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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우(3)

낭만 속으로

by 사색가 연두


"야, 너 근데 글 진짜 잘 쓴다." 지수가 불쑥 말했다.


"응? 아, 고마워."


"오늘 쓴 시 있잖아. 네가 국어 시간 때 낭독했던 거. 정말 인상 깊게 들었어. 그래서 그런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그거 누구 생각하고 쓴 거야? 네 첫사랑?" 소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어?"


소년은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는 1교시 국어 시간 때 시를 쓰고 난 뒤, 어쩐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손을 들어버렸다. 자신에게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본인 스스로도 납득이 가질 않았다. 지수 때문이었던 걸까? 정말 그녀에게 표현하고 싶은 어떤 욕구의 충동이었을까? 아무래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낭독이 끝난 뒤엔 부끄럽고 창피하기만 했다. 결국 들킬까 봐 두려웠던 소년은 어물쩍 넘어갔고, 소녀는 한껏 달아오른 주전자에 김이 새었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소년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은 아무리 봐도 타이밍이 아니었다.


"알았어. 나한텐 알려주기 싫다 이거지?"


"그게 아니라..."


"에휴, 짝꿍이 나랑 거리둔데요오."


"부끄럽잖아 이런 건."


지수는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아쉬운 표정을 드러냈다. 얼굴이 새빨개진 건우는 어딘가 억울하다는 감정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지수는 어떻게 시를 썼는 지 궁금해졌다.


지수는 과연 첫사랑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 상대는 누굴까?

혹시... 지금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닐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건우는 진심을 몰래 숨긴 뒤, 농담과 장난이 섞인 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네가 쓴 시 나한테 보여주면 얘기해 줄게."


그러자 지수는 당황한 눈초리로 건우의 시선을 회피했다. 건우는 괜히 실수를 한 것일까 두려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딱히 실수랄 것까진 없었다. 건우는 그런 지수의 행동에 속으로 온갖 은유를 갖다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 아무 말도 않고 있는 건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지수가 숨죽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부끄러워."





띵동~ 띵동~


어느새 하교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건우는 종례를 마쳤음에도 자리에서 엉덩이가 쉽에 떼어지지 않았다. 지수와 좀 더 오래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간단한 인사 한 마디를 건넨 뒤 미련 없이 교실 밖으로 나섰다. 건우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만 수십 번째 바라보는 중이었다.


"야 인마."


"어?"


"또 또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지." 태준이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쯧쯧..."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관심 꺼라. 너한테 말한 내가 잘못이지." 건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됐고. 우리 재밌는 일 하나 할래?"


"뭔데."


그러자 태준이는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선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려는 듯 주변을 살피며 귓속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너 혹시 우리 학교에 관한 괴담 하나 알고 있어?"


"괴담?"


건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학교 괴담에 대해선 언뜻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쪽 지역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금호고에 관한 괴담은 그에겐 딱히 관심거리가 되진 못했다.


"이 학교 뒷산에 말이야. 요괴가 산데."


"그래서?"


"가보자고."


건우는 태준이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이 나이 먹고 요괴를 찾으러 산에 올라가자니. 그러자 문득 학교 후문 골목길에서 한 번씩 보이곤 했던 어느 한 노숙자가 떠올랐다. 건우는 그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중단발쯤 되는 길이의 백발과 벙거지 아래 드리운 푸른 눈동자. 그런 그의 독특한 외형 덕분인지 한창 학생들에게서 화제의 중심이 됐었던 그였다. 하지만 요샌 웬일인지 도통 그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학생들 사이에선 그가 산의 요괴라느니, 산신령이라느니 하는 괴담만 늘어갈 뿐이었다.


"혹시 네가 말한 요괴가... 그 노숙자를 말하는 거야?"


"오! 너도 그 사람 아는구나. 근데 너도 알다시피 요즘 도통 모습을 보이질 않잖아. 근데 학교 뒷산에 조금 걷다 보면 공원 하나가 나오거든? 아마 본거지를 그쪽으로 옮긴 게 아닐까, 그렇게 추측이 되고 있긴 해."


"됐다. 난 집에 갈래."


"야야! 잠시만! 그런데 그 요괴한테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거야."


