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로서의 사랑을 되찾기 위하여.
우리는 사랑하는데 왜 불안할까?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고 사람을 치료하는데,
왜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계속 불안할까?
사랑과 욕망 그리고 불안,
이 세 가지 삶의 핵심 단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삶의 주변을 서성거린다.
그 와중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과연 우리에게 완벽하게 순수한 사랑의 형태란 것이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가장 이타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하면 아마도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처음으로 안을 때일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열리고 그 이전까지 경험했던 모든 사랑이 마음속에서 뭉클하게 피어오른 순간.
생명의 기운과 빛나는 에너지가 온통 주위를 감싸고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맞이하는 순간은 황홀함과 감격을 넘어 경이롭다.
아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랑을 고백하게 하며 어떠한 조건이나 타산 없이 순수하고 솔직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랑이 언제까지나 처음처럼 순수하게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아이 그 존재 자체에 대해 느꼈던 순수한 사랑은 내 아이를 보호하고 좀 더 잘 도와주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조금씩 변형되고 분명히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욕망인데 그 욕망 때문에 불쑥불쑥 불안이 출현하곤 한다.
물론 사랑은 언제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속 존재한다. 욕망과 불안이 서로 치열하게 자리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목 놓아 외친다.
비슷하게 이러한 사랑의 메커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들을 아끼는 방법’ 또는 ‘그들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을 투사하고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불안에 휩싸인다.
오직 사랑의 이름으로, 를 외치면서 말이다.
만약 그들을 위해 그들을 개조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근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그들을 개조하려 하는 것은 내 기분이 나아질 것 같기 때문에 그들을 바꾸려고 하는 나의 불안의 증거일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그 존재 자체로 이미 사랑받기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따뜻한 조건 없는 존중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로저스 선생님이 그렇게 강조하고 주장했던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의 대상이자 자기실현의 경향성을 지닌 유기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불안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욕망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완벽하지 않지만 이미 충분하다는 것은 결국 나를 흐릿하게 만들고 마음을 완전히 활짝 열었을 때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불완전함을 기꺼이 수용하고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고,
무엇보다 내 안에 있는 불안과 욕망, 희망과 불만 같은 감정들이 사라져 오롯이 함께 머물 수 있을 때 우리는 존재로서의 사랑을 느끼고 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존재를 사랑하는 느낌은 평생 계속 연습해야만 느릿느릿 걸어오기에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 안에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채울 수 있는 것이 적어지듯이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더 많이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사랑하면서도 불안하지 않는 찐 사랑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