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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은 Dec 20. 2024

도쿄의 밤도 숨차다

여기 그 길


  딸아이 이름은 ‘보나’이다. 보나는 세례명이기도 하다. 가톨릭신자인 딸아이는 대학에서 전통연희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무속(巫俗) 관련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누구나 인생의 내일,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맞는다. 그 오늘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반복처럼 찾아오기도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사건으로 부딪쳐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아주 서서히 이미 정해진 길을 향해 한 치 흔들림 없이 집요하게 걸어가는 중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체념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전진(前進)의 원천이기도 하다.

  첫 밤, 전날 잠을 설쳤다. 여행 전날의 들뜸보다 불분명한 형체가 주는 두려움이 대부분이었다. 아침 일찍 비행기로 일본 나리타공항을 혼자 가야 한다. 오전 4시에 일어나 공항버스 타는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날이 밝지 않았다. 예정에 없던 도쿄행이다. 딸아이 개인 공연에 함께 가기로 한 이가 사정상 못 가게 되었고, 갈 수 있냐고 내게 물어왔을 때 덥석 그러겠다고 했다. 딸과 기억에 남을만한 둘만의 추억이 없고, 앞으로 그런 시간은 힘들 거라 여기고 있던 차였다. 다니는 직장에 갑자기 휴가를 내느라 힘들었으나 내겐 이 기회를 잡는 게 우선이고 절실했다. 가는 거야 비행기 타면 가겠지만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내심 떨렸다. 보나의 조언과 응원을 받고 입국신고서 작성에 필요한 호텔 정보 등을 챙겨 비행기에 올랐다. 보나는 오후 비행기로 온다. 동승자가 바뀌면서 요금과 시간표가 달라져 따로 가고 올 때도 따로 와야 한다. 돌아오는 일은 겁나지 않는다. 짐을 따로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줄이려고 기내용 가방으로 준비했다. 

  그렇게 2시간 30분 비행해 나리타공항에 닿았다. 사람들을 따라 검색대를 통과해 무사히 2 터미널 로비로 나왔다. 무료와이파이가 잡혀 보나에게 도착을 알렸다. 대단한 일을 해낸 듯 잠깐 뿌듯했다. 여기서 오후 5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밥을 사 먹고 돌아다니다 지쳐 의자에 앉아 졸기도 하고, 걸어서 3 터미널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어둠이 잠식한 공간은 낮과는 다른 얼굴로 다가서기도 한다. 그로 인해 밤은 때로 무모하고 자유롭다. 해 질 녘이 되어 보나는 1 터미널로 도착했다. 호텔을 찾아가기 위해 리무진버스에 오르고 출발하는 사이 사방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보나는 휴대폰으로 정거장과 숙소를 확인한다. 어둠에 묻힌 도시의 불빛을 지나치며 어느 빌딩 숲 사이로 내려섰다. 휴대폰지도를 보며 걸었다. 고가 아래로 가로지르는 도로를 생각 못하고 같은 길을 몇 번이나 오락가락했다. 계단을 통해 밑으로 내려가 우회전할 수 있었다. 고가도로 아래 노숙자들의 거처가 길게 늘어서 있어 놀랐다. 익숙한 듯 낯선 거리를 걸어 신주쿠에 있는 뉴시티 호텔에 도착, 10층에 짐을 풀었다. 창밖으로 두 팔 올린 듯한 모양의 도쿄도청 건물이 보인다.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식당이 있을 법해 가서 물어보니 불 켜진 서너 곳마다 주점이었다. 포기하고 편의점을 찾았다. 종류도 다양한 즉석 음식이 가득하다. 포장마차에서처럼 따뜻한 어묵 국물도 있다. 내 의견을 말하기도 하지만 보나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진작 마음먹었다. 이를테면 연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비슷하다.

  둘째 밤, 낮의 시간은 다 밤을 향해 흐른다. 조식은 호텔에서 해결한다. 도로와 마주한 1층 창가 자리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느긋하게 아침을 즐긴다. 간단히 준비하고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 있는 메이지신궁과 도쿄타워 그리고 신주쿠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한적한 길을 지나 찾은 메이지 신궁 입구는 날씨 영향인지 어둡고 습한 정글 같다. 정문이 아닌 옆이나 후문인 탓도 있겠다. 인적도 거의 없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 정문 쪽으로 걸어 나오니 사람들이 더러 보였다. 낮의 도쿄타워는 명성과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니겠지 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그냥 철탑 같았다. 중간 전망대까지만 올라가 보았다. 멀리 도시 깊숙이 들어온 바다가 보인다. 발밑 통유리로 된 작은 사각형을 통해 보니 아찔한 높이가 느껴진다. 단체관람으로 사람이 많았다. 길가에 궁금증을 일으키는 건물이 있어 들어갔다. 보나가 물어보니 성공회 성당이란다. 매달리듯 공중에 걸린 십자가가 강렬했다. 신주쿠 가기 전 신중하게 고른 라멘 집도 실패다. 반도 못 먹고 나왔다. 