"너 지금 네가 쓰고 있는 소설 시나리오 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나 지금 진짜 진지하다고. 그게 무슨 능력이냐면... 바로...!"


태준이는 한껏 달아오른 흥분을 두고 말을 이었다.


"소원을 들어준다네."


건우는 한층 더 경멸하는 눈빛으로 태준이를 노려보았다. 만약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진부한 이야기의 소설을 시중에 내놓으면 그대로 땅에 파묻혀 버릴 것이라고 건우는 생각했다.


"너 지수 좋아하잖아. 거기 가면 너 이룰 수 있어!"


"태준아..."


"야, 너는 작가가 되겠다는 놈이 어찌 그렇게 낭만이란 게 없냐?"


"낭만주의는 죽었어."


"아니. 지금 우리에겐 어느 정도 낭만이 필요해." 태준이는 나름 진지한 표정 지은 채 말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애한테 편지까지 써 가며 두 달째 고민하는 놈이 낭만은 죽었다니 뭐라니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됐고, 속는 셈 치고 따라와 봐. 너 저 뒷산에 대한 스토리는 알아?"


"옛날에 저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건 들어 봤어."


"맞아. 십여 년 전쯤 금호고 학생이 저기서 자살했었지. 아마 그 학생이랑도 연관이 있다나 봐."


"도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만들어 낸 거야?"


"출처가 명확하면 그건 소문이 아니지. 어쨌든 오늘 우리는 모험을 떠나는 거야."


건우는 모험이란 단어를 듣자, 이상하게 조금은 호기심이 일었다. 모험과 탐험이란, 나이를 불문하고 어느 남자들에게나 천진난만한 소년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주제가 아닌가. 결국 건우는 태준의 제안에 응했고 가방을 챙겨 학교를 나왔다.




그렇게 십여분 쯤 걷자, 둘은 뒷산 입구에 도착했다. 건우는 난생처음 가 보는 장소였다. 아쉽게도 첫인상은 탈락이었다. 어스름한 해 질 녘 무렵, 이곳은 특유의 으스스한 분위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조차 불길하게 울려 퍼지자 건우는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며 긴장했다.


"야, 여기 괜찮은 거 맞지?"


"몰라. 그냥 가 보는 거야." 태준도 한껏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왠지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데. 예감이 안 좋아."


"말했잖아. 이건 모험이라고."


태준은 이내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보란 듯이 나아갔다. 건우도 내키진 않았지만, 태준을 혼자 두고 갈 순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끼익-


계단을 밟자마자 들려오는 곧 부서질 듯한 소리에 건우는 잠시 멈칫했다. 자칫하면 발이 계단을 뚫고 아래로 쑥 빠질 것만 같았다. 보아하니 방치된 지 꽤나 오래된 장소 같았다. 사람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학교 주변에 이런 장소가 위치해 있으니, 어찌 보면 학생들 사이에서 이곳에 관한 요상한 괴담들이 생겨 나오는 건 당연했다. 해가 아직 떠 있어서 망정이지, 완전히 날이 저물면 정말 귀신이 튀어나온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한 장소였다. 그때였다.


수북수북


계단 옆길에 난 수풀에서 무언가가 살아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태준이는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변을 살폈다. 건우는 그만하고 내려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태준이는 이미 흠뻑 이 상황에 몰입해 있었다. 혹여나 소리의 출처가 짐승이라면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 말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야, 바, 박건우. 너 쫄았냐? 괜찮아 임마. 그리고 이제 곧 도착하..."


태준이가 말을 하다 말고 손가락으로 수풀 사이에 난 작은 나무 위를 가리켰다. 건우는 그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웬 고양이 하나가 나뭇가지에 올라탄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검은 털에 푸른 눈동자... 건우는 곧 깨달았다. 오늘 아침에 자신의 편지를 훔쳐간 그 도둑 고양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곧바로 산 저편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야, 쟤가 오늘 아침에 내 편지 들고 튄 그 도둑 고양이야."


"그래? 그거 신기하네. 근데 저 녀석... 뭔가 다른 고양이들이랑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지 않아? 저런 눈을 가진 고양이는 처음 봐."


