그녀와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예상대로 상황은 좋게 흘러가지 못했다.
결국 나는 교사직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일이 해원이와의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해원이가 떠난 자리는 밤의 공원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자연스레 용의자로 나를 지목했다.
이미 그때의 소문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퍼져나간 듯 보였다.
밤에 애를 두고 무슨 일을 벌였는지에 대해 온갖 가정들이 공기를 타고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나는 절대, 내 손으로 나의 사랑스러운 학생들을 헤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상황만큼은...
학교는 애초에 골칫거리였던 나를 도우기는커녕, 스스로 자백하라며 몰아세웠다.
학교 측에서도 골치 아픈 일이었기에,
정황상 타살로 보긴 어려우니 그 애의 자살 사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로 나를 꼽은 것이다.
그것이 가장 최선이라며.
사실 그들도 다 알았으리라.
해원이 떠나면서 남긴 편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리.
나는 아무런 권력도 없었고,
갖고 있는 거라곤 펜과 종이가 전부였다.
그냥 받아들이라는 세상의 외침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디.
그리고 여전히 고개를 떳떳하게 들지 못하는 신세다.
이젠...
내게 남은 거라곤 시간 밖에 없다.
나는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고 그렇게 오래 떠돌아다녀 보니...
세상이 별 것 없더라.
정말 별 게 없어서 참 덧없더라.
그렇게 이번 연도 겨울,
나는 왠지 모르게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워서, 미련이 남아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마음이 이쪽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와 본 이곳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걷는 학생들이 많았다.
한창 하늘을 바라봐야 할 나이에 아이들은 땅을 보고 걷고 있었다.
나는 길바닥에 앉아 신문지를 보는 척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처음엔 나도 모르게 외쳐댔다.
그들을 왜 키치라고 불렀냐면...
우린 모두 실은 키치와 같지 않은가?
그렇게 밤길에 한 번 불러보았다.
어...
대부분은 도망가더라.
하기야, 나 같아도 도망갈 것 같다.
하지만 다가와 주는 애들도 있었다.
어쩌면 겁을 잔뜩 먹어서 다리가 굳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찾아오더라.
인간은 기댈 곳을 필요로 하는 법이니까.
특히나 그 나이 때는 더욱더.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모르겠다.
아무리 찾아보려 해도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뭐, 다들 가끔 센치해질 때가 있지 않은가?
아마 이젠 이곳도...
"이기찬 씨."
여름 저물고 가을 타려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는 펜을 들고서 무언가를 적고 있다가 왠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한순간에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역시나 맞았다. 그들은 저번과 같이 까만 양복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채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기찬은 생각보다 이른 시간 내에 찾아낸 그들이 내심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여길 찾아 올 생각을 다 했을까. 잔인하군."
"이번엔 어설픈 묘기 부리지 마시고 순순히 따라오시죠. 이사장님께서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 사람이 나를 왜 찾느냐고."
"오히려 이사장님께서 먼저 묻고 싶어 하십니다. 왜 다시 이곳으로 온 거냐고."
"오면 안 되나?"
"잘 아실 텐데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쯧, 지금 내 꼴을 보고서도 이만하면 봐줄 때 됐지 않아?"
"요새 학생들이랑도 교류하신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데요. 그럼 금호고 측에서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순 없겠죠. 범죄자가 학생들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이래서 언어라는 게 참 무서운 거야. 같은 말을 해도 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나? 나는 그렇게 사랑하는 제자를 잃었고, 자네는 나에 관한 그 어떠한 경험도 갖고 있지 않아."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세상은 여전히 당신을 범죄자로 보고 있어요."
"세상에 정답은 없더라도 오답은 있어."
"역시나 헛소리를 또 하시네요. 계속 그렇게 거절하실 거라면, 다시는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사장님께서의 마지막 배려십니다. 하지만 또 한 번 목격담이 들려오거나 학교가 시끌벅적해진다면... 그땐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잡아오시랍니다. 저희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를 않기 바랍니다."
"알아서 하든가."
"그렇게 나오신다면 곤란합니다. 도대체 여기서 뭐 하러 그러고 계시는 겁니까? 그냥 군말 없이 떠나면 되지 않습니까. 이제 노숙자가 되어버린 신세에 어떤 미련이 남았다고 골치 아프게 구시는 지..."
"이 보게, 청년."
...
"인간은 미련이란 걸 모양을 바꿔서라도 늘 남기기 마련이야. 그러니 구름에 달을 실어 보내듯 가볍게 흘러 나아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간에 상관없어. 만약 죽음이란 게 두렵다면, 그 두려움 앞에 서서 지금 무엇인들 못하겠어?"
"저희는 당신에게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반항 말고 따라주시지요."
"나는 그저 살아갈 뿐이야. 자네는 무엇에 그렇게 집착을 하나?"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갈 건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하루는 흐르고, 인생은 흘러가는 법이야. 그건 자네도,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지. 선택은 결국 키치, 네가 하는 거야.”
휘이이잉-
바람이 그들을 가름과 동시에 노을빛이 공원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한순간 따뜻한 공기가 주위를 감싸돌았다. 기찬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전혀 내색하지 않고 다시 펜을 들었다. 하지만,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저 태양의 능선을 두고도 그들은 여전히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