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그 길
월요일. 새 아침이 반갑기만 하다. 여행 나흘째인 오늘은 로마로 들어간다. 오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버스로 미켈란젤로 광장에 올랐다. 오렌지색 피렌체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어젯밤 걸었던 강과 다리, 성당, 종탑이 전부 시야에 잡힌다. 이탈리아에서 자주 부딪치는 다비드상이 광장 한 편에 우뚝 서 있다. 평일 이른 시간 탓인지 사람이 많지 않다. 버스로 온 길을 되짚어 내려와 근처 가죽시장을 찾았다. 젊은 남자들이 지날 때마다 호객을 한다. 눈치 살피며 일본어와 중국어, 한국어로 번갈아 말을 던져온다. 웃음으로 대답한다. 일행이 작은 숄더백을 흥정해 구입하는 것을 지켜본다.
예매한 기차시간에 맞춰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이동했다. 휴일과는 또 다른 활기가 지나는 도심 사이로 느껴졌다. 노인들이 애완동물과 함께 있는 모습도 흔하게 보인다. 북적거리는 역 주위로 짐을 조심하라는 안내문구가 붙어있고 곳곳에 경찰들이 보인다. 햄버거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가득히 앉거나 또는 서서 오로지 먹기에 열중한다. 그 북새통 안으로 우리도 섞였다. 우리를 로마로 데려다줄 기차는 넓고 쾌적하였다. 가운데 통로를 두고 한쪽은 좌석 둘, 다른 쪽은 하나이다. 일정한 진동으로 두 시간여를 달려 로마 떼르미니역에 도착하였다. 버스로 숙소까지 가는 시간이 비슷하여 걸어가기로 했다. 길이 대부분 돌바닥이라 캐리어가 흔들리고 바퀴 소리가 요란하였다. 역 주변을 벗어나자 버려진 뒷골목 같은 분위기였다. 냄새나는 고가 밑을 지나고 기차(트램) 선로를 건너고, 낙서 가득한 벽을 지나서 한 건물 앞에 멈추었다. 오후 4시, 인도가 좁아 행인이 지나가려면 도로로 내려서야 한다.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려 라파엘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반겨주는 숙소에 들었다. 3층이라 우선 채광이 좋았다. 방 둘에 그리 넓지 않은 구조이나 전체적으로 흰색 벽과 가구로 꾸며져 밝고 깨끗해 보였다. 벽 중앙에 걸린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그림도 잘 어울린다.
여행 중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 우산을 챙겨 지도에 안내된 근처 피자가게를 찾아 좁고 어두운 골목길 탐색에 나섰다. 당초에는 여행경비를 아낄 겸 웬만하면 직접 조리해서 식사를 해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식재료나 조리 기구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축축한 물비린내와 비 맞는 기분이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정말 간을 세게 해서인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재료 맛을 그렇게 느껴서인지 모르겠지만 피자 역시 짠맛이 강하게 미각을 자극하였다.
화요일. 오전 7시, 하루 에너지 충전을 위해 간단하게나마 거의 의무감으로 아침을 먹는다. 오늘은 ‘평화를 구하는 기도’로 알려진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 아시시에서 보내기로 한다. 아시시는 프란치스코수도회 제2회로 불리는 클라라회를 창설한 성녀 클라라(글라라)의 고향이기도 하다. 트램을 타고 테르미니역에 내려 다시 기차를 갈아타서 두 시간 정도 가야 한다. 중간에 역무원이 차표 검사를 다녔다. 아무 생각 없이 들떠있던 우리는 기차를 갈아타며 기계에다 표를 커트하지 않아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인정에 호소하며 사정해도 소용이 없다. 조금 깎아는 주겠다고 한 모양이다. 아마도 이런 일이 드물지 않은 듯했다. 네 명 합하여 50유로를 벌금으로 내야 했다. 우리에게는 두 끼니 정도 해결할 정도의 큰 금액이었다. 한편 억울한 속내도 없지 않았으나 잊어버리기로 했다. 옆 자리 앉은 금발의 여인이 안타까웠는지 손짓까지 더해가며 열심히 설명을 한다. 고맙다고 인사했다.
