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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가여니 Feb 07. 2022

행복한 기억은 그저 행복한대로

  '아, 오늘 정말 좋았다' 하는 날이 있었다. 세상이 마냥 밝게 보이던 날.

  즐거운 일이 많이 계획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고, 보고 싶었던 영화도 같이 영화관에서 보기로 했다. 중간에 시간이 뜨면 카페에 가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려야지, 하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하며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었는데 이 날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다.

  그 날 하루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즐거운 하루였다. 몇 년 만에 보는 친구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얘기가 정말 잘 통했다. 관심사도 비슷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예매해 두었던 영화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재밌었다. 친구와 영화를 가지고도 신나게 이야기를 했다. 오고 가는 지하철에서는 가져갔던 책을 읽었다. 1분 1초가 완벽했다. 평소에는 별 감흥이 없었던 길거리의 모습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활기차 보였다. '세상에는 정말 재밌는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아.' 이 즐거운 것을 다 해 보려면 하루 하루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왔다. 개운하게 씻고 침대에 누우니 너무나도 편안하고 포근했다. 행복했다. 부정적인 감정이 끼어들 틈은 1cm도 없었다. 매일이 이렇게 흘러가면 좋을텐데.


  그런데 갑자기 내가 애써 모른 척하려고 했던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 불안함을 아는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마음껏 누린 후, '아, 행복하다'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고 이렇게만 살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 직후에 오는 이상한 불안함. 그 불안함은 바로 앞으로 올 시간에 대한 불안함이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이 있고, 행복한 하루가 있으면 힘들고 견디기 힘든 하루가 있다. 인생에서의 행복과 고통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고 어디서 들은 것만 같다. 마치 '오늘 행복했지? 좋았지? 잘 누렸지? 그럼 이제 각오해. 힘든 거 올거야.' 하며 누군가가 사악하게 지켜만 보는 것 같은 기분. 내가 미래의 행복한 시간들을 당겨서 쓴 것만 같은 기분. '세상살이는 힘들다던데,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이런 날들이 지나면 앞으로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이 오는 것이 아닐까?'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안일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들뜨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앞으로 이런 날은 없을 수도 있어. 침착해. 기분 좋다고 붕 뜨지 말자. 이 행복감을 씻어내야 해.' 구름 위를 붕붕 떠다니던 나에게 나는 현실로 내려오라고 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그 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기분이 뒤숭숭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을 썼다. 명상을 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불안함과 행복했던 기억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도 자신을 어떻게든 괴롭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눈을 감고 그저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 곧 힘든 날들이 온다고 경고하며 사악하게 웃던 존재와는 달리,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나타나서 말했다. '너한테 그냥 행복한 하루 선물해 준거야.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그냥 이 감정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 돼. 네가 할 일을 알려줄까? 편안하게 잠이 드는 거야. 그러면 돼. 힘든 날이 올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네 앞에 벌어진 일이 아니잖아. 그런 날이 오면 너는 또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걸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네가 행복했으면 해서 행복한 하루를 선물해 줬는데 그걸 못 누리면 어떡해. 이제 기분 좋게 잠들기만 하면 돼. 그럼 되는 거야.'

  나는 행복한 하루를 선물로 받았다. 어떤 존재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경고하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고통이 찾아올 거란 복선도 아니고, 그냥 오늘은 선물을 받은 것이다. 행복한 기억들은 그저 잘 간직하고 있으면 된다. '내가 이래도 될 자격이 있나. 나중에 대가를 치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들은 저쪽으로 치워버리고 그 행복을 온전히 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내가 걱정하던 그런 고통과 힘듦이 와도 나는 그 기억들을 발판 삼아 잘 견뎌내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는 내가 행복하길 바랬다. 그래서 행복한 하루를 선물로 줬다. 그 선물을 나는 잘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순간들이 오면 그걸 내 마음 속 서랍에 소중하게 넣어 놓기로 했다. 내 손으로 그걸 바닥에 내려 놓고 발로 밟아 깨뜨리지 않기로 했다. 물론 내 삐뚫어진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서랍이 있다고 생각하고 서랍을 열어 기억을 넣고 보관하는 상상을 하면 조금은 도움이 된다. 나에게 때때로 주어지는 선물 같은 시간들은 그저 그대로 내가 온전히 간직할 수 있길 바란다. 아직 오지도 않은 날들 때문에 실체도 없는 불안함을 느끼지 않길 바란다.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한 기억은 그저 행복한 대로 간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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