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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

by 여노

생의 열망에도 시효가 있을까. 다음 날을 기대하며 잠드는 날이 줄어들고 다가올 내일에 긴장하며 눈 감는 밤이 잦아질수록 권태가 꿈틀거린다. 나의 소박한 꿈에 자족하자니 '나중에'가 사라지는 삶을 목격하면서 허무한 생의 그림자를 방관한다. 이것은 강제된 방관이다. 원하는 만큼 살아가는 이는 없고,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자연적 필연 앞에 무능하다. 가까워지는지 멀어지는지 어떤 식으로도 가늠하지 못할 죽음이 아른거리면서 생의 뜨거운 구덩이를 뒤덮는다. 소낙비인 줄 알았는데, 장마다. 저 먼 들판에 드리운 안개가 장판에도 자욱하다. 화롯불은 커녕 촛불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렇게 찾아온 삶의 권태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이것이 열망의 시효인가.


사랑의 시효를 말하는 일은 오히려 단순해 보인다. 설레는 마음이 오래 가길 바란 안일한 동심을 비웃는 삐딱거림으로, 떠나는 등에 조소를 띄울 수 있다. 덤덤한 태도를 갖추는 일은 이미 끝난 나의 시효를 감출 기회가 와서 성숙한 어른인 척 할 수 있을 때뿐이다. 내 안의 사랑하는 마음을 내가 지키는 일은 가능하다. 내가 돌볼 수 없는 것은 너의 마음. 그렇다면, 가거라. 떠나는 마음아.


인간이 아닌 사물이 대상이라면 열정도 권태도 온전히 내게서 비롯된다. 책이든, 글이든, 필기구든, 내가 쥐면 그만이다. 인간도, 사물도 아니라면, 그땐 어떠한가? 예술이나 학문 따위라면? 이를 대상으로도 우리는 권태를 바잡고야 마는가? 그것이 삶의 한 가운데서 비틀어져 나올 때면, 권태의 양상으로 비칠까?


아- 내겐. 내게도, 생의 열망이 있는가. 때론 절박한 마음으로 내달리지만 어느 순간 허무해진다. 성취를 갈망하는 열정을 탐하고 싶다. 그러나 이 탐욕 이면에는 평온한 매일을 그리는 또다른 탐심이 있다. 인정이 뒤따르는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면서 안락한 심정을 유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단번에 취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상에 시선을 던지니, 양극단을 오가는 추가 멈출 리도 없다. 열렬한 성취욕과 안온한 일상이 극단에 있음이 보여주는 것은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권태는 아니라는 점이다. 강렬한 도취에는 필히 권태가 따른다. 도취욕을 버리지 못하면 권태를 벗어날 수 없나보다.


잔잔하게, 바지런한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을. 허튼 상념에 젖어서 오늘의 시선을 엉뚱한 데로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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