우리의 간이역 분위기인 ‘ASSISI’는 소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인구 3만 안팎의 아시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넓은 평원 위로 우뚝 솟은 수바시오산에 위치해 있다. 중세 도시의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성 프란치스코를 비롯한 가톨릭 성지로 알려져 순례자와 관광객이 꾸준히 찾는 곳이다. 아시시는 고요 그 자체였다. 로카 마조레 요새의 성벽 위를 날던 새의 괴상한 소리도, 코무네광장으로 왁자하게 내려지던 단체 관광객의 소란도, 갖가지 공예품이 색색의 꽃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상점들도 모두 고요 안에 있었다. 서로 손 닿을 듯 이어지는 돌계단과 비탈길, 하얀 성벽과 대성당들이 거대한 PAX(평화) 안에 고요했다.
지금도 산 프란체스코 성당 언덕에 여전히 있을, 고개 숙인 청동 기마상이 오래 마음을 흔들었다. 산 프란체스코 대성당 지하에서 내 영혼을 위해 짧은 기도문을 적었다. 그리고 산타 키아라(성 글라라) 성당에서는 엄마 위해 촛불 하나를 밝혔다. 가까이 있는 산 루피노 대성당은 아시시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아시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루피노 성인을 기리기 위해 1,140년에 지어졌다. 프란체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가 세례 받은 성당이기도 하다. 기원전 1세기에 세워진 미네르바 신전이 있는 코무네광장으로 다시 내려왔다. 현재 교회로 사용하고 있는 신전 내부 모습에서 묘한 이질감을 마주했다. 멀리 움브리아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 있으니 세상이 멈추기라도 할 듯 움직임이 둔하다. 나른함 같은 평화가 일렁인다.
수요일. 현지시간과 한국시간이 나란히 휴대폰 화면에 표시된다. 8시간 시차가 난다. 오늘도 아침 일찍 움직였다. 매주 수요일에 있는 바티칸 관광객을 위한 교황 알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바티칸시국은 인구 1,000명의 유엔 독립국가로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면서 가장 큰 성당과 박물관이 있는 나라이다. 그동안 사진이나 TV화면으로만 보았던 성 베드로 성당 광장에 서있자니 가슴이 벅찼다. 중앙의 오벨리스크와 광장 양쪽으로 둘러선 주랑 위, 하늘을 배경으로 140인의 성인상이 내려다보듯 느껴진다. 공항에서 하듯 검문검색대를 통과해 입장하였다. 오늘 교황의 일반알현이 이루어지는 바오로 6세 홀 앞으로 긴 줄의 사람들 갈래가 점점 많아지며 늘어나고 있다. 사전에 교황알현 신청을 하였으나 현장에서 입장권으로 바꾸지 못한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밀려나야 했다. 어찌할 바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한국인 신부를 발견하고 용기 내 말을 걸었다. 본인도 처음이고 그저 주교님을 기다리는 중이라며 미안해한다. 달리 해결을 못하고 노심초사하는 우리 앞에 마침 모습을 보인 대전교구 주교께 염치 불고하고 사정하였다. 선뜻 앞장선 그분의 도움으로, 그럼에도 방지턱 같은 조마조마한 순간을 몇 번 지나 극적으로 알현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바오로 6세 홀은 성 베드로 광장 대신 일반 알현을 위한 건물로 최대 6,300명이 들어간다. 가톨릭은 64년경 초대 교황 베드로부터 2017년 266대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이어진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우리는 그저 교황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무대 중앙의 황동과 청동으로 제작한 ‘그리스도의 부활’ 조각상까지가 아득히 멀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나라 말들이 들릴 때마다 여기저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교황청 경비는 스위스 근위병이 맡고 있다. 과거 로마를 침략한 세력으로부터 스위스 용병만이 끝까지 남아 교황을 지켰던,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지금까지 창과 칼만으로 바티칸을 지키고 있다. 근위병을 뽑는 조건도 출신 지역과 키, 나이까지 까다롭다. 관광객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피에로가 연상되는 그들의 독특한 복장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하였다고 한다. 큰일을 무사히 해낸 뿌듯함과 왠지 모를 허전함까지 붙안고 베드로성당 밖으로 나왔다. 헬로우트래블로 예약한 바티칸박물관 투어가이드를 만나기 앞서 끼니 해결할 식당을 찾았다. 근처 파스타와 감자튀김, 연어샐러드는 티몬스테이크만큼이나 비쌌다.
