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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나만의 가장 사적인 공간

by 사색가 연두

나는 얼핏 보면 서랍을 굳게 잠가놓은 사람처럼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무표정이 차가워 보여선지, 다들 그래 보인 다고들 말한다. 사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과거의 나는 나를 드러내기보단 담아내는 것에 익숙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숨기고 싶은 내 모습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여지도 주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사실 용감한 이들에겐 한없이 약하다. 겉만 단단해 보이지 속은 항상 열려있다. 누군가가 나의 서랍을 활짝 열어젖히면, 꽁꽁 얼어붙은 것만 같던 얼음성은 금방 녹아버린다. 하지만 녹아버린 얼음성이 과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순 없다.


나의 서랍 상태는 아마도 날마다 뒤죽박죽일 것이다. 어떤 날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서로 엉켜 빈 공간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고, 또 어떤 날에는 한 두 가지 물건만이 놓여있는 채로 공간이 꽤 여유로울 것이다. 그래서 서랍은 언제나 일관적이지 못한 나의 공간이다. 나의 내면의 세계일 수도 있고, 통제하지 못하는 외부의 세계일 수도 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낄 때면 우린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들고 있는 물건조차도 버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에서 어떠한 기대와 희망을 보았을 때, 우린 끼꺼이 공간을 내어준다. 그리고 가능성을 담아낸다.


만약 현재 당신의 서랍 속 공간이 어지러운 상태에 있다면, 더럽혀져 있던 물건들을 치우면 그만이다. 그렇게 서랍 속 엉켜있는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담아두고서 꺼내어 보지 못한 수많은 단편들을 마주하게 된다. 거기서 울고 있는 아이를 마주할 수도 있고, 웃고 있는 아이를 마주할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일 수도,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일 수도 있다. 이때 서랍은 만남의 광장으로 변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감정의 역사와 경험의 일기를 만나는 장소.


혹시 그 광장 속에서 누군가를 마주했다면, 펜을 들어 보라. 그런 다음 적어 보라. 자신이 그 사람에게 주고 싶었던 말들을,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일단 그곳에서라도 꺼내어 보라. 그럼 울고 있는 아이는 울음을 그칠지도 모른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지 마라, 괜찮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서랍 속 공간엔 점차 여백이 생길 것이다. 그럼 그 여백에 가능성을 담아내 보자.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던, 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던, 현실 속에서 꺼내보고 싶던 나의 모습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후회 없이 뱉어내기 위한 용기를 가져보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서랍을 열고 닫는 행위는 스스로 쉽게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러기 쉽지 않다. 우리는 들추어 볼 필요가 없는 공간까지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주하게 되는 날이 있다. 또한 누군가가 확 열어 젖인 채로 나를 들추어 보려 할 때도 있으며, 반대로 본인이 상대방의 서랍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차 실수를 저질러 버릴 수 있다. 누구든지 보기 싫은 것들과 보여주기 싫은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는 한 인간의 존재 자체를 100% 다 이해할 순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타인의 서랍은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이 점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남의 서랍을 열어놓고 이곳저곳 탐방을 해댈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들추려 하면 그건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끊겠다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여기서 서랍은 전쟁터가 된다. 들어가려는 자와 내보내려는 자의 싸움이다. 결국 서랍은 자신만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각자만의 서랍을 품고 있다. 그 안엔 자신도 모르게 쌓여있던 수많은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고, 또한 여러 가지 자기 자신의 모습들이 모여있다. 서랍은 여유로움과 혼란스러움이 공존하고, 그렇기에 열려야 할 때와 닫혀야 할 때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 까다로운 물건이다. 또한 드러내고 싶은 모습을 꺼내어 나를 보여줄 수도, 숨기고 싶은 모습을 꺼내지 않으려 나를 꽉 잠가놓을 수도 있다. 반대로 남의 물건을 꺼내어 보려 열어보려 할 수도, 두려워서 가만히 둘 수도 있다. 여기서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은 얻고 싶은 물건을 얻게 될 용기가 될 수도 있지만, 얻고 싶었던 물건을 얻지 못할 시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사람 마음이란, 이렇게나 어려운 것이다.



그래도 나는 지금

과감하게 서랍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린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서랍은

잠가 놓았는지, 열어 놓았는지

어떤 물건을, 어떤 누구를 마주하셨는지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펜을 꺼내어 나에게 속삭여 주십시오

그런 다음 이곳에 담아두십시오




여긴 들어와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제가 들어가도 괜찮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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