"글쎄, 내 눈엔 똑같이 도시에서 생선이나 훔쳐먹는 낭만 도둑놈들일뿐이야."


"에휴."


태준이는 고개를 젓곤 계속 길을 나아갔다. 건우도 그를 뒤따랐다. 그러자 그의 말대로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공원의 모습이 점차 드리워졌다.


"봐봐. 금방 도착하지?" 태준이 말했다.


"넌 여기와 본 적 있냐?" 건우가 물었다.


"아니."


"뭐야."


"널 꼬시기 위한 거짓말이었는데 진짜 가까웠지 뭐야."


공원에는 오래된 기구들과 무성하게 자란 풀밭으로 가득했다. 버려진 공간의 공허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이곳이 건우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으스스한 산의 분위기만 아니라면 가끔 혼자 와서 사색하기에 괜찮을 만한 장소였다. 태준이는 신이 난 듯 아이처럼 뛰어가 공원 한쪽에 놓여 있던 그네에 올라탔다. 건우는 그런 그를 보며, 순수하면서도 엉뚱한 매력이 있는 친구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한편으론 그의 그런 면이 부러웠다. 그래서 그가 좋기도 했다. 건우는 태준이가 앉았던 바로 옆 그네에 가서 앉았다. 그네에 앉자, 학교 주변 변두리와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근데 여기에 요괴가 어딨냐?"


"조금만 기다려 봐. 밤중에 나타난대."


"야, 근데 건우야." 그가 잠깐의 여백을 두고 말했다.


"왜?"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건 어떤 기분이냐?"


"너는 좋아하는 애 없어?"


"글쎄. 내가 누군갈 좋아한다는 게... 그게 딱 어떤 느낌인지 난 잘 모르겠어. 그래서 궁금해."


"그냥... 하루 종일 그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


"막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그래?"


"그럴 때도 있고."


"그렇군."




어느새 해가 완전히 가라 앉고 달이 차오를 시간이 되자 하늘은 어둠에 드리워진 그늘로 공원을 물들였다. 서늘한 바람이 지칠 새 없이 불었고 오래간만에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건우는 마음이 한껏 가벼워졌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태준이는 알고 보니 연애 경험이 꽤 많은 친구였다. 하지만 연애 기간이 대체로 오래가지 못하자 그도 그 나름의 고민을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넌 언제 고백할 거야?" 태준이가 대뜸 물었다.


"몰라. 계속 미루게 돼."


"너한텐 사랑 고백이 그렇게나 어려워?"


"어려워 난."


건우는 태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질문을 던졌다.


"너는 그런 거 잘하잖아. 지금까지 몇 명이랑 사귀어 봤냐?"


"글쎄다."


"넌 그게 쉬워?"


"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게 어렵지 않아. 그래서 물어본 거야.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한다는 느낌은 무엇일까... 혹시나 내가 사랑을 제대로 못해 본 건가 싶어서."


"난 너의 그런 용기가 부러운데."


"아니야. 애초에 용기를 동반하지 않아. 고백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오히려 네가 부러워."


"너는 이걸 가볍게 생각한다는 거야? 아니면 그냥 자신감?"


"상처받지 않기 위한 핑계라고 해 두지."


건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어느새 깊게 차오른 달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주 얇게 뜬 달이 이마만 내놓은 채 구름 뒤에 숨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수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숨기는 자신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건우는 지금 당장 노트를 꺼내어 시를 쓰고 싶었다.


저벅저벅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자 건우와 태준이는 동시에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림자만 얼비친 채 흔들리는 달빛에 일렁이며 실체를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질수록 그 그림자는 인간의 윤곽을 띠며 압박처럼 다가왔다. 건우는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고, 태준이도 고개만 앞으로 내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낡은 외투 자락이 바람에 스치자 발자국 소리와 섞여 기묘하게 울렸다.


저벅 저벅


그는 계속해서 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풀을 지그시 밟아대는 발소리는 그들 사이에 서늘한 정적을 더 깊이 드리웠다. 얼굴은 여전히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형상이 뚜렷해지자, 이상하게도 낯선 기척은 점점 익숙한 누군가를 연상케했다.

건우는 믿기지 않았다.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다.



"어이, 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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