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욕망을 벗고
옷을 좋아했다. 그 기원은 할머니가 아닐까 싶다. 나를 금이야 옥이야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매일 씻기고, 빗기고, 날이면 날마다 예쁜 옷을 사서 공주처럼 입혀주셨다. 그 옷집 이름, 무려 서울상회, 아직도 기억한다. 샤랄라하는 플로랄풍 공주 옷에 머리를 허리춤까지 길러 정성스레 땄고, 애니멜 광택이 나고 버클 달린 공주 신발 신겨 주셨다. 옷만 깨끗하게 잘 입어도 귀티가 흐르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런 옷차림 때문에 선생님들 사이에 우리 집이 부잣집으로 소문났는데 (진짜 부잣집 딸과 뒤바뀐 거였음;;) 나중에 아닌 걸로 탄로나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부잣집 딸이 아닌데 그렇게 입고 다닌 죄??)
고등학교땐 교복을 입었다. 토요일은(그땐 토요일에 학교 갔...) 자유복이었는데, 그 하루를 위해서 일주일 내내 뭘 입을까 고민하고 엄마를 달달 볶아 새 옷을 사고 그랬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내가 입고 간 옷은 바로 인싸템이 되어 그 다음주면 같은 옷을 입고 온 아이들이 몇몇 보이곤 했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그 옷을 입지 않았다. 그땐 그런 직업이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지금으로 치면 스타일리스트가 됐으면 어땠을까 지금 급하게 생각해본다. 그때 내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직업이 옷장사여서 옷가게를 하고 싶었다. 마침 공부도 하기 싫고, 성적도 그저 그래서 엄마한테 대학 안 가고 옷가게 한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해서 우리 엄마 계모인가, 의심하고 반항심에 옷가게에 대한 꿈을 접었다.
그렇다고 엄청 비싼 옷 사고 그러진 못했다. 일단 그럴 돈도 없고, 비싸다고 내 눈에 다 예뻐보이고 그러진 않았다. 내가 입는 건 죄다 보세 옷이었는데, 입고 가면 친구들이 이거 무슨 브랜드야? 이러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명품을 입는다고 소문도 났었다. (자랑 느낌 솔솔 나넹~ㅎ) 나중에 알고보니 이미테이션, 짝퉁들이었다.
옷을 제일 많이 산 건 연애 할 때랑 일이 힘들 때였다. 연애를 할 땐 예뻐보이고 싶어서 그렇다고 치고, 왜 일이 힘들수록 옷이 사고 싶었을까? 생각해본다. 일에 재미가 떨어지니 옷이라도 사고 입는 재미라도 느끼면서 버티려고 했었나 보다. 새옷을 입고 가면 다들 예쁘다, 옷 잘 입는다며 예의상 한 말일 수도 있는 말을 진짜로 받아들이고, 또 새옷을 사러 갔다. 진짜 힘든 일을 끝내고 나면 옷 사러 갔다. 아마 뭔가로 보상받고 싶었던 것 같고, 가장 손 쉬웠던 게 옷이었던 게지. 근데 새 옷 입고, 기분 좋고 그런 건 잠시였다.
술이 술을 마신다고 하나? 나중엔 옷이 옷을 불렀다. 새 옷을 입고 싶다는 욕구가 아닌 새 옷을 사고 싶은 것 같았다. 그냥 뭘 사야 할 것 같아서 옷을 샀고, 집에 가면 비슷한 옷이 집에 있기도 했다. 그니깐 옷장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옷을 사고 그랬다. 내 스타일도 아닌데 기분 전환으로 내 스타일과 다른 옷을 사면 한번은 입어도 두번은 입지 못했다. 아이들 장난감 사주면 한두번 놀다 내팽개치는 것처럼 몇번 안 입고 방치된 옷들이 넘쳐났다. 그런데도 아침에 일어나서 뭘 입을 지 고민하고, 옷장엔 입을 옷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헛헛한 날들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커져가던 풍선이 허공에서 팡, 하고 터진 느낌이다. 퇴사하고 옷에 대한 욕구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TPO와 품위 유지, 가짜 욕망을 위해 차고 넘쳤던 옷이 죄다 쓸모를 잃었다. (아직 미련을 못 버려서 쓸모 잃은 옷들을 일부 가지고 있다) 어차피 나한테 편한 옷, 나한테 잘 어울리는 옷은 하나둘 정도다. 똑같은 옷만 입었던 마크 주커버그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매일 뭐 입을까?로 머리를 싸매지 않으니 너무 편하다. (요즘은 딸의 옷을 함께 고른다) 지금은 유니폼 수준으로 몇가지 옷을 돌려 입고 있다. 옛날엔 유니폼 입는 직업은 죽어도 싫다고 했었는데(뭘 또 그렇게 싫어라 했는지,,) 지금은 유니폼 입는 직장 막 좋아질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