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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Feb 17. 2024

가시가 목에 걸렸다

1부 버킷리스트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친구들보다 공부를 조금 더 잘해서 우쭐대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각자 집안 형편에 대해서 말하는 기회가 생겼는데,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우 100마리를 키우는 영농후계자. 관광버스 20대를 운용하는 사업가. 아버지는 지역유지 어머니는 골프연습장을 운영하는 회장까지. 저들은 그렇게 살아도 됐다. 외도하는 어머니 양극성 정동장애를 앓고 있는 아버지.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나는 한 없이 초라해졌다. 출발선이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자 난 전교 1등을 놓치면 안 됐다. 

    

가정에 신경 쓰지 않는 어머니 덕분에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오롯이 내 삶을 책임지기 위해 새벽까지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선택과 집중이 삶의 신조였다. 가장 빛나는 십 대 이십 대 누려야 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다만 목표가 있었다. 찰거머리처럼 대물림되는 가난을 뜯어내고 싶었다. 취업 후 생활보장대상자 차상위계층에서 졸업했다. 10년 일해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 내 삶에 순풍이 불 거로 생각했다. 좋은 일만 생겨야 하는데 결혼을 꿈꾸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연고 없는 광주에서 어떤 일을 해도 풀리지 않았다. 삶은 실패와 좌절이 일상이었다. 회사 집 헬스장 루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다. 소극장 연극과 영화를 관람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독서 모임에 참여했다. 하지만 세 번의 모임 모두 신0지 포교였다. 두 번의 친목 모임은 보험 영업이 목적이었다. 영혼을 잃어버리자 희망이 사라졌다. 이어서 원망과 자책이 들이쳤다.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인 걸까?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 정신은 꼬리를 먹는 뱀 우로보로스처럼 좀먹었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4시간 이상 자지 못했다. 섭식장애가 생겨 두 달 만에 18kg이 빠졌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혼자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해 상담받고 약을 타왔다. 그렇게 1년 넘게 병원에 다닐 때였다. 오늘 의사가 한 질문이 생선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현수 씨에게 돈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나요?”     


왜 돈을 벌려고 했을까? 심연 속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했을까? 단순히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살려고 한 걸까? 주말에 늦잠을 자고 싶어도 일어났다. 잔업과 특근을 챙긴 이유를 떠올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돈을 모으고 미래를 준비했다. 생활보장대상자 차상위계층에서 중산층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가치를 떠올렸다. 가난에 빼앗긴 가족을 되찾고 싶었다. 다만 언제부턴가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목표를 가치라 착각하고 살았다. “삼 년 안에 취업에 성공하겠다. 서른 살에 내 집을 마련하겠다.” 같은 눈에 보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차안대를 끼고 앞으로 달렸다.   

  

지금 돈을 아무리 벌어도 엄마의 외도를 막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정신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다만 주어진 미래는 선택할 수 있다. “가족을 만들고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내가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다면 나와 같은 슬픔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좋은 부모보다 보편적인 부모가 되어주고 싶었다. 아이의 기쁨이 나의 행복이 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내 아픔을, 상처를, 기억을 치유하고 싶었다. 이게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움직이게 만든 가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목표를 가치라 착각했다. 그래서 달성 여부에 따라 행복이 가까이 올 때도 멀리 떠나갈 때도 있었다. 이제는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으로 좌절하지 않는다. 가끔 힘들어 주저앉을 때는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 꿋꿋이 길을 걷는다. 혼란한 삶 속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나침판,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목표가 아닌 가치를 통해 삶의 이 막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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