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있다"는 대한민국 3대 거짓말
19살 대학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뒤 재수를 선택했다. 후보로 뒤늦게 붙긴 했지만 그야말로 점수를 맞춰서 선택했던 터라, 입학을 한들 이 전공을 해낼 4년이 그려지지 않았다.
재수를 시작하며 포기했던 수학을 다시 집어 들면서 5등급에서 2등급이란 쾌거를 이뤘다. 덕분에 총점도 상당히 올랐다. "삼수는 죽어도 못한다"며 가, 나, 다 군 지원할 때 10점, 20점, 30점 이상 낮춰 지원했다. 6차에서 7차 교육과정으로 넘어가던 때였는데 어째 줄을 선 곳마다 경쟁률이 20:1, 30대:1, 급기야 39:1에 달했다. 결국 세 군데 모두 떨어졌다.
"다들 늦었다"고 했다. "여자애가 삼수를 하면 어떡하냐. 그럼 언제 대학 가고 언제 졸업해서 언제 시집가냐. 애는 언제 낳고 언제 키우냐"
고작 스물한 살의 나이에, 아직 얼굴도 모르는 신랑감을 두고 걱정을 하며, 이번 달 생리통이나 없었으면 좋겠건만, 난자 건강까지 챙겨야 하는 건가.
이듬해 대학생이 됐지만 "늦었다" 시리즈는 계속됐다. 졸업하면 스물여섯. 여자 취준생치고는 "늦다"는 것이다. 대학 시절, 다들 알바라도 해서 간다는 여행이나 어학연수 이런 것들은 꿈도 꾸지 않았다. 좋은 성적으로 빨리 졸업하고 빨리 취업 전선에 나서면 더 이상 뒤처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휴학 없이 곧바로 대학을 졸업했고 떡하니 취업은 되지 않았다. 인턴 경력이라도 쌓으면서 공백을 없애려 했다. 어떤 스펙도 안 남기면,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그 기간의 내 인생이 부정당할 것만 같았다.
주경야독을 하며 7전 8기 끝에 스물일곱에 언론고시에 합격했고, 돌아온 얘기는 또다시 "늦었다"였다.
"여자 나이 서른 전에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윤리 강령인가. 공부하고 취업했더니 이번에는 짝을 만나라네. 이게 나 혼자만의 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인가.
소개팅도 해봤지만 힘든 기자 초년생에게 주말마다 지속적인 데이트는 불가능했다. 첫 만남 자리에서 노트북 꺼내 기사 쓴 적도 있다.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마냥에 연애는 귀찮기만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톡홀름 증후군인지 첫 사수와 결혼을 했고, "늦었다"는 결혼 타이밍을 스물아홉에 가까스로 맞췄다.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기다리는 건 또 "늦었다"는 말이었다. "얼른 아이를 가져라. 옛날에는 스물에 애 낳았다. 둘을 낳으려면 지금 빨리 첫째를 낳아야 한다"
결혼 뒤 아이가 생기지 않는 5년은 참 가혹한 시간이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죽도록 살고 있는데 난 왜 이렇게 항상 늦기만 한 인생인 걸까.
도대체 "늦었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세상은 다들 빨리빨리 하라고 한다
도무지 근본도 없는 기준에 맞춰서 다들 빨리빨리 하라고 한다
이제는 안다.
대한민국의 3대 거짓말이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의 3대 거짓말"
첫 번째, 대학 가면 남친(여친) 생긴다.
두 번째, 대학 가면 살 빠진다.
세 번째,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팩트 체크 들어간다.
첫 번째. "대학 가면 애인 생긴다?"
대학을 가서 애인이 생기는 게 아니라 인연이 닿는 애들끼리 연인이 되는 것이다. 재수, 삼수하며 대학 못 갔던 나도 애인은 생겼다.
두 번째. 대학 가면 살 빠진다?
대학 가면 신입생 OT 때부터 찐다. 술 먹고, 다음날 해장하느라 먹고, 속 쓰려서 먹고, 속 풀려서 술 마시고, 술 푸느라 먹고.. 살은 체질이고 노력이다. 대학교 정문 들어선다고 내 몸의 지방들이 알아서 굿바이를 외쳐줄 일은 없다. 대학 가면 살 빠진다고? 대학교 근처 술집, 밥집때문에 살이 안 빠진다. 아니 못 뺀다.
세 번째.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어른들은 늘 그랬다.
일단 대학부터 가고 나서 해라.
일단 결혼부터 하고. 일단 아이부터 낳고..
지금도 늦었으니, 더 늦기 전에, 모든 건 다 때가 있으니. 때를 놓치면 힘들다고.
