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작고 가볍지만, 유연하게
당신이 눈물을 흘릴 때면, 나는 말없이 휴지를 건네주곤 했다. 당신은 내가 준 휴지로 슬픔의 흔적을 지운다. 그러고는 그 슬픔을 손에 꼭 쥐고서 쓰레기통으로 가볍게 툭 던져버린다. 휴지는 간단하게 쓰고 버리는 일회성 수단으로 여겨질지라도 우리의 삶은 사실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신과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나눈 대화나 일상적인 일들. 몇몇은 마음에 담아둘지언정,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려 애쓰진 않는다. 그리고 기억할 수도 없다. 애초에 우리를 지나간 상당 수의 시간은 금방 잊어버릴 것들로만 가득하다. 내가 버린 휴지의 양을 하나하나 다 세어보며,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자신이 얼마만큼의 휴지 조각들을 버려 왔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린 그중에 몇 조각만 담아두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나의 흔적이 된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 다양한 삶의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 그중 우린 정말 많은 흔적들을 휴지에 담아낸다. 생활의 흔적, 생체의 흔적 그리고 감정의 흔적까지도. 일상 속에서 흘려보낸 수많은 시간들을 작고 희며 연약한 조각으로 지우고, 쓸어내며, 닦아낸다. 이렇듯 삶이란 것이 무겁게만 느껴질지언정, 막상 생각해 보면 가벼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가벼움들이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채워준다. 언뜻 보면 삶의 가벼움이라는 뉘앙스가 장난과 경박함으로 들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반대로 매사 진지함과 고독함으로 일상을 채우면 그게 과연 행복한 삶일까?
물론 이 세상 그 누구도 고민거리가 없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자유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인간은 아무리 자기 내면 속에서 충만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해도, 외부의 객관적인 현실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 삶을 구성해 주는 외부 환경은 사실 가벼움으로 가득 차 있다. 당장 밖을 나가보면 나에게 의미를 던져주는 자연과 사물들이 존재하는가? 의미를 '던져주는' 것들은 존재하질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걸 '무거움'으로 만드는 일은 외부의 사물이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내면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지금 '휴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삶을 지탱하기 위해 의미에 목을 매는 생물이다. 그렇기에 굳이 스스로 무거움을 고집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준 휴지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그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는 것 처럼.
그렇다고 해서 온 일생을 무거운 고민만을 위해 살아가기란 벅차다. 세상은 절대 자신의 뜻대로만 돌아가지 않으며, 한 개인은 너무나도 많은 불확실성에 놓여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쉽게 방황하곤 한다. 하지만 고민은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길을 헤매고 있는 과정이다. 여기서 고민과 사색의 차이는 굉장히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고민'이라는 것은 '그저 막연한 생각'이다. 아무리 고심하고 애쓴다고 해도, 생각만으론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에 뭐 하고 살지?' 이런 문제는 생각만 한다고 해서 절대 답을 찾을 수 없다. 반면 '사색'이란, '명확한 해답을 찾기 위한 생각의 과정'을 의미한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고민하고 고심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고민을 사색으로 바꾸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나중에 뭐 하고 살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뭐지?'라는 명확한 생각으로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고민을 사색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리 인간은 이런 유연한 사고를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휴지처럼 연약하다. 얇고, 쉽게 찢어지고, 젖게 되면 아예 쓰질 못한다. 다만 휴지는 유연하며 흡수력이 강하다. 이렇게 쉽게 부서지는 몸을 타고났음에도 그 쓰임새가 매우 다양하며 우리에겐 '생활필수품'에 해당되기까지 한다. 또한 다 쓰이면 다시 쉽게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렇듯 연약함은 다른 강함을 만들어낸다. 내가 만들어낸 신념이라는 건, 언제든지 외부의 현실과 부딪쳐 금방 깨져버릴 수 있다. 개인의 신념이라는 건, 대게 생각보다 훨씬 가볍다. 자신의 신념이 깨져 버린 경험은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또한 앞으로도 내가 나약해지는 순간은 분명히 언젠가는 또 찾아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다시 유연하게 바로 세워나가면 될 뿐이다. 이는 우리 인간이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 중 하나다. 오히려 가볍기에, 우리는 스스로 사고하여 잘못된 점을 바로 고칠 수 있는, 자정기능을 갖춘 지혜로운 생물인 것이다.
가능성은 오히려 무거움이 아닌, 가벼움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