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어린 시절이다.
_나를 살린 치유의 문장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이에게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줄 어른이 없었어요.
홀로 어떤 감정인지도 모르는 아픔을 견뎌야 했던 아이는 점차 감정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을 거예요.
존재로서 사랑받고 소소한 경험을 공유하는 일상이 적었던 아이는 점차 성취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네요.
자아 정체감을 잘 발달시킨 사람은 자신이 이루어낸 과업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고민하며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의 오후 두 시, 나의 2회 차 상담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밝고 편안해 보이시는 상담사님 앞에 인형을 들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주간의 안부를 물으셨다. 나는 1회기 상담을 마친 후 매일 감사 일기와 하루 동안 신앙 안에서 나를 돌아보는 일기를 기록했고, 무기력의 흐름은 조금씩 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강아지들과 처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산책을 했고, 내가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나를 위한 시간이라며 다독였다. 느리지만 조금씩 회복이 시작되고 있었다.
2회 차 상담은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대학교 때 겪었던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교 때 겪었던 깊은 우울은 지금 현재의 상황과도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상담의 필요성을 느끼셨던 것 같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리 밝거나 행복하지 못했다. 특히 부모님이 헤어진 10살의 시점은 내게 지금도 회색의 빛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랑하는 아빠가 한순간에 나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던 그날, 하지만 누구도 어떤 상황인지 어린 나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던 날들. 엄마는 긴 시간 힘들어하셨고,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주변 지인들에게 엄마의 힘든 상황을 터놓으며 아픔을 해소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은 채 10살의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이 유난히 내게 아픔으로 남았던 이유는 아빠와의 깊은 애착 때문이었을까. 아빠는 나에게 세상의 전부였다. 세상의 사랑을 모두 모아 나에게 주시는 분처럼 느껴졌고, 어린 시절 아빠만 졸졸 따라다니며 행복을 느꼈었다. 추운 겨울, 가족들과 등산을 하고 오면 아빠의 어깨에 올라 즐거워하기도 했고, 함께 어묵을 사 먹고 이야기하며 행복해하기도 했다. 아빠가 회사에서 돌아오면 누구보다 빨리 아빠를 마중 나가 안겼고, 크고 작은 선물들을 받고 아빠가 가르쳐주는 영어 노래를 함께 부르며 행복해했다. 나의 10살 이전의 어린 시절은 전부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이혼이라는 이유로 10살의 여자아이의 인생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만나기 어려웠고 지금은 연락조차 닿지 않는다. 지금은 나도 어른이 되었기에 부모님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고 용서했다. 하지만 당시 어린 나는 나의 삶에, 우리 가정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조차 이해하기 힘들었다. 슬퍼하는 엄마를 보며 학창 시절 내내 제대로 그 이야기를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슬플 때 홀로 슬퍼하고 아픈 감정은 억누르고 괜찮은 척 웃으며 사는 것이 긴 시간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상담사님은 이야기를 들으시며 아버지를 잃은 10살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아이의 마음이 어땠는지 물어보아줄 어른이었다고 하셨다. 그 어린 마음이 괜찮은지, 다치지 않았는지, 슬픔은 어떻게 느끼고 해소해야 하는 것인지 물어봐주고 함께 아픔을 나눌 어른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되지 않았기에 아이는 감정을 홀로 느끼고, 때로는 그 감정에 지배당하고, 자신이 우울한 상태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학창 시절,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깊은 우울에 빠져든 것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한 번씩 우울을 경험했고 대학교에 다닐 때는 그 증상이 심각해 휴학을 하고 6개월 정도 침대에서만 있었던 기억이 있다. 나의 감정을 돌봐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능적으로 잘 살아왔다고 상담사님은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살아가면 안 된다고 하셨다.
대학 시절에도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열심히 살아가다가 위염이 생겨 내시경을 했었다. 그때 의료사고가 났었고 이석증을 진단받아 잠시 휴학을 했었던 적이 있다. 이때 사과조차 하지 않고 치료만 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사의 태도에 나는 가장 분노했던 것 같다. 사람이 실수를 했을 때 사과를 하는 것이 가장 먼저 아닌가? 하지만 그 병원의 의사들은 모두 한 편인 듯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 상황에 대한 억울함 때문인지,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나의 학사 일정을 멈춘 채 휴학을 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 사건을 계기로 오랜 시간 힘들어했고 그것이 우울로 이어졌다.
지금의 상황도 어쩌면 비슷한 듯하다. 이번에는 학교 생활과 외부 강의, 석사 준비로 하루에 5시간 이내로 잠을 자고 내게 주어진 과업들을 모두 해가는 일상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학교의 문화를 바꾸기 위한 발제와 토론도 함께 해갔다. 이 과정들이 내게는 쉽지 않았는지 눈을 쓰기 힘든 '각막 미란'이라는 질병으로 병가를 내게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때 식사를 하기도 힘들고, 잠도 자기 힘든 상황이었고 이 상황이 현재의 우울로 함께 이어졌던 것 같다.
상담사님은 내가 반복하는 말을 찾아내셨다.
"그쪽에서 사과만 했더라면..."
나는 어떤 사고나 부당한 상황이 있을 때 많은 보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진정 어린 사과를 원했고 그것이면 내 마음이 나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사과라는 것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고,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법적인 책임까지 인정하는 것이기에 똑똑한 세상은 언제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도 피해를 입은 내게 사과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내가 만난 세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깊이 나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외로움, 마음을 돌보지 않은 채 열심히 살아왔던 삶, 그리고 공정할 것이라고 믿었던 세상에서 경험한 부당함, 그로 인해 멈춰졌다고 생각한 나의 삶. 이것이 나를 아프게 했었나 보다. 상담사님은 그런 나에게 진정한 '나'를 만나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이야기하셨다. 이 아픔이 나의 자아를 만나게 해 주었을 거라고. 그리고 끊임없이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과업 중심적으로 살아왔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자아 정체감을 잘 발달시킨 사람은 자신이 이루어낸 과업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고민하며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셨다.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 나의 존재와 의미 그 자체에서 가치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열심히만 살아가는 그 삶에서 벗어 나와 진정한 나의 자아를 만나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심리학 서적과 연사들의 강연을 통해 지겹도록 들어왔던 말이다. 하지만 그 지겨운 문장들이 끈질기게도 내 삶에 적용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나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하고 말은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극한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넣으며 성취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그 의지와 결과에 놀라워했지만, 나의 깊은 내면은 곪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2회기의 상담은 나의 아픔과 외로움의 근원을 알아간 시간이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치유를 위해서는 나의 아픔을 보는 것이 가장 먼저이기에... 훌륭하게 해낸 나에게 잘 해냈다고 칭찬을 건네고 싶다. 그리고 이제 소중한 나를 돌보며, 사랑하며, 기뻐하며 살아가보자고 손을 내밀어보고 싶다.