오후 1시, 지하철 오따비아노역 근처 길거리에서 바티칸박물관 투어가이드를 만났다. 사전 예약한 두세 팀까지 현장에서 돈을 지불하고 출발하였다. 바티칸의 국경이라 할 수 있는 1500년대 만들어진 성벽을 따라 걸어가니, 교황청 문장과 양쪽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동상을 받치고 있는 성문입구가 보였다. 간단한 안내 후 다시 검색대 통과 후 입장하였다. 다른 관광객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이어폰으로 가이드 설명을 들으며 박물관투어가 시작된다. 바티칸박물관은 꼬박 일주일을 관람해도 부족할 거라고 한다. 회화관을 비롯해 아폴론 동상과 라오콘 군상이 전하는 걸작의 감동을 시작으로 동물의 방, 뮤즈의 방, 원형의 방, 촛대 방, 라파엘로의 방, 콘스탄티누스의 방, 서명의 방 등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가로길이 8미터가 넘는 프레스코 벽화 ‘아테네 학당’ 속에서 그리스 철학자를 찾아보고, 한차례 테러 이후 방탄유리에 싸인 진품 피에타상과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벽화 아래에 주저앉았을 때는 의식 활동이 마비되듯 멍해졌다. 바티칸 박물관의 절정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가 보여주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의 여운은 여행에서 돌아와 미켈란젤로 전시를 찾아보게 하였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완성하기까지 그는 하루 18시간, 4년 6개월 동안 천장에 매달리다시피 작업하였다. 조각가이며 화가이고, 건축가며 시인이기도 하여 전인(全人)으로 불리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말을 옮겨본다.
‘가장 위험한 일은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아 간단하게 도달해 버리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미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아내가 있다. 그 아내의 이름은 예술이요, 자식의 이름은 작품이다.’ 한 거장의 예술혼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자취이다.
숨차게 달려온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한국인 수녀님이 있는 베드로 성당 성물방으로 갔다. 소통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각자 간직하거나 가족, 이웃에게 선물할 기념품을 골랐다. 어느새 달콤하기까지 한 어둠이 내리고 ‘천사의 성’ 다리 위에서 야경을 즐겼다. 그리고 버스로 몇 정류장 지나 내려서니 밤의 콜로세움이 오렌지 빛을 발산하며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서기 80년 로마제국 시대 완공한 콜로세움은 최대 8만 관중을 수용하던 거대 원형경기장이다. 어둠 속 콜로세움은 명성에 비해 잠자는 짐승처럼 얌전해 보인다.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다리도 쉴 겸 돌계단에 쭈그려 앉아 눈으로만 즐겼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지쳤지만 근처 나보나 광장과 트레비분수를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세 개의 분수로 유명한 길쭉한 타원형 모양인 나보나 광장 벤치에 앉아 의식행사처럼 젤라토를 먹으며 잠시 쉬었다. 조명을 받아서인지 유난히 비취색으로 빛나는 트레비분수 주위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위로 솟는 보통 분수와 다르게 트레비 분수는 위에서 아래로 물이 쏟아져 내린다. 한 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오게 된다는 말이 있으니 우리도 분수를 등지고 힘껏 동전을 던지며 피로까지 날려 보냈다.