  나는 대도시의 화려함과 북적거림이 거북하다. 사람에 치이고, 상품에 치여서 정신없고 쉬 피곤해져 금방 지친다. 도쿄도청 전망대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우리 객실에서 마주 보이는 쌍둥이 빌딩이다. 45층 북쪽 전망대에 올랐다. 무채색이던 빌딩 숲이 어두워지며 하나 둘 불빛을 달자 꽃처럼 피어난다.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치기 시작한다. 무당벌레 같은 자동차들이 깜박이며 빌딩사이를 오가고, 불빛과 물빛이 어우러진 도시는 안개에 싸여 떠다니듯 일렁인다. 비도 내려 도청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1층으로 내려가 방문증을 받아 목에 걸고 32층 직원 식당을 찾아갔다. 다양한 메뉴들이 모형으로 진열되어 있었지만 늦은 시간이어서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이 몇 가지 없었다. 재밌는 경험이라 여기며 즐겼다. 우산 없이 비 오는 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의사소통이 자유롭지 않은 나는 그림자처럼 보나 옆에 있다. 약자가 된 기분이지만 나쁘지 않다.  

  셋째 밤, 아침부터 해가 쨍쨍했다. 우에노공원과 도쿄국립박물관을 보고 돌아오기로 한다. 오늘 밤에는 예정된 방악잡지 30주년 기념식에 가야 한다. 시간을 계산하고 우에노공원 가기 전 아메요코시장을 구경했다. 시장은 어디나 활력이 넘친다. 손님을 호객하는 사람이 ‘대박 맛있어, 졸라 맛있어’ 한다. 풋 웃음이 나왔다. 넓은 공원 주변은 시끌벅적하다. 우에노공원에는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모델이기도 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다소 희화(戱化)한 동상이 있다. 커다란 까마귀들이 제집인양 자연스럽다. 향을 피워대는 의식(儀式) 공간이 있고, 동물원이 있고, 연못이 있고 이어진 호수가 있는데 보나가 갑자기 보트를 타자고 한다. 내키지 않아 다음에 타자고 하는데도 의외로 고집을 부려 반시간만 타기로 하였다. 발로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간다. 멀리서 바라볼 때와 달리 아슬아슬한 재미가 있다. 도쿄국립박물관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데 사정상 단념하고 다시 시장으로 내려왔다. 골목을 돌아다니다 회전초밥 집에 들어갔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적어 실패하지 않으려고 대체로 무난한 선택을 하는 편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보나가 권하는 연어알과 말고기 초밥을 입에 넣었다. 처음 먹어봤는데 담백하니 괜찮았다. 둘이서 양껏 먹고도 ¥1,400 나왔다. 가장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번 방문 목적을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다리미까지 챙겨 온 줄 몰랐다. 한복을 다리는 동안 보나는 머리와 화장을 한다. 매일 신주쿠역을 오가는 호텔 버스로 신주쿠역까지, 전철 타고 걸어서 행사장소를 찾아간다. 가스미가세키 빌딩 35층, 도카이대학 교우회관이다. 「방악저널」은 1987년 2월 창간된 이래 지금까지 매월 발행되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 전통음악정보지다. 30주년 기념식인 오늘 한국전통국악인으로 소개받고 특별공연을 하게 된다. 늦을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빌딩 숲을 헤치며 찾아가는 본인 마음이 더 조급했을 것이다. 미로 같은 벽 사이에서 엘리베이터를 찾아 북적이는 행사장에 도착하니 마음이 놓인다. 보나는 다른 공간에서 잠깐 리허설을 했다. 소개에 따라 인사말과 함께 간단히 진도북춤을 설명하고 이어 공연을 선보였다. MR이 잘 들리지 않아 많이 틀렸다고 하면서도 홀가분해 보인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창가 한쪽에서 들어온 축하화환과 꽃다발을 풀어 작은 다발로 만들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주고받는 표정 모두 환하다. 좋은 생각 같다. 어깨에 북을 메고, 의상 및 준비물 담은 가방을 끌고, 전철로 다시 신주쿠역, 신주쿠역에서 가까스로 마지막 호텔버스를 잡아타고 무사히 숙소에 안착했다. 행사장 뷔페 음식이 있었으나 서로 긴장해서 먹지 못했다. 우리의 구내식당이 된 편의점에 들러 마파두부와 야채샐러드, 튀김 등을 사 와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올 때처럼 따로 비행기를 타야 한다. 내 탑승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 움직였다. 신주쿠역 부근 공항버스정류장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길거리에서 가방을 펼치고 보나 짐 일부를 내 가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집으로 돌아와 지난밤을 뒤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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