"살아봐서 안다"는 어른들이, 덜 고생하라고 해주는 조언일 테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도 늦었으니 빨리해" 그 말은 참 잔인하게 다가왔다.
성공이나 실패의 정의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모두 다르다. 이런 모호한 기준을 두고 편 가르기를 할 때는 대부분 ‘시간’과 관련돼 있다. 입시,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등 아이에서 어른이 돼가는 과정에서 하나씩 열게 되는 일종의 '문'마다 우리 사회는 상당히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다. 만약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루저’라는 낙인이 찍힌다.
대학에 가야 하는 타이밍, 어학 자격증을 따야 하는 타이밍, 집을 사야 하는 타이밍, 주식이나 코인에 투자해야 하는 타이밍 또 요새는 신입사원들 들어오면 "골프를 지금부터 배워야 한다"며 교육한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야 사장님이 필드 가자고 할 때 나갈 수 있다며, 골프 레슨비 한 푼 안보 태주고 야근은 야근대로 시키면서. 골프를 하지 않으면 라인을 못 타는(?) 외톨이가 된다.
직장뿐이라. 첫째가 다섯 살이 되는 순간 엄마 세계에서는 입시 전쟁(?) 서막이 오른다. "영어유치원을 보내야 한다, 더 늦으면 안 된다" 아이가 한해 한해 클 때마다, 축복되신 데드라인이 정해진 숙제만 가득하다. 코딩을 시켜야 한다. 논술을 해야 한다. 문해력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모든 건 선택의 영역이다. 그러나 어떤 타이밍에 대한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보이지 않는 social schedule에 이끌려 발걸음을 재촉하고만 있다.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12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는 노래처럼, 일정한 시간에 닫히는 그 문 틈을 통과하지 못하면 패배자가 돼버린다.
남들이 하고 있는 걸 내가 하고 있지 않는다면 뒤처지고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죄책감, 자격지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재수를 한 것은 학교에 붙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을지라도 '대학에 떨어진 루저'가 됐다. 결혼 뒤에는 일부러 아이를 안 가진 게 아닌데, '애도 못 낳는 여성'이 돼버렸다.
성인이 되는 길목에 실패자로 낙인찍혔던 열아홉 살.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지금,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결혼도 잘했고, 아이도 잘 낳았다. 하나만 낳아도 애국자 소리 듣는데 둘이나 낳았다. 결국 삼수까지 했지만 재수 없이(?) 제때 대학교에 진학한 친구들보다 적성을 잘 찾아서 원하던 직업을 가졌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부수입도 꽤나 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 스스로 잘 아니까 이 모든 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그래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세상에는 늦은 때란 없다고.
우리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이 아니다. 알에서 부화돼 양계장으로 끌려가, 팔리기 위한 무게를 맞추려 때맞춰 주사 맞고 살찌워야 하는 닭도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산다. 모든 삶에는 각자의 시간을 지니고 있다. 발은 빠르지만 손은 느릴 수도 있고, 말은 잘 못해도 글을 잘 쓰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조금 빨리 자기 길을 찾고, 조금 늦게 찾는다. 또 누군가는 빨리 찾았지만, 더 나은 길을 찾아 다시 모험을 시작할 수도 있다.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이 바뀔 수도 있다. 그러면 나의 길에 정착하기까지는 또다시 시간이 걸린다. 그렇다고 이것이 실패한 인생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개개인의 속도와 성향을 무시한 채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만든 사회적 스케줄을 강요하는 순간, 애정 어린 조언이 아닌, 강압적인 폭력이 되고 만다.
수능 점수, 토익 점수, 연봉, 아파트 평수 등 모든 게 숫자로 평가받는 이 사회에서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만이라도 관대해질 수 있길. 그 사회적 관대함은 외부에서 나로 쏠려져 있는 시선을, 내가 내 안을 바라보도록 돌려준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더 나 자신을 탐구하도록 만든다. 이는 내가 가진 장점이나 역량에 집중하도록 하고, 결국 나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만든다.
결혼이나 출산 뒤 몇 년 정도는 육아와 가사에 집중하더라도 그것이 경력 단절이나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 아닌, 직업적 특수성을 집중적으로 해낸 것이라는 당연한 상식 같은 것들이 널리 통용된다면 엄마, 워킹맘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바뀌지 않을까.
어느 인생에 늦은 때란 없다. 자기 때만 있을 뿐이다.
언제 시작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오래 할 수 있는가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근본 없는 사회적 스케줄을 맞추느라 늘 발동동 거리며 숨 가쁘게 사는 것, 허겁지겁 사는 건 잘 사는 게 아니다. 각자 얼굴만큼이나 개성을 가진 다양한 시간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먼저 가면 간대로, 늦으면 늦는 대로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 찰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