목요일. 다른 날과 달리 조금 늦은 10시 숙소를 나섰다. 여행 막바지, 가장 여유로운 아침을 맞은 기분이다. 그리스어 ‘판테이온’ 모든 신을 위한 신전을 찾았다. 좁은 골목과 상가들 사이로 불쑥 나타난 판테온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기원전 25년에 처음 세웠고 서기 110년경 재건했다는 판테온은 전 세계에서도 당대 남아있는 건축물 중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쭉 사용했고 7세기 이후부터 가톨릭교회 성당으로 쓰고 있다. 입구 청동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빈 원형 공간이다. 원통형 벽체에 반구형 돔 천장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빛이 들어와 안을 밝히고 있다. 구멍의 지름이 9미터나 된다는데 밑에서 보면 그냥 큰 동전 만하게 보인다. 라파엘로 유해가 매장된 벽감(壁龕)을 비롯해 다양한 사연과 조각으로 장식된 벽감들이 빙 둘러져 있다. 2,000년을 지나오며 글자하나, 벽돌 하나에 저마다 품고 있을 역사의 무게와 깊이는 찰나의 마주침으로 짐작조차 가당찮아 보인다. 내부에 사람이 많았으나 이상하게 적막한 기분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기는 전혀 다른 세상의 공간 같다.
마차들이 관광객을 기다리는 떠들썩한 광장으로 연주곡이 퍼졌다. 두 사람이 연주하던 재즈 블루스 풍 선율이 광장을 벗어나 상가 골목까지 따라왔다. 이어 영화 ‘로마의 휴일’로 알려진 스페인광장 계단에 앉았다. 스페인 대사관이 자리 잡으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괴테, 발자크, 바그너 등 예술가들이 즐겨 찾기도 했던 곳이다. 불쑥 알려진 곳을 찾아다니는 이유가 뭘까, 무엇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으로 물줄기 뿜는 분수와 길 건너 명품브랜드 숍이 즐비한 건물을 바라보며, 어떤 인연으로 이 먼 곳까지 왔을까 하는 맥없는 감상에 잠겨 보았다.
오후 3시, 아쉬움 반 귀소(歸巢)의 설렘 반이 섞인 마음으로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떼르미니역에서 공항버스로 로마 피우미치노 공항(다빈치공항)까지 이동했다. 버스 안, 가만히 라디오 소리가 스며들었다. 귀에 익은 팝 음악이 흘러나온다. 귀에 익은 듯했지만 노래하는 사람, 제목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혹시나 남자 진행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서서히 시들해지니 소리마저 그저 스치는 하나의 풍경이 된다. 공항에서 하릴없이 남은 시간을 보낸다. 한 시간 지연된 비행기가 오후 9시 10분, 인천공항을 향해 날아올랐다. 11시간 비행 예정이다.
금요일. 기내는 거대한 잠수정 같다. 수백 명의 승객이 한정된 공간에 공동운명체로 일정시간 함께하고 있으나 철저하게 각각의 사람 자신이 견디어내는 시간이다. 흐르지 않는 깊은 물속 같은 시간을 쉽게 보내려면 잠을 좀 자면 좋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영화, TV방송 골라보기도 망망대해 같은 시간을 헤엄쳐나가기에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잠시 서 있어도 되는 좌석 뒤쪽 공간을 오가며 혼자의 기분을 밀어내보는 것이다. 앞 좌석과 통로중앙 화면에서는 친절하게 남은 비행거리, 남은 비행시간, 도착예정시각, 목적지현재시각, 출발지현재시각을 시시각각 표시한다. 지구 바깥 어느 상공을 어떤 속도로 지나는가도 고도, 시속, 바깥온도까지 알려준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또한 상관하며 누가 정했는지 모를 시간이 그 사이로 흘러가고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신호라도 받은 듯 깨어났다.
8시간의 시차로 인해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하니 오후 4시였다. 짐 찾고 입국 심사하면서 엑스레이 검사대까지 통과하였다. 1월 하순, 하늘이 맑았다. 우리가 없던 지난주 혹한이 지나갔다고 한다. 내일모레가 설날이다. 무슨 일이 닥쳐도 감당할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어디에서 온 자신감인지 분명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
어느덧 일 년 하고도 여러 달이 지났다. 느리고 게으른 핑계를 그만큼 오래 여행하는 기분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위로한다.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이런 말이 하고 싶은 날이면 아시시 성당의 종소리를 듣는다. 희미하게 멀어지는 용기가 잠깐 또 선명하게 일어선다. 그래, 크고 무거운 문이 닫히는 독특한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