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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서 삐뚤어진 사람의 소설을

그냥 제 생각을 씁니다.

by 사색가 연두


"세상 엿 같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조금 삐뚤어진 사람이고 온갖 일에 트레바리를 잡는 것이 취미인 피곤한 인간입니다.


그리하여 이번에 연재를 끝마친 <어이, 키치>는 어릴 때부터 세상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사람의 소설이자, 그래도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으로서의 다짐의 용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장편 소설을 이번에 처음 써 봤습니다.


평소 심심하면 글을 끄적이기에 단편과 중편정도는 몇 개의 원고가 노트북 파일 속 어딘가에 박혀있지만, 장편은 쉽사리 손을 떼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기회에 한 번 도전해 보았습니다. 저는 항상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니까요.


저는 10대 아이들과 20대 청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바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20대 중반이기도 하고, 그 나이대에 비롯한 여러 사회적 시선들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라 더욱 그랬습니다.


그것을 노숙자 '기찬'이라는 인물을 빌려 소설 속에서 여러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 채로 학창 시절을 보냈던 사람으로서 말이죠.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또한 그런 아이들을 두고 계신 교육자나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누군가의 자식이자, 한 때는 어린이였으니까요.


그런 생각을 갖고 쓴 소설입니다. 단순히 교육적인 의미를 넘어 현실의 창을 제공해 주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은 꿈을 꾸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어른이 되어 그 꿈이 깨어질 때, 그제야 비로소 무르익어가는 과정을 밟게 된다. 그리고 우린 항상 수많은 기로에 서서 고민하지만, 결국엔 어떠한 선택이든 자신의 삶은 오로지 본인에게만 책임을 지도록 되어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하지만 그 조차도 생애 전반에 걸쳐 우리 자신의 선택은 영향이 미미하고, 결국엔 하루는 흐르고 인생은 흘러간다.


어찌 보면 허무하고 공허하며, 굉장히 무기력해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무기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 '창'입니다. 그게 여러 훌륭한 철학자들에게서 제가 배우게 된 태도였습니다.


심오해 보일지도 모를 얘기를 최대한 '키치'하게 내보이려 노력했습니다. 결국엔 대중문화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죠. 그 간격이 애매모호하게 느껴질 순 있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목받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찌 보면 그게 제 우선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내가 쓰고 싶은 글과 사람들에게 잘 읽히는 글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브런치도 나름의 정서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정형화될 수밖에 없는 출판의 분위기 속에서 작가들의 고충은 늘어만 갈 겁니다. 아마, 브런치에서도 많은 분들이 내가 쓰고 싶은 글과 독자들을 위한 글 사이에서 항상 줄타기하며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 생각과 제가 추구하는 가치가 사람들에게 쉽사리 읽히지 못할까 봐 두려운 감정이 든 것도 사실이었으니까요.


또한 휘발성이 강한 브런치에서 과연 누가 내 소설을 읽어줄까에 대한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첫 장편이니만큼 나름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브런치에 발행해 보자는 선택이었죠. 매번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고마운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정말 제 글을 읽고서 누른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괜히 힘쓸 필요는 없기에, 좋아요 30개만 넘어도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누군가는 이 공간을 일상의 저장소로, 누군가는 자신을 어필하는 무기로, 누군가는 자기만의 창작 영역으로 꾸려나갑니다.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면을 자주 들여다보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기에 누가 잘났고 누가 못났다를 따질 수가 없었습니다. 돈과 성공, 그 외의 진부한 주제의 에세이들이 꼴사나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경제책인 척하는 얕은 자기 계발서, AI책인 척하는 마케팅이자 사업 홍보서, 철학책인 척하는 짜깁기 교양서도 물론이고요. 당연히 저도 그것들이 한창 꼴사납고 배 아프게 바라봤던 적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키치'이기도 합니다.


창을 뚫고 저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려면 반항과 타협이 어우러져야 하는 것 같습니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 신념이 되어 버리면, 그때부턴 멀리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이, 키치> 속 '기찬'이라는 인물의 모호성은 여기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왠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같이 묘사하는 부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어찌됐든 지금 쓰는 이 글 또한 누가 읽어줄 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대는 매번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시험대와 같기에, 저는 그저 살아가는 동안 제 취향을 쌓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눠줄 지를 매일 고민할 뿐입니다. 원래 후기는 안 쓰려 했는데, 그냥 쓰고 싶어서 썼습니다.


만약 읽어주신 분이 